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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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서(蜀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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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틀:




譙周
?[1]~270년


1. 개요[편집]


삼국시대 촉한의 인물로 는 윤남(允南). 익주 파서군(巴西郡) 파충국(巴充國) 출신으로 익주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다. 초영시[2]의 아들.


2. 정사[편집]


어려서 가난했지만 학문에 힘써서 근처 주군에 그 명성이 높았다 한다. 초주는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동복 형과 함께 살았다. 성장한 이후에는 고서에 묻혀 학문에 정진했고, 집은 가난했지만 일찍이 가난한 집안 상황에 관한 질문을 한 적이 없었으며, 경전을 통독할 때는 혼연히 홀로 미소를 지으며 잠자는 일과 먹는 일을 잊었다. 육경(六經)을 정심하여 연구했는데, 특히 편지를 쓰는 일에 탁월했다. 그는 천문에 매우 밝았지만 마음을 두지 않았으며, 제자백가의 문장에도 관심이 없었으므로 전부 읽지 않았다. 그의 신장은 8척이나 되었고, 풍모는 소박하였으며, 성격은 진실되고 꾸미지 않았고, 명민한 두뇌의 소유자였다.

유비 사후에 중용되어 학문이나 교육과 관련된 직책에 임명되었다. 상당한 영향력과 실적을 지닌 정치가, 익주 지방의 유력한 호족이라고는 볼 수 없고, 명사 또는 학자로서, 대체로 저술과 학술 그리고 교육 계열의 일에 종사한 관료라고 할 수 있다. 정사에서 드러나는 조정에서 한 일은 간언과 저술 정도로 그의 저서로는 촉본기가 있다. 그가 법훈과 오경론 그리고 고사고를 비롯한 100편의 저작을 남긴 것을 미루어 보아, 그는 상당한 학자이자 저술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맡은 직무나 학문에만 매달린 채, 당대의 시류나 정국을 외면했던 인물은 아니었다.

건흥(建興) 연간, 승상 제갈량은 익주목을 겸임하면서, 초주를 권학종사(勸學從事)로 임명했다. 촉기에서 따르면 초주가 처음 제갈량을 뵜을 때, 주위 사람들이 모두 그를 비웃었다. 법 집행 담당자는 비웃은 자들을 처벌해야 된다고 청했다. 제갈량이 말하길

"그만두시오 그만둬. 나도 못 참겠는데 다른 사람들은 오죽하겠소!"

진수는 풍모가 소박하다고는 했지만 그건 제자라서 그런 말을 한 것이고 실제로는 어지간히 못생겼었나 보다...

대장군 장완이 익주자사를 겸임할 때, 초주는 전학종사로 임명되어 주의 학자들을 총괄했다. 후주 유선이 태자를 세우자(238년), 초주를 복야로 임명했으며, 후에 가령으로 전임시켰다.

유선이 점차 향략에 빠지자, 상소를 올려 그를 질타했다.

옛날 왕망 정권이 무너지자, 호걸들이 동시에 일어나 주와 군을 차지하고 제왕의 옥새를 갖기를 원했었습니다. 이때 현명하고 재능있는 선비들은 돌아가 의탁할 만한 사람을 그리고 희망했는데, 반드시 그 세력의 넓고 좁음을 근거로 하지 않고 오직 덕의 얕음과 두터움만을 보았을 뿐입니다. 이 때문에 당시의 경시 및 대중을 갖고 있는 자들은 대부분 세력면에서는 이미 넓고 컸지만, 쾌락을 추구하고 욕망을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고, 착한 일을 함에 있어서는 게을렀으며, 유람하며 사냥하고 먹고 마시면서 백상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세조가 처음으로 하북에 진입했을 때, 풍이 등이 그에게 권유하기를 '응당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해야만 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세조는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쓴 자들을 재심하여 처리하는 데 노력했으며, 음식을 절약하고, 법률과 제도에 따라 행동하였으므로 북쪽의 주에서는 칭송의 노래를 부르고 감탄하였고, 명성은 사방 먼 곳까지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등우는 남양에서부터 그를 따랐고, 오한, 구순은 세조를 알지는 못했지만 멀리서 그의 덕행을 전해듣고 임기응변의 계책을 사용하여 어양과 상곡의 돌격 기병대를 들어 광아에서 세조를 맞이했습니다.

이 밖에 세조의 덕망을 흠모한 자로는 비융, 경순, 유식의 무리로부터 병든 몸을 수레에 싣고 관을 지고 오거나 강보의 어린이를 등에 엎고 오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므로 약한 것으로 강한 것이 되었다고 할 수 있고, 왕랑을 멸망시키고 동마를 평정하고 적미[3]

를 무찔러 제왕의 대업을 이루었습니다. 낙양에 도착한 후, 세조는 일찍이 잠깐 외출하려고 거마를 준비시켰는데, 요기가 간언하여 말하기를, '천하는 아직 안녕되지 못한 상태인데, 신은 폐하께서 자주 외출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세조는 즉시 수레를 돌렸습니다.

외효를 정벌했을 때, 영천의 도적들이 봉기했습니다. 세조는 낙양으로 돌아와 단지 구순을 파견하여 가도록 했는데, 구순이 말하기를, '영천에서는 폐하께서 원정을 하였기 때문에 간사한 자들이 봉기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들은 폐하께서 돌아온 것을 아직 모르고 있으니, 때에 맞춰 항복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폐하께서 직접 그곳으로 가면, 영천의 도적들은 반드시 항복할 것입니다' 라고했습니다. 그래서 세조는 영천으로 갔고, 그 결과 구순의 말처럼 되었습니다. 때문에 긴급한 일이 아니면 잠시 외출하는 것조차 과감히 하지 않고, 긴급한 일에 이르러서는 자신의 안위도 생각지 않으려고 한 것입니다.

옛날의 제왕들은 좋은 일을 하려는 것 또한 이와 같았습니다. 때문에 경전에서는 '백성들은 이유없이 돌아가지 않는다' 라고 했습니다. 진실로 그들은 덕행을 우선한 것입니다. 지금 한나라는 액운을 만나 천하가 셋으로 나뉘어졌으며, 영웅과 지혜로운 선비들이 현명한 군주를 그리워하고 바라는 때입니다. 폐하께서는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3년간의 상을 마쳤는데, 말을 할 때마다 눈물을 흘리는 등 증민(증삼민자건)[4]

이라도 폐하를 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현명한 사람을 존경하고 재능있는 자를 임용하여 그들로 하여금 힘을 다하도록 하는 점에서는 주나라의 성강(주성왕, 주강왕)을 능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국내는 한마음으로 협력하고, 나이 많은 자와 적은 자가 힘을 내니, 신이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신은 큰 소원을 억제할 방법이 없으니, 그것은 폐하께서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는 일을 널리 하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무거운 수레를 끄는 자는 큰 힘을 내지 않는 것을 걱정할 것이고, 커다란 곤란을 제거하는 자는 널리 좋은 수단을 강구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할 것입니다. 그리고 종묘를 이어 섬기는 자는 헛되이 복을 구하지 않고, 백성들을 솔선하여 하늘을 존경해야만합니다. 호수나 숲에서 즐기시고, 어떤 때는 빈번하게 출동하시니, 신은 어리석고 고집스러워 사사로이 마음이 편할 수 없었습니다. 무릇 걱정이나 책임을 몸에 지고 있는 사람은 향락을 다할 틈이 없습니다. 선제의 뜻은 천하를 통일하는 것이나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진실로 향락을 다할 때가 아닙니다. 원컨대 악관[5]

을 줄이시고 후궁이 증착하여 만든 관을 감소하고, 단지 선제께서 펴시던 일만을 받들어 시행하고, 아래로는 자손들을 위해 절검을 보이십시오.


후에 중산대부에 임명되었지만, 여전히 태자를 모셨다. 비의 이후 강유의 북벌로 인해 피폐해지자, '구국론'이라는 논문을 지어 지속되는 전쟁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제갈량의 공식 후계자였던 비의 생전에는 강유의 병력을 1만 정도로 제한하여 무리한 병력 소모를 막는 등 적절한 제어를 했지만 비의가 죽은 뒤 강유의 북벌은 성과도 있었으나 단곡 전투 등의 큰 패배를 겪어, 이에 촉의 백성들이 전쟁에 염증을 느껴 지쳤고 강유가 입은 피해를 원망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초주는 당시 상서령 진지와 형세의 이로움과 해로움에 대해 논의하고 조정에서 물러나 글을 써서 그것을 구국론(仇國論)이라고 했다.

인여국은 약소하고 조건국은 강대하지만 함께 천하를 다투어 구적이 되었습니다. 인여국에 고현경이라 하는 자가 있었는데 복우자에게 묻기를 '지금 국가의 대사는 아직 안정되지 않았으므로 조정의 윗사람과 아랫사람들이 내심 걱정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일에서 약한 것으로써 강한 것을 이길 수 있었던 사람은 어떤 방법을 이용했습니까?' 라고 했다. 복우자가 말하기를, '나는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대국의 입장에 있으면서 걱정이 없는 자는 항상 대부분 오만하고, 약소국의 입장에 있으면서 걱정이 있는 자는 항상 착한 행동을 사모한다고 합니다. 대부분 오만하면 동란을 낳게 되고, 착한 행동을 사모하면 천하를 태평스럽게 하게 되는데, 백성들을 양육하여 적은 수를 갖고 많은 수를 취했고, 구천은 백성들을 긍휼히 여겨 약소국으로써 강대국을 이겼습니다. 이것이 그 방법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고현경은 '과거 강대한 항우와 약소한 한이 서로 다투어 싸웠으므로 하루라도 편안히 쉬는 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항우는 한나라와 맹약하여 홍구를 경계로 삼아 각기 돌아가 백성을 쉬도록 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장량은 백성들의 마음이 이미 정해졌다면 형세를 바꾸는 것은 어렵다고 주장하고 군대를 이끌고 항우를 추격하여 끝내는 항우를 타도했습니다. 어찌 문왕의 일을 따를 필요가 있겠습니까? 조건국에는 마침 환란이 있으니, 나는 그 틈을 타서 그 나라의 변방 지역을 함락시키고 그 환란이 가중되어 나라를 소멸시키기를 기다릴 것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복우자가 말했습니다. '은(殷), 주(周)의 교체기에는 왕후는 대대로 존경되었고, 군신 관계는 오래도록 공고했으며, 백성들은 군주의 통치에 습관이 되어 있었는데, 뿌리가 깊은 것은 뽑기 어렵고, 공고함에 의지한 것은 옮기기 어렵습니다. 이 시대에 있어서는 비록 한고조일지라도 어떻게 칼을 쥐고 말에 채찍질을 하여 천하를 취할 수 있었겠습니까? 진(秦)나라가 봉후를 폐지하고 군수를 설치한 후, 백성들은 진나라의 노역으로 지치고, 천하의 토지는 붕괴되는 듯했으며, 어떤 때는 해마다 군주를 바꾸고, 어떤 때는 달(月)마다 공을 바꾸었으므로 새나 짐승조차도 놀라 누구를 따라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호걸들이 일제히 다투며, 호랑이나 이리가 확득물을 찢어 나누듯이 영토를 분열하였는데, 신속하게 공격한 자가 가장 많이 얻었고, 행동이 느린 자는 병탄되었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와 조건국은 모두 새 군주에게 나라를 인도했고 시대는 바뀌어 진나라 말기 같은 혼란한 시대가 아니라 실로 육국이 동시에 할거하는 형세가 있습니다.

때문에 문왕은 될 수 있지만, 한고조는 되기 어렵습니다. 대체로 백성들이 피로하다면 소란의 징조가 생기고, 위가 오만하고 아래가 포학하면 와해의 형세가 일어날 것입니다. 속담에 말하기를, '화살을 여러 번 쏴서 적을 맞히기를 바라는 것은 신중하게 살피고 쏘는 것만 못하다'라고 했습니다. 이 때문에 총명한 사람은 작은 이익 때문에 눈을 옮기지 않고, 주관적으로 추측하여 계획을 바꾸지 않으며, 시기가 가능해진 연후에 행동하고 시운이 부합된 이후에 일어납니다. 과거 탕왕, 무왕의 군대가 두 번 싸우지 않고 이겼던 것은 진실로 백성들의 노고를 신중하게 보고 시기를 신중히 살폈기 때문입니다. 만일 무력을 다하여 몇 번이고 정벌하여 토지가 붕괴되는 형세가 생기고 불행히 어려움을 만나게 된다면, 비록 총명한 사람이라도 다른 방법을 강구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을 종횡으로 기이한 계책을 내어 틈도 없이 군대를 출동시켜 파도를 뚫고 쉐가 가는 길을 끊고, 계곡을 지나고 산을 넘어 배와 노에 의지하지 않고 나루터를 건너간다면 나는 어리석은 사람이므로 실제로 도달하지 못할 것입니다.

구국론


구국론은 초주 같은 익주 출신의 의견을 반영한다는 의견이 있지만 사실 이 시점에선 외부 출신, 익주 출신을 가리지 않고 강유의 북벌을 비판하였다. 당장 이 구국론 자체가 외부 출신이자 제갈량의 후계자 비의의 뒤를 이은 진지의 협조하에 지어진 논설이다. 서술한 바와 같이 구국론을 저술한 초주 외에도 제갈량과 같이 일했던 동궐이나 제갈량의 아들인 제갈첨 등 제갈량의 뒤를 잇는 정계인물들은 물론 요화, 장익 같은 일선 장군 등, 당시 촉의 지각있던 인재들은 대부분 강유의 북벌을 비판하였다.

한 가지 특기할 부분이 있다면 화양국지에서 구국론을 '사람들이 살펴보려 함이 없었다(人莫察焉).'라고 적은 대목이다. 당대의 촉한 내정의 1인자인 진지의 협조를 받아 지은 논문이었는데도 왜 사람들의 호응이 없었는지는 의문이지만, 양희전에는 그 당시 사람들이 초주를 논하기를 초주는 시대에 맞는 재능을 갖추지 못하여 주변에서 그를 존중해주는 사람이 적었다고[6] 직설적으로 적고 있는 것을 보아 촉한 시절 초주는 정치가보다 학자였고 그가 학자였던 만큼 이론을 세우고 과거의 일에 오늘 일을 비추어 보는 것에 밝아 익주 외부 출신들만 아니라 익주 사람들조차 그가 현실적이지 못하고 정책을 논하는데 재능이 없다는 평가 및 반응을 보였을 가능성이 있다. 거기다가 아무리 강유의 북벌을 비판한다고 해도 당시 촉한 사람들이 "한적불양립, 왕업불편안"이라는 한실부흥의 목표로 하는 촉한 건국의 이데올로기를 두고 한고조가 되기 어렵다며 이를 뒤로 미루자는 말을 외면했다는 말도 된다.

초주전에 따르면 광록대부[7] 시절 구경(九卿) 다음가는 지위가 됐다. 초주는 비록 정사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유아한 품행으로 존경을 받았고, 때때로 중대한 문제를 자문하러 오면 항상 경전에 근거하여 대답을 했다. 그리고 후진 중에서 지적 관심이 강한 자들은 또한 그에게 의심나는 문제를 자문했다고 한다. 이런 재야에서의 존경과는 달리 막상 촉한 정계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은 약소했다. 이런 상황에서 초주가 은근히 따돌림을 받았고 이에 불만을 품었을 가능성은 있다. 참고로 초주의 촉한에서 최종직책이 바로 이 광록대부였다.

263년 겨울에 위의 등애가 강유관을 점령하고 막힘없는 기세로 진군했다. 그런데 촉나라, 특히 군주 유선은 위군이 금방 들어오지 않을거라 여겨 아예 방비를 않고 있었다.[8] 한편 제갈첨의 군대가 패배한 후 촉한인들은 뜻하지 않게 위나라 군대가 도달하니 성을 지키는 데 조절과 통제를 못하였고 등애가 이미 평지로 들어왔다는 소문을 듣고 (그때부터) 민심이 동요했다.(자치통감) 촉한의 조정에서는 등애가 이미 평지로(平)[10]으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자, 유선은 신하들을 모아 상의했지만, 누구도 좋은 계책을 내지 못했다. 어떤 사람은 촉은 본래 오와 동맹국이었으므로 오나라로 도주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어떤 사람은 남중[11]의 일곱 군이 험준하고 두절되어 있어 스스로 방어하기 쉬우므로 남쪽으로 도망 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초주는 이때 직책이 광록대부였는데 조정에서 오로지 혼자 항복론을 주장했다. 남쪽으로 가봐야 반란뿐이고 오나라에 의지해봐야 나중에 오나라가 망하면 두번 항복하는 꼴이 된다며 '걍 깔끔하게 여기서 항복합시다'라고 주장한 것인데, 위나라는 항복을 받지 않을 거라는 비난도 초주가 다시 동오가 항복하지 않았으니 촉을 대우해 줄 것이라고 반박해 초주의 이치를 당해낼 자가 없었다.

그러나 이 때 유선이 남쪽으로 들어가는 것을 결정짓지 못하고 주저했고 조정의 어떤 이들은 '폐하께서 위나라 군대가 깊숙이 침입하도록 하기 위해 남쪽으로 갈 계획을 갖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황제의 권위가 강한 촉한에서 황제의 의중이 남중으로 피신하는 계책을 쓰는 것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었고 초주가 주로 남중으로 피난하는 것을 반박하는 것으로 봐서 아무래도 당시 촉한 조정의 중론은 남중으로 가려는 것으로 흐르고 있었던 듯 하다. 이는 험요지가 많았던 남쪽으로 가면 지리에 밝지 못한 등애군이 유선과 촉한 조정을 제압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또 이 기록은 초주의 말을 듣고 주저하고 있다고 해도 유선 역시 처음엔 남쪽으로 들어갈 결정을 지을 생각이 있었다는 말도 된다.

이에 초주는 상소를 올려서 남중으로 가면 이민족을 소모시켜 심하면 반란의 위험이 있다는 주장에 덧붙여 여기에 일찍 항복하면 작위와 토지를 얻을 수 있고 만약 남쪽으로 가서 대세가 다하면 큰 화를 입을 것이며 성인은 운명을 알고 자기 견해를 고집하지 않는다고 유선을 유혹했다. 그래서 유선은 결국 수도에서 항전하거나 일단 다른 곳으로 후퇴하여 적의 보급선을 늘려 그들을 불리하게 하여 싸워볼 생각도 없이 조정의 의론도 무시한 채 오로지 초주의 건의만을 따라 항복하고야 만다.

이때 북지왕 유심이 유선이 초주의 계책을 쓰는 것을 분노하여 말했다.

"만약 계책과 힘이 다하여 화란과 실패가 임박했다면, 응당 부자(父子)와 군신(君臣)이 성을 등지고 한번 싸워 사직을 위해 함께 죽고 선제(先帝)를 만나는 것이 옳습니다."


이렇게 망하더라도 한 번 싸워는 보고 실패하면 다 같이 저승에서 유비를 만나자는 소리였으나 유선은 이미 항복할 생각이 만만해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마침내 옥새를 보냈다. 이날, 유심은 할아버지 소열제의 릉에서 곡하고는 먼저 처자식을 죽이고 그 뒤 자살하니 좌우에서 눈물을 흘리며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또 유선의 궁인들을 위나라 장수들에게 나누어주자 후궁 이소의가 '나는 이 치욕을 2번, 3번 감당할 수 없다'며 자결하였다.

이후 초주는 사마소에게 양성정후의 직위를 받았고 초주를 초빙했다. 초주는 출발하여 한중(漢中)에 도착했지만 병 때문에 가지 못했다. 265년 여름에 파군의 문립이 낙양으로부터 촉으로 돌아와서 초주를 방문했다.초주는 대화중에 서판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써서 문립에게 보여주었다.

"전오(典午)는 갑자기 월유(月酉)에 죽는다."

전오(典午)란 '사마(司馬)'를 뜻하고 월유(月酉)는 '8월(月)'을 의미한다. 8월에 이르러 사마소는 과연 세상을 떠났다. 서진이 세워진 이후 낙양에 병든 몸을 이끌고 입시했다. 진 왕실이 제위에 오르자, 여러 차례 조서를 내려 초주를 빨리 입궐하도록 했다. 초주는 병든 몸을 수레에 싣고 267년 낙양에 도착했다. 초주가 질병으로 일어나지 못하자, 그의 집으로 가서 기도위로 임명했다. 초주는 자신이 공로가 없는데 봉토를 받았으므로 작위와 봉토를 돌려주려고 했지만,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69년에 진수는 일찍이 파서군의 중정(中正)을 맡고 있었는데, 인물을 평가하는 일을 마치고 휴가를 요청하여 집으로 돌아오면서 초주가 있는 곳으로 가서 이별을 했다. 초주가 진수에게 말했다.

"옛날 공자는 72세로 유향양웅은 71세로 세상을 떠났네. 지금 나의 나이는 70세를 넘었네. 줄곧 공자의 유풍을 흠모하여 유양과 궤를 함께 할 수 있었네. 아마 다음해를 넘기지 못하고 반드시 영원히 떠나게 될 것이므로 다시는 서로 만나지 못할것이네."

진수는 초주가 미래의 일을 아는 기술이 있음을 의심했는데, 그는 공자 등의 말을 빌려 서술했을 뿐이었다. 초주는 태시 6년(270년) 가을에 산기상시로 임명되었지만, 질병이 심해 임명을 받지 못했고, 겨울이 되자 죽었다.

진양추에 실린 조서에 따르면 '이 심히 슬퍼하니 조복 한 구, 옷 한 벌, 금전 15만을 내린다.' 초주는 초희가 상언하는 것을 멈추게 했는데 초주가 임종에 이르러 초희에게 부탁하길 '오랫동안 병을 앓아 일찍이 조정에 나가 조회한 적이 없는데 만약 나라에서 은혜로 조복이나 옷가지 등을 내린다면 몸에 입히지 말라. 응당 구묘로 돌아갈 텐데 길이 험난하니 미리 가벼운 관을 준비하라. 빈렴이 끝나면 받은 것들을 위로 돌려보내도록 하라.'하니 조서를 내려 의복을 되돌리고 관목을 마련할 비용을 주었다.

익부기구전에 따르면 익주자사 동영(董榮)이 초주의 상을 주학에 그려놓고 종사 이통으로 하여금 송을 짓도록 하였는데 송에 이르길 "근신한 초후여! 고대 성현의 덕을 좋아하고 유학을 전술하며 도리를 보배처럼 여기고 진솔함을 품었네. 세속의 성쇠를 명찰하고 고아한 명성과 아름다운 행적이 시종 책에 적혀있네. 우리 후배들은 현자를 존경하여 찬예하지 않는 말이 없고 여러 전대의 철인을 따라잡아 그림을 그렸네. 아~! 앞으로 올 사람들이여 이 현저한 모범에 교훈을 얻기 바라네."

초주에겐 세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초희(譙熙), 초현(譙賢), 초동(譙同)이다. 어린 아들인 초동(譙同)은 초주의 학업을 매우 좋아하였으며, 또한 충의와 질박함을 행동의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석현의 현령으로 제수했는데, 동궁세마(東宮洗馬)로 승진시켜 불렀지만 취임하지 않았다. 손자로는 큰 아들 초희의 아들인 초수와, 서진에서 재동내사를 지낸 초등(譙登)이 있다.

초주의 직계는 아니지만 같은 초씨 가문인 초헌지(譙献之)는 초수와는 같은 항렬이다. 선대와의 직접적인 관계 언급이 없는걸로 봐선 방계 후손으로 보이는데 성한정권에서 사공을 지냈고 이후 동진의 환온이 성한을 멸한 후에는 참좌가 되었다. 초헌지의 손자 초종(譙縱)은 어려서 신중하여 촉인들이 그를 사랑했다. 안서부참군이 되었고 일찍이 성도왕을 칭했다. 초종이 성도왕을 칭하면서 수립한 정권을 '후촉' 이라고도 부르는데 이후 초종은 훗날 남조 송나라의 무제가 되는 유유를 토벌하겠다고 벼르다가 유유가 보낸 동진의 익주자사 주령석에게 패사한다.

그에 대해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전형적인 문사로 자기가 하고 싶은 학문하면서, 촉한에 충성했다. 실무직에 있어본 적은 한번도 없지만, 촉에 해를 끼친적도 없다. 그래서 정사에서의 비중은 비유하자면 공기였는데, 멸망 직전에 올린 간언이 연의 덕분에 굉장히 유명해져 오늘날까지 회자된다.

진수는 초주에 대해 동중서의 규범을 지닌 일세의 선비라 평하고 있다. 그러나 진수가 초주의 제자인데, 진수가 개인적인 원한으로 인하여 제갈첨에 대해 악평을 썼다는 주장도 있으므로, 진수가 스승 초주를 치켜세웠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천문학이 어쩌고 저쩌고 하니 사람일이 어찌 저찌 또는 저 나무가 부러졌으니, 나랏일이 어찌 저찌 이런 논설을 펴는 걸 보면 동중서 계열의 학자가 맞긴 한 것 같다.

천문과 기타 학문에도 능해 사마소의 죽음을 예견하기도 했다.[12] 외모가 꽤나 웃기게 생겼었는지, 초주가 면접을 볼 때 말을 자주 더듬어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웃느라 난리였다고 한다. 이에 대해 누군가 주의를 주자, 제갈량이 '나(고)도 웃긴데 어찌하겠는가?'(孤尙不能忍, 況左右乎)라며 반문하였다고 한다.


3. 연의[편집]


심각한 패배주의적 성향으로 그려진다.

첫 등장은 214년. 유비의 공세에 절망해 있는 유장이 유비에게 항복할 의사를 보이자 "현명한 판단입니다. 항복이 답입니다."라는 식의 말을 했다가 황권유파에게 칼빵을 맞을 뻔했다. 이 사람의 이 말 한마디가 유장이 항복의 결심을 굳히는 가장 큰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 때에 초주는 어린애에 불과했다. 어린애인 초주를 내세워 이런 말을 하게 한 걸 보니 나관중은 어지간히 초주까인 듯하다.

제갈량이 북벌에 대해 대신들과 논의하려 하니, 자신의 주된 특기인 천문학을 곁들이며 북벌은 하늘의 뜻이 아니다란 말을 하는데, 이에 제갈량은 "하늘이고 뭐고 상관없이 이건 선제의 유지"라고 대답한다.

사실 이 시대의 성향이 뭐 어느 날 어느 시에 서리가 내렸으니, 이 방향이 길하다 따위의 오늘날의 논리로는 말도 안 되는 판단이 정론이었으니, 이상주의자면서 또한 현실주의자였던 제갈량의 입장에선 이미 스스로 모범답안까지 다 준비해 두었을 것이다.


4. 평가[편집]



4.1. 긍정적 평가[편집]


초주가 악평을 받게되는 이유는 항복에 대한 문제였다. 당시 서촉의 조정은 남만으로 도주하거나, 손오로 망명하자는 의견들로 갈라지게 되었다. 또한 성도 내는 위군의 침공으로 인하여 혼란에 빠져 성안의 치안과 질서가 어지러운 상황이었다. 이때 초주가 위에 대한 항복을 건의한 것.

초주의 의견은 다음과 같았다.

1. 남중은 옛부터 모반의 땅이므로 제갈량이 평정하고 나서야 고분고분해졌으나, 여전히 근심하고 원망하는 역심을 품고 있는데다가,[13] 만일 서촉 정부가 그곳으로 이전한다면, 위군이 거기까지 남진해 남중이 피폐해질 것이니, 남중인들은 이에 들고 일어나 모반하거나 변란을 일으킬 것이다.

2. 손오에 의지한들 독립군주는커녕 손오의 신하로 전락하여, 나라는 되찾을 수 없을 터일뿐더러, 오가 를 이기지 못하는 건 불보듯 당연한 이치다. 그렇게 되면 다시 위의 신하가 될 것이니 의미가 없다.

3. 항복한 자를 잔혹하게 다루면 손오가 결사항전하리라는 것과 검각의 강유가 죽을 때까지 싸워 위도 엄청난 피해를 보리라는 걸 등애는 모르지 않는다. 따라서 항복하면 관대하게 받아줄 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판단은 현실에 근거한 논리라고 평할 수 있다. 어차피 수도 성도를 버린 상태에서 순수한 한족의 땅도 아닌 남중이나, 다른 나라 오나라로 건너가 봐야한들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으므로.

이런 초주의 의견에 "지금 등애는 멀리 있지 않고, 아마 위나라는 우리들의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라며 항복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라 단언한 이들도 있었지만 사람들 가운데 초주의 말의 이치를 바꿀 자가 없었다. 연의에서는 강도 높은 영향력있는 유심의 반론이 존재한다지만 사실상 그냥 대책없이 끝까지 싸우다 죽자는 의견으로 현실성 있는 대책이 아니었던지라 반론이라 할 수 없다. 게다가 초주의 항복관은 단순히 패배주의적이지 않았으며, 그는 협상을 통해 유선의 안위와 몸값을 받아낼 것을 중요하게 보았다. 성도 치안도 안정되었다. 종회가 항장 강유와 손잡고 난을 일으켜 1년 만에 난장판이 되긴 했지만 이것은 등애의 잘못이 아니다. 진수는 '유선이 근심이 없고, 한나라 백성들이 의지할 곳을 얻은 것은 초주의 계책을 썼기 때문이다'고 스승이 옳았다고 평했다.

한편 제갈량과의 관계에 있어서 초주는 조정에서 딴지를 거는 역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는 제갈량의 북벌에 대해 반대한 적은 없으며, 제갈량이 죽자 그의 빈소로 가장 먼저 달려간 사람이 초주였다.[14] 이로 보건대 현실주의적인 애국자라고 봐야 할 것이다. 거기에 통념과는 달리 강유의 북벌중단을 주장했던 당시에도 '일단 한고조는 포기해도 주문왕은 될 수 있다, 문왕의 고사를 따르자'고 해서, 서촉의 기본적인 노선인 한실부흥과 천하통일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가 사치와 향락에 빠진 유선을 질책할 때도 '선제의 뜻은 천하를 통일하는 것이나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진실로 향락을 다할 때가 아닙니다. 단지 선제께서 펴시던 일만을 받들어 시행하십시오'라고 해서 촉의 체제를 인정하고 촉의 천하 통일을 긍정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는 이 당시만 해도 초주가 서촉 체제의 옹호자였으며 그가 등애가 성도 근처에 와서 항복을 권할 때까지 대외적으로는 서촉의 이데올로기인 한실부흥에 충실히 따르는 학자임을 보여준다. 당장 그가 항복을 꺼낸 시점도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하자는 것이 아니라 강유의 답중 삽질로 한중이 넘어간 것은 물론 제갈첨이 전사하고 면죽관이 떨어지진데다가 강유가 검각에 고립된 게 명백한 시점이었다.


4.2. 부정적 평가[편집]


단순히 기록이 적은 것과 한 일이 없는 건 명백하게 다르다. 예를 들어 촉나라 인물 중에 오의오반은 제대로 된 열전이 없지만, 그들이 거쳐간 직책과 황실과의 관계 그리고 다른 기록에 간혈적으로 남아있는 전공으로 인하여 그들이 촉나라 군부의 주요 인사들의 한축이었음이 드러난다. 그러나 정사에서 초주의 열전은 "두주두허맹내윤이초극전"에 포함되어 있는데, 여기 기록된 인물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재야학자와 명사 및 호족 등으로 촉한의 조정에서 주로 학문에 관련되는 관직을 맡고 학식으로 유명하거나, 또는 논객에 속하는 인사들이다. 더불어 그에게 할애된 지면도 짧다.

수신지 등 당대의 속설을 취합한 소설류와 정사에 따르면 초주는 평소부터 되지도 않은 헛소리를 내뱉고 다닌 것으로 묘사된다. 초주가 참위설을 믿으며 부정적인 비판을 하였던 것은 확실하다. 재밌는 부분은 초주가 이런 참위설을 주장할 때 자신의 이론의 근거로 두경을 내세웠다는 것인데, 실제로 두경은 촉한 정계에서 존경받은 인사였음에도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것을 꺼리고 세상일에 참여하지 않았었다. 하루는 갑자기 초주가 '예전에 주징군이 말했던 당도고가 무슨 뜻이냐'라고 두경에게 물었는데, 두경이 예전에 삼국이 서기 이전에 나왔었던 당도고 참언을 설명해 주면서 '한나라 다음에 올 것은 위나라와 조씨라는 것이 아마 하늘의 뜻일 것이오'라고 초주에게 해석해 주었다. 원래 당도고 참언은 아직 후한이 망하기 전에 그 다음으로 이를 나라가 무엇이냐는 참언으로 이미 후한이 조씨의 위에 선양함으로써 예전에 이루어진 참언이었다. 게다가 두경이 이런 말을 했다는 얘기는 초주의 주장 말고는 찾아볼 수 없다.

초주는 오래전에 유행했던 이런 참언을 바탕으로 촉한의 군주들의 휘를 가지고 촉이 위에게 나라를 넘겨준다는 식으로 독자적인 해석을 발전시켰고, 촉한이 망하고 나서는 자신이 했던 말을 가지고 '두경이 했던 말을 추론하여 말하였을 뿐 실제로 내가 독자적으로 도달한 바는 없다'라고 두경의 권위를 빌려고 했다. 초주의 권위나 명성이 그저 재야에서 존경받는 학자 수준에 불과했기에, 예전에 나돌던 참언이나 저명한 학자의 견해를 빌릴 뿐, 국가의 기간 정책인 북벌론을 뒤엎을 정도는 되지 못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는 '시대에 맞는 재능이 없어 다른 이들에게 존중받지 못했다'는 양희전의 내용과도 일맥상통한다. 그 외에도 뭐 큰 나무의 작은 가지가 부러졌으니 어쩌고 저쩌고 같은 말도 했는데, 정확하게는 황호가 권력을 휘두르던 경요 5년(262)에 궁중의 큰 나무가 부러지자 초주가 이 일을 매우 우려하였으며 무어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많아지고 커져 약속한 날이 되었다. 다른 사람에게 넘겨줄 때가 되었으니 어떻게 다시 오르겠는가?'라고 기둥에 썼다는 것이다. 이 말의 진짜 의미는 '조(曹)는 백성이 많다는 뜻이고 위(魏)는 크다는 뜻이다. 많고 크다면 천하사람들은 당연히 모여들게 된다. 완전히 갖추어 다른 사람을 주어야한다면 어떻게 다시 제위에 오르는 자가 있겠는가?' 촉이 멸한 후 모두 초주의 말을 증거로 삼았다. 즉 촉이 망하고 나서야 초주의 발언을 사람들이 촉이 망하는 증거로서 듣게되었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이길 수 없는 것이며 이제 대세가 넘어갔다. 작은 나라는 인재가 적으니 어찌 큰 나라를 이기겠느냐 운운하는 말이다. 이와 같은 비유는 고전들에서 취한 비유이다.

또 <촉서> <상총전>에 주석으로 첨부된 <양양기>에도 기록되길, 그는 상총의 동생 상충을 비롯해 주변에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예전에 초주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제 유비의 휘(諱)는 비(備)이고 그 뜻은 "준비하다, 갖추다(具)"의 뜻입니다. 후주 유선의 휘는 선(禪)이고, 그 뜻은 주다, 수여하다(授)의 뜻입니다. 이 둘을 합하면 유씨는 "다 갖춘 다음에 다른 사람에게 넘겨준다."는 뜻입니다. 지금 중무군(中撫軍) 사마염(司馬炎)의 이름은 염(炎)이고, 유비의 촉나라는 염흥(炎興: 263-264) 연간에 그 끝을 만났는데, 그 진귀한 옥구슬이 성도에서 나왔으므로, 상국(相國)의 부(府)에서 보관하였는데, 이것은 곧 하늘의 뜻입니다.[15] 이것은 바로 두경전에서 두경의 얘기를 듣고 추론해서 자기가 독자적으로 내세워 했던 말과 같은 소리이니 주변에 이딴 얘기를 주절주절 떠들고 다녔다는 건 사서에 교차검증이 된다. 촉한이 이런 말을 해도 웬만하면 처벌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다른 나라 같았으면 진작에 처형감이다."#[16]

또 초주의 항복론에 제대로 반박한 사람이 없었다지만 초주가 이런 얘기를 꺼내기 전에는 아예 오나라에 의지하자거나 남중으로 가서 다시 방비하자는 얘기만 나왔을 뿐, 항복 얘기는 촉한의 신하들 사이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초주전엔 또, 다른 신하들 중 초주를 이길 논리를 가진 사람이 없다고 했으나 초주의 의견에 찬성한 신하도 없었다. 여기에 유선이 여전히 남쪽으로 들어가는 것을 결정짓지 못하고 주저하자 초주가 재차 항복 권유 상소를 올린다. 즉, 제갈첨마저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촉나라 조정에서 항복파가 우위가 아니었고, 촉한의 신하들은 위나라가 항복을 받지 않을 거라 생각했으며 오로지 초주만 혼자 항복하자고 하는 상황이었다. 위에서 설명했지만 초주가 구국론으로 5년 전 북벌을 반대할 때 촉한 사람들이 주의 깊게 보지 않았다는 걸 생각해보자. 한나라의 정통을 이었다고 자처하고 한실 부흥을 외친 제갈량이 세상을 떠난 지 30여 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도 뭇 백성들의 추앙을 받아 길거리에서 너도나도 사당을 짓고, 마침 국가적으로도 공식 사당이 지어져서 그의 제사를 지내던 시절이다. 비록 북벌에 대한 논의가 이전보다 미지근해졌다고 하나 촉한의 신하들 입장에선 북벌 포기와 위나라에 대한 항복을 바로 떠올릴 정도는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 최종 결정권은 유선에게 있었고 유선은 다른 신하들의 논의 대신 초주의 건의를 따랐을 뿐이다.

거기에 제갈첨이 면죽관에서 무너졌다고 해도 방어할 수 있는 여력이 아직 남아있다고 보는 의견도 상당히 많아졌다. 우선 당장 중장비를 빼고 음평 샛길을 넘어온 데다가 제갈첨과의 전투에서 한번 패한 적까지 있던 등애군이 과연 성도 공성전을 제대로 치를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제갈첨의 군대가 패했다는 근거로 이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는데 당장 촉한의 중신 출신이자 초주의 제자인 진수, 이밀과도 친했던 촉군태수 왕숭조차도 '강유가 처현의 도로로 (낙현에 가까운) 동광한군 오성현으로 왔는데 설사 등애가 가볍게 전진하였다라도, 지름길을 통해 성도에 이를 수 있었을 것이고 지치고 고립된 등애를 치고 종회를 막았다면 강유의 역량은 종회를 충분히 넘어서니 방어할 수 있었다. 적이 이르지 못했는데도 강유가 함락되었는데 아깝도다!'라고 탄식했을 정도고[17] 이회의 조카 이구황권의 아들 황숭 같은 인사가 제갈첨의 최후 저항군에 참여했으며 후일에도 강유가 촉한을 부흥시키지 못한 것을 촉 사람들이 두고두고 안타까워했다는 점을 고려해 봐도 당시 촉한 인사들의 여론이 무조건 항복으로 기운 것도 아니었다.

거기에 동맹국인 손오의 원군도 오고 있었고 촉군의 정예인 강유군도 황제의 명으로 항복할 때 분함을 못 이겨 바위에다 칼을 내려쳤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전의를 상실한 상태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유선이 위에서 쳐들어 왔을 때 건녕에서 성도로 가겠다는 곽익의 요청을 성도는 방비가 튼튼하니 보낼 필요 없다고 거절한 순간부터 이건 그냥 싸울 여력 없어서 항복한 게 아니라 지레 겁 먹고 항복했을 뿐 반격의 기회가 있다는 반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건 당대의 왕숭, 서진의 원준, 동진의 손착, 손성 등이 유선과 초주의 대처를 보고 지적한 사항이기도 하다. 밑에서도 서술하겠지만 아예 원준은 유선이 단 며칠만 버텼어도 위군은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비록 제갈첨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을 긁어모아 면죽을 방어하다 패전한 것이므로 성도에 병력은 적었겠지만 그래도 치안 유지나 황궁 경비를 위한 기본적인 금군은 동원할 수 있었을 것이고 당장 급하게 민병대를 모집할 수도 있었다. 결정적으로 등애군은 보급은 꿈도 꾸지 못해서 모든 물자를 현지 조달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므로 그냥 청야전술만 써도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어차피 뒤도 없으니 민심은 무시한다 쳐도, 때는 11월 한 겨울이라 곡식을 수확하는 시기가 아니라서 약탈을 해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초주의 제자들이나 그들과 친했던 사람들, 다른 익주민들도 정작 촉한의 멸망 자체에 대해서 초주만큼 적극적으로 항복에 동의했는지는 의문일 수밖에 없다. 당장 촉한이 멸망할 때 제갈첨을 따라나선 이회의 조카 이구나 황권의 아들 황숭은 모두 익주 출신이었고 강유의 최측근으로 한중의 황금성을 끝까지 방어한 유은 역시 익주 출신이었다. 위에서 초주의 조장을 받은 유선을 비판한 왕숭도 그렇고 초주의 제자였던 두진의 경우에도 성도가 함락될 때 촉군 태수에게 '저들은 옛 사람(촉한 출신)을 쓰지 않고 새 사람들을 쓸 것'이라며 낙향을 권유하고 본인도 관직을 사양하고 물러났는데 이는 두진 역시 촉한이 망하면 촉한 출신 사람들이 기득권에서 밀려서 중히 쓰이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다는 뜻이다. 또 다른 제자인 이밀 역시 등애가 효성으로 유명한 그를 불렀는데도 조모를 더 생각한다는 식으로 부름을 회피했다. 당대 식견있는 자[18]들은 촉한을 점령한 등애의 뻐기는 듯한 태도를 비웃었고 강유를 따르던 촉한의 군사들은 싸우지도 않고 항복한 것에 분노하는 등 전체적으로 촉한 멸망 직후 익주의 분위기는 위나라에 대해서 부정적인 기류가 생각보다 강했다는 점을 보면 더욱 그렇다.

유비와 제갈량은 익주민과 호족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고 회유하여 그들의 기득권을 어느 정도 보장해주고 인심을 얻으려 했고 촉한 멸망 당시는 이미 유비가 입촉하여 이런 정책을 핀지 50여 년의 세월이 흐른 후였다. 또 촉한의 명재상들인 사영들의 통치가 워낙 뛰어났기에 백성들은 그들의 정치를 그리워 했으며 이 때문에 초주의 제자들인 문립이나 나헌 역시 익주민들의 인심을 얻기 위해 서진정권에 이들의 후손을 등용할 것을 주장했던 것이다. 촉군 출신이자 서진 치하에서 촉군태수까지 하고 초주계열과 친했던 익주 성도 출신 왕숭이 내놓고 유선과 초주의 처사를 비판하고 강유의 재능을 높게 봐 강유라면 유선이 항복하지 않았을 때 막았을 것이다라고 한 점이나 백여년 후에도 촉의 장로들이나 촉인들이 강유를 안타까워 한 것만 봐도 당시 '촉한' 이라는 나라가 익주의 사대부나 백성들에게 어떤 위상이었는지가 명백하다. 그 나헌조차도 촉한이 망하고 나선 병력을 이끌고 촉한 영내로 이동하여 잠시 주둔하는 모습이 보이는데 이는 곽익이 유선의 안위를 걱정한 것과 비슷하다고 볼 여지가 있다. 그 와중에도 이름높은 정경 같은 인사의 경우 문립과 친했지만 문립이 늙은 데다가 명예를 바라지 않는다면서 추천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촉한 출신 가운데서도 서진에 출사하지 않으려고 했던 인사들이 있었다는 증좌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화양국지에는 촉한이 망하고나서 '유비 세력이 익주를 다스린지 50여년이 흘렀다'라고 굳이 적었는데 말이 50여 년이지 거의 반세기 동안 유비 세력의 이념적 영향이 촉한에 있었다고 한다면 당시 익주 주류 세력들도 어느 정도는 그 이념에 감화가 되었다고 봐야 한다. 즉 촉한이 멸망할 당시엔 익주 세력이 촉한의 존속이 곧 자신들의 이권과 밀접하게 연관되었다고 보았기에 촉한이 망할 때 이런 반응들이 나왔던 것이다. 소위 '북벌반대론'조차도 생각하면 가장 비관적인 성격이 강했던 초주조차도 공식적인 입장인 '구국론'에선 대놓고 항복하자는 말을 못하고 '힘을 길러 후일 주문왕의 고사를 본받자'라고 언젠가는 내실을 다져 북벌을 하자 쪽이지 대놓고 국가 정체성을 부정하는짓은 하지 못했다. 사적인 자리에서나 실컷 떠들었을 뿐. 이걸 가지고 초주는 촉한이 망한 이후 어용학자로서 진나라 성립 같은 사건도 참위설을 통해 내세웠다.

기실 실제로 촉한의 인재가 등용된 것도 초주의 항복론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도대란 후 예전 촉한 고위인사들이 대거 이탈하고 264년 나헌의 승전 이후 나헌의 옛 촉한 지역에서의 입지가 높아져서였다. 실제로 진수가 초주를 띄워준 것과 달리 초주가 이후 중앙에 올라갔지만 향후를 받고 촉으로 돌아온 것 빼곤 이후에 뭘 한 게 없는 반면 나헌의 승전 이후엔 문립이 제음태수에서 중앙으로 올라가게 되었고 이후 문립과 나헌 등의 천거로 촉한의 인사들이 중앙에 진출했다. 초주가 항복을 위해 내세운 당위나 그로 인해 초주 본인이 얻은 이익을 감안하면 그 의도가 매우 불순하다고밖엔 할 말이 없다. 초주의 제자들이자 자하, 자공에 비유된 진수나 나헌은 진지 사후 황호 일파가 득세하면서 좌천된 인물들인데 초주는 과거 진지와 함께 구국론을 지으며 중앙 정계와 결탁했다. 이후 진지가 죽고 황호가 득세하며 자신의 제자들이 정계에서 밀려나고 황호 일파에 의해 나라꼴이 엉망이 되자, 후일을 기약하면서 위나라가 촉한을 칠 때 자신의 제자들이 위나라에 등용될 수 있도록 일부러 이런 참언들을 꾸며낸 게 아니냐는 것이다.

현실에 교묘히 타협해 권력에 영합하는 성격은 초주의 성인론에서도 잘 나타난다. 다른 학자들의 성인론이 강한 의지와 뛰어난 재능으로 시대를 주도하고 천하를 안정시키는 인물상이라면 초주의 성인론은 현실타협적인 인물상으로 '성인은 운명을 알고 자기 견해를 고집하지 않는다'라는 것인데 초주가 이런식으로 성인을 논할 때는 등애가 성도 근처로 나와서 시위하고 있었을 때다.'초주의 성인론=항복합시다.' 가 되는 것(...)# 사실 이런 시세와 권력에 따라 '영합'하려는 태도는 이미 황제의 극진한 총애를 받는 진지와 영합해 구국론을 지은 것에서도 드러난다. 촉한 체제에 부정적인 도참을 주장하는 행태를 보이던 사람이 결국 나라를 다스리는 황제의 권력에 영합하고 결탁해 공식적으로 촉한 체제의 존속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구국론을 작성한 것이니까. 그래서인지 초주는 강유를 비판했지만, 진지와 결탁해 나라의 힘을 내부에서 갉아먹는 황호는 촉한이 망할 때까지 공식적으로든 사적으로든 비판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탁했던 진지가 죽고 뒤를 이은 황호에 의해 애제자들이 좌천되는 등의 불이익을 당하자 그는 황호를 비판하고 나라의 안녕을 위하는 게 아니라 항복을 주장하는 쪽으로 다시 태도를 바꾼다.

여기서 위에서 언급한 원준, 손착과 손성의 평가를 보자.

이제 나라가 일거에 촉을 멸하니 정벌의 공이 이처럼 쾌속한 적은 아직 없었다. 바야흐로 등애가 1만 명으로 강유(江由)의 위험한 곳으로 들어갈 때 종회는 20만 군사로 검각에서 머물며 진격하지 못하고 삼군(三軍)의 군사들은 이미 굶주리고 있었으니 등애가 비록 전승하여 장수를 이겼으나 만일 유선이 며칠만에 항복하지 않았다면 곧 두 장수의 군(軍)은 돌아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공업(功業)을 세우기가 이와 같이 어렵도다. - 원준


초주가 후주에게 위나라에게 항복하자고 권한 것이 옳은 일인가? 자신이 천자가 되어 항복을 청하는 것이 얼마나 깊은 치욕인가! 무릇 사직을 위해서 죽으면 죽는 거고 사직을 위해서 망하면 망하는 거지 선군은 위나라의 찬탈을 바로잡고자 같은 하늘을 이지 않겠다 하였는데 그 아버지에게 잘못을 미루고 머리를 조아려 원수를 섬기니[19]

가히 구차하게 살아남았다고 할 만하다. 어찌 올바름에 처하는 도리를 크게 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 손착


춘추의 대의에 나라의 임금은 사직을 위해 죽고 경대부는 직위를 위해 죽는다고 했는데 하물며 천자라고 칭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모욕을 받을 수 있겠는가! 초주는 말하길 만승의 군주가 구차하게 생명을 훔쳐 죽음을 면하고 예법을 잃지만 이득을 구하길 바랐으며 미미한 영예를 기대하길 요구했으니 미혹된 것이다. 또한 일의 시세로부터 보자면 도리에 있어서도 다하지 못함이 있다.

무엇 때문인가? 유선이 비록 무능한 임금이기는 하나 실로 걸왕이나 주왕 같은 가혹함이 없고 전투에서 비록 누차 패배하였으나 국토가 완전히 함락당한 것은 아니다. 설령 군신이 굳게 지켜 성을 배후에 두고 결사의 일전을 치르지 못한다 하더라도 스스로 퇴각하여 동부에 진주하면서 이후를 도모해볼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당시에 나헌이 중병으로 백제성에 거했으며 곽익이 강졸로 야랑에 진주하였다. 촉의 영토가 험난하고 산수가 격절됐으며 산은 가파르고 물은 격렬하여 보병들이 건널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만약 배들을 모두 취하여 강주를 보전하면서 남중의 병사들을 징집하고 동오에 군대를 요청하면 강유,[20]

요화 5장이 자연히 구름처럼 몰릴 것이고 오나라의 군대가 명을 받들어 번개같이 달려오면 어찌 몸을 맡길 만한 곳이 없어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위나라의 군대가 오는 것은 온 나라를 들어 움직이는 것이라 쫓고 싶어도 배가 없고 머무르고 싶어도 군대를 오래 주둔시키면 여러 가지 걱정할 만한 일이 벌어지게 된다. 또한 굽히고 펴는 데에는 기회가 있고 정세는 번갈아가며 일어나는 것이니 서서히 떨쳐 일어나길 원하는 백성들[21]로 인해 교만하고 나태한 병졸을 공격하는 것은 바로 월왕(구천)이 합려를 공격한 이유요 전단이 기겁을 꺾은 이유인데 어찌 총총히 급하게도 스스로 포로를 자처하여 견고한 벽을 적군에게 내리고 돌을 쪼개는 것 같은 지극한 원한[22]을 남겼단 말인가?

갈생이 말하길 「사업이 잘 되지 않는 것은 그럴 수도 있으니 그만둔다고 쳐도 어찌 능히 다른 사람의 아래에 있을 수 있겠는가!」비장하구나 그 말이여, 가히 겁 많은 사람의 뜻을 세울 수 있다. 옛날의 연, 제, 형, 월의 패배를 보면 혹은 국가가 복멸하고 임금이 죽거나 혹은 물고기가 나무에 걸려 있고 새가 땅바닥에 굴을 파고 숨는 것 같은 상황이었으나 끝내 공을 세우고 일을 해결해 사직을 광복시켰으니 어찌 하늘의 도움이라고만 할 수 있겠는가. 또한 사람의 모략 때문이기도 하다. 만약 구차하게 살아남고자 하는 계획을 품고 초주의 말을 받아 들였다면 어찌 나라의 기초를 능히 세우고 아름다운 명예를 얻을 수 있겠는가? 유선은 이미 혼암한 임금이고 초주는 실로 열악한 신하인데 신포서(申包胥),[23]

전단, 범려, 대부 종과 비교한다면 또한 차이가 크지 않겠는가! - 손성


한편 배송지는 두주두허맹래윤이초극전 말미에 진수가 초주를 칭송하는 장면에 다음과 같은 평을 붙여 넣었다.

장번은 초주가 진술한 위나라에 항복하자는 계책이 평소에 유선의 나약하고 잔혹하지 않는 성격을 헤아렸으므로 실행될 수 있었다고 여겼다. 만약 제멋대로 성내는 사람을 만났다면 비록 다른 방법이 없다 하더라도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을 긍지로 여기고 항복하는 것을 치욕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고 혹 분노를 드러내 함부로 사람을 죽여 한 순간의 위엄을 세우고 잠시 동안 자신의 뜻을 유쾌하게 하는 자였다면 이는 또한 멸문의 재앙이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유선이 유약한 위인이었기에 망정이지 잔혹하고 성질 더러운 군주였으면 진작에 초주의 일족을 멸했을 거라는 시크한 평가다. 초주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는 옛날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던 듯한데, 고려사를 보면 거란소손녕이 침입했을 때, 이에 대한 마땅한 대응방법을 두고 조정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그런데 이때 서희가 할지론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반대했고, 당시 전민관어사 이지백이 서희의 주장을 거들면서 그 옛날 초주가 유선에게 권해서 나라를 위나라에 바쳐 항복해서 웃음거리가 된 거 모르나며 반박했을 정도다. 비록 고려사가 편찬된 것은 삼국지연의가 나온 이후인 조선시대이지만, 삼국지연의가 들어온 것은 선조 대이므로 고려사가 편찬된 것은 그보다 전인 데다가 해당 표현이 원 사료에 없는 것을 고려사를 편찬하면서 임의로 첨가한 것이라고 볼 근거도 없다. 삼국지연의보다 먼저 나온 자치통감을 보더라도 초주의 이미지가 당시 사람들에게 부정적으로 보였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고려사에 실린 이지백의 반박은 다음과 같다.

(전략)옛사람의 시에 ‘어리고 몽매한 놈이 천 리 강산을 경솔히 하니, 한촉(漢蜀)의 문무백관이 초주(焦周)를 원망하였다’라고 일렀는바, 이것은 초주가 촉(蜀)나라 대신으로서, 후주(後主)에게 권고하여 국토를 위(魏)나라에 바치고, 천고의 웃음거리로 후세에 전해지게된 것을 말한 것입니다. 古人有詩云, ‘千里山河輕孺子, 兩朝冠劒恨 譙周 .’ 盖謂 譙周 爲蜀大臣, 勸後主納土於魏, 爲千古所笑也(후략) - <고려사열전> 서희 #[24]


조선시대에도 초주는 전형적인 항복론자로 보였던 듯하다. 다음은 홍대용의 담헌서 사론 평가.

초주(譙周)는 두 번이나 임금에게 항복하라 권하고 세 임금에게 몸을 더럽혔으니, 족히 논할 만한 인물이 못된다. 그가 오(吳) 나라로 도망쳐서 남쪽에 들어간 계책은 진실로 잘못이다. 임금이 사직(社稷)을 위해 죽는 것은 천지의 대의(大義)가 아니겠는가?


이황의 적통을 이은 현종~숙종시대 학자 이현일은 자신의 문집 갈암집에서 담헌보다 더욱 신랄하게 초주의 충성은 환관의 충성이나 다름없다는 평가를 내렸다.

오늘날 논자들은 혹 “국가가 위급할 때를 당하여 신하 된 자는 감히 ‘임금은 사직과 함께 죽어야 한다.’라는 의리를 가지고 그 임금에게 죽음으로써 면려해서는 안 되고 응당 임금이 하는 바에 따라야 한다.” 하니, 참으로 이 말대로라면 유심(劉諶)과 육수부(陸秀夫)는 의당 만고의 죄인이 되어야 할 것이요 반드시 초주(譙周)가 항복하는 전(牋)을 짓고 손적(孫覿)이 항복하는 표(表)를 지은 것처럼 해야만 하늘의 뜻에 순응하고 임금에게 충성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는 그야말로 고식적인 인(仁)이요 아녀자나 내시의 충성인데도 주장하는 이들은 거리낌 없이 말하고 듣는 자들은 그렇다고 여기니, 이 어찌 이른바 사설(邪說)의 해가 홍수나 맹수의 화보다 더 심하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조선 말기 문신 이유원은 자신의 저서 임하필기에서 노골적으로 초주를 두고 소인이라며 촉한의 영웅들이 일찍 세상을 뜨고 초주같은 인간이나 남았다며 세상의 도리를 한탄하는 글귀를 남기기도 했다. [25]

군자와 소인 중에 누가 요절하는지 장수하는지를 보면 세도(世道)가 비색(否塞)한지 통태(通泰)한지를 점칠 수 있다. 제갈공명(諸葛孔明)은 54세로 그쳤고, 법효직(法孝直)은 겨우 45세를 살았으며, 방사원(龐士元)은 가까스로 36세를 살았다. 나이 70을 넘긴 자는 글을 받들고 가서 항복을 빌었던 초주(譙周)였을 뿐이니, 하늘이 과연 한(漢)나라의 덕에 싫증을 낸 것인가.


중국의 선비들이나 조선의 선비들이나 초주와 유선을 강하게 비판한것은 '춘추의 대의로서 군주보다 대의명분으로서 이루어진 사직이 더 중요하다'는 인식 때문이다. 군주는 사직을 대표하는 자이며 '대의명분으로서 세워진 공동체'로서 사직의 보존이 군주의 안위보다 더 우선된다는 것이다. 이현일이 송소제와 운명을 함께한 육수부의 예를 들었듯이 군주는 사직을 책임지는 자로서 마땅히 '임금이 사직,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은 천지의 대의'라고 과거 사람들은 생각했던 것이다. 송나라가 망할때 원나라 승상 발라(孛羅)가 "사군(嗣君)을 버리고서 두 왕[26]을 세운 것이 충신인가?"라고 묻자 문천상이 "덕우황제(송공제)는 나의 임금이지만, 불행히도 나라를 잃었으니, 그때를 당하여서는 사직이 중요하고 임금이 가볍다."라고 말해 발라가 말을 다하지 못한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5. 미디어 믹스[편집]



5.1.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편집]


파일:譙周.jpg
삼국지 11

파일:external/san.nobuwiki.org/0382.jpg
삼국지 12, 13, 14

전형적인 정치형 문관으로 나오는데 삼국지 2편과 삼국지 3편을 제외하고는 꾸준히 등장하고 있는 중이다.

초주 본인의 리즈 시절은 삼국지 5 때로, 지력이 무려 86인 데다가 점술을 특수 능력으로 가지고 있다. 점술 매니아라면 제갈량, 허정과 더불어 유비군 점술 3콤보를 전쟁에서 활용할 수 있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4/무력 5/지력 66/정치력 73. 구국론 정치 보정을 +2를 받아 실질적인 정치력은 75. 병법으로는 매도 하나 뿐이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4/무력 9/지력 65/정치력 72/매력 54에 특기는 천문, 항변, 명사. 총 3개다. 천문 특기 덕에 천변, 풍변을 사용할 수 있지만 통솔력이 4인 초주를 전투에 데리고 나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외 특이사항으론 아이템으로 구국론(지력+1)을 보유하고 있어서 실질적인 지력은 66인 것 정도.

삼국지 11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3/무력 3/지력 66/정치력 71/매력 50에 특기는 없어 활용도는 평범한 문관이다.

삼국지 12에서는 일러스트가 천문학에 능통하다는 평가에 따라 천문 도구를 왼손에 들고 오른손을 위로 올리면서 하늘을 보고 있는 모습으로 나왔다. 능력치는 통무지정 순으로 16/3/67/71이다.

삼국지 13에서 능력치는 전작과 같다. 특기는 농업 2, 설파 1로 전수특기는 농업이다. 전법은 기속약화라 잉여해 보일지도 모르나 위나라군은 청주병+호표기+서량병 조합이라 후반기 시나리오에서 나름 쓸만하다.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3, 무력 3, 지력 65, 정치 71, 매력 52로 전작과 달리 통솔력이 13, 지력이 2 하락했다. 개성은 점술, 학자, 소심, 주의는 명리, 정책은 태학 Lv 3, 진형은 안행, 전법은 없고 친애무장은 두경, 진수, 혐오무장은 강유, 제갈량이다.


5.2. 영걸전 시리즈[편집]


파일:The Legend of Cao Cao Qiao Zhou.png

삼국지 조조전 Online에서는 본래 초주의 초상화가 있었고 강유전 스토리에서 등장할 예정이었으나, 강유전에서 등장하지 못하고 초상화는 유비전에서 독우의 초상화로 쓰였다.


5.3.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편집]


파일:전략초주.png

제갈량의 북벌을 만류하는 역할로 등장.


5.4. 삼국전투기[편집]


변덕규로 나온다. 처음 등장한 전투외편 5-1편의 타이틀 컷을 장식하기도 했다. 소개컷에는 외모부터 유니크한 인물로 소개했고 동시에 이 사람을 단순히 매국노로 단정짓기는 좀 그렇다고 서술했다.

전투외편 5편에서 처음 등장. 무도회장에 가려는 유선에게 또 어딜 나가냐고 타박하는 모습으로 처음 등장했다. 다만 타이틀 컷에서는 캐릭터의 키가 너무 커서 하필이면 정확히 목 위에서 짤린지라 변덕규로 패러디된 이 인물이 진짜 초주가 맞았는지는 나중 가서야 밝혀졌다(...)

전투외편 7편에서는 북벌에 실패하고 돌아온 강유에게 화살은 신중하게 날려야지 무턱대고 날린다고 되냐며 꼽주는 장면으로 1컷 등장했다.

검각 전투 편에서는 등애가 면죽까지 뚫고 성도 코앞까지 온 상황에서 유선이 대책을 요구하자 다른 대신들이 남만으로 도망가자, 오로 도망가자 제의하는 와중 거기에 반대하고 대신 등애에게, 즉 위나라에 투항할 것을 제의했다. 그리고 유선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등애에게 투항했고, 서촉은 멸망했다.

[1] 다만 초주가 죽기 1년 전인 269년에 자신은 칠십을 넘겼다라고 말했으므로 190년대 후반 생으로 추정된다.[2] 참고로 이 인물은 한자는 기재되어 있으나, 그 한자의 음과 뜻이 알려져 있지 않아 본명을 부를 수 없다. 해당 항목을 참조하면 된다.[3] 赤眉: 반란집단인 적미군이다.[4] 둘 다 공자의 제자로 효성이 지극했다.[5] 樂官: 음악을 담당하는 관리다.[6] 다만 양희는 초주를 높게 평가했고 식견있는 자들이 이 때문에 양희를 존경하여 이를 중시했다고 한다.[7] 광록대부는 관질이 비(比) 2천석으로 구경(卿)인 광록훈 아래의 벼슬이다. 대부는 통상의 사무는 없고 오로지 자문에만 응답하는 직책이다. 한마디로 고위직은 맞는데 실제 하는 일은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 초주의 제자들이 유선정권 내에서 중용받지 못하기도 했었다.[8] 밑에서도 얘기하겠으나 곽익의 증원 요청을 유선이 성도 방비엔 문제가 없다고 씹었다(...). 하다못해 제갈첨 격파 이후 뒤늦게나마 곽익을 부를 생각조차 하지도 않았다.[9] 즉 초주전의 음평(陰平)은 그냥 평(平)이라는 말이다.[10] 삼국지집해에 따르면 정사 삼국지 초주전에서 등애가 음평(陰平)에 들어올 때부터 백성들이 동요한 것은 잘못 쓰여진 것으로 음평에서 '음'자를 빼서 등애군이 '평지(平)'에 들어오자 백성들이 동요한것이라 적어야 한다고 썼다. 하작이 말하길, 황숭이 말했다. "신속하게 가서 험지를 점거하여, 평지 진입을 저지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작이 말하길) 후인들이 음(陰)자를 잘못 더한 것이다.[9][11] 南中, 익주(益州)의 남부 지역이다.[12] 그래서인지 삼 10의 계략 특기인 천문을 가지고 있다.[13] 한때 습착치의 날조로 제갈량이 죽을 때까지 반란이 없었다는 말이 넷상으로 퍼져있었을 때도 있었지만 남중은 제갈량 생전에는 물론 사후에도 몇번이고 반란이 일어났다. 장억 같이 현지인들과 관계가 좋았던 경우도 있었지만 상총의 죽음과 장익과의 충돌 등. 계속된 반란과 분쟁으로 남중 도독들은 군수물자 충당하려다 고생했으니 나라 꼴이 엉망이었던 촉 말기 즈음에 와서는 초주의 말대로 도주조차 못할 만큼 민심이 나빠졌다고 볼 수 있다.[14] 당시 유선은 제갈량이 죽은 곳으로 가지 못하는 조서를 내렸다.[15] 성신이라는 옥구슬은 '성'이라고 나라 이름을 지은 공손술 때 만들어진 것이다. 한마디로 짜 맞추기.[16] 유비 시절까지만 해도 저런 소릴 내뱉었다간 사형당했을 것이다. 유비는 기반이 쌓이자 정통성을 다지는 데 주력했는데, 유비와 신경전을 벌인 장유도 비슷한 발언을 했다가 숙청당한 것을 생각하면 초주 역시 곱게 놔두지는 않았을 것이다.[17] 여기서 알 수 있듯이 강유는 긍정론에서 말하듯 고립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을 위해 성도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18] 위나라에서 온 인원, 촉한의 사대부다.[19] 유선이 항복서신에서 '저는 선대의 유업을 탐하여 여러 해 동안 그럭저럭 처신하며 (문황제(조비)의) 큰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습니다.'라고 써낸 것을 뜻한다. 어차피 적군에게 항복하는 마당에 자신을 높여 쓸 수도 없는 노릇이긴 하지만 말이다.[20] 손성은 강유의 평가에서도 항복하여 절의를 못 지켰던 주제에 무슨 대단한 계책을 내느냐고 깠으나 이 글을 보면 애시당초 유선이 항복하지 않았다면 강유가 끝까지 근왕군으로서 싸웠을 것이라고 생각한 듯 하다. 사실 강유전에서 배송지가 손성의 평을 보고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충분히 촉을 부흥시킬수 있었다고 강유를 옹호하긴 하지만 말이다.[21] 초주가 '신도에 있던 광무제가 왕랑이 한단에서 황제를 참칭하자 장안으로 돌아가려고 하다가 이곳 백성들이 반란할 것을 염려하여 머물렀다'는 고사를 인용하면서 남중으로 들어가면 백성들이 반란할 것이라고 했는데 손성은 이에 반박한 것이다. 실제 광무제가 당시 그 지역에서 제대로 통치를 펼친 적이 없는 데 반해 이미 촉한의 백성들은 50여 년간 유씨 정권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또한 강유의 중앙군도 동광한군 오성현에 있으면서 성도를 지원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병사들은 유선의 항복 명령이 내려지자 분격하여 칼을 바위에 내려칠 정도로 결사항전의 의지가 충분하였다. 상황이 이런데도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킨다고 했으니 초주가 얼마나 촉한 정권을 우습게 보고 있었는지 드러난다. 실제로 후대에도 두고두고 촉지역의 백성들이 강유가 촉을 부흥시키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 했다는 손성의 증언만 봐도 논파되는 이야기다.[22] 유선의 항복칙서가 전하자 촉군이 분격하여 칼로 돌을 내리친 것을 뜻한다.[23] 초(楚)나라 소왕(昭王) 때의 대부(大夫). 초나라가 오(吳)나라 오자서의 침략을 받아 국가의 운명이 위태롭게 되자, 신포서가 진(秦)나라에 들어가 애공(哀公)에게 구원병을 요청하면서 7일 동안 먹지도 않고 울면서 초나라의 절박한 상황을 호소하여 이에 애공이 그의 정성에 감동하여 구원병을 보내어 초나라를 도와 안정시켰다.[24] 당말의 시인 나은(羅隱)이 제갈량이 주둔했던 주필역(籌筆驛)에 들러 쓴 시이다. 당대로부터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그런 분위기가 어느 정도는 남아 있었던 것이다.[25] 제갈량, 법정, 방통은 모두 로 부르는데 초주만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26] 공제가 항복하여 잡혀가자 송단종, 송소제을 세운 것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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