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초주 (문단 편집) == [[삼국지(정사)|정사]] == 어려서 가난했지만 학문에 힘써서 근처 주군에 그 명성이 높았다 한다. 초주는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동복 형과 함께 살았다. 성장한 이후에는 고서에 묻혀 학문에 정진했고, 집은 가난했지만 일찍이 가난한 집안 상황에 관한 질문을 한 적이 없었으며, 경전을 통독할 때는 혼연히 홀로 미소를 지으며 잠자는 일과 먹는 일을 잊었다. 육경(六經)을 정심하여 연구했는데, 특히 편지를 쓰는 일에 탁월했다. 그는 천문에 매우 밝았지만 마음을 두지 않았으며, 제자백가의 문장에도 관심이 없었으므로 전부 읽지 않았다. 그의 신장은 8척이나 되었고, 풍모는 소박하였으며, 성격은 진실되고 꾸미지 않았고, 명민한 두뇌의 소유자였다. [[유비]] 사후에 중용되어 학문이나 교육과 관련된 직책에 임명되었다. 상당한 영향력과 실적을 지닌 정치가, 익주 지방의 유력한 호족이라고는 볼 수 없고, 명사 또는 학자로서, 대체로 저술과 학술 그리고 교육 계열의 일에 종사한 관료라고 할 수 있다. 정사에서 드러나는 조정에서 한 일은 간언과 저술 정도로 그의 저서로는 촉본기가 있다. 그가 법훈과 오경론 그리고 고사고를 비롯한 100편의 저작을 남긴 것을 미루어 보아, 그는 상당한 학자이자 저술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맡은 직무나 학문에만 매달린 채, 당대의 시류나 정국을 외면했던 인물은 아니었다. 건흥(建興) 연간, 승상 [[제갈량]]은 익주목을 겸임하면서, 초주를 권학종사(勸學從事)로 임명했다. 촉기에서 따르면 초주가 처음 제갈량을 뵜을 때, 주위 사람들이 모두 그를 비웃었다. 법 집행 담당자는 비웃은 자들을 처벌해야 된다고 청했다. 제갈량이 말하길 "그만두시오 그만둬. 나도 못 참겠는데 다른 사람들은 오죽하겠소!" 진수는 풍모가 소박하다고는 했지만 그건 제자라서 그런 말을 한 것이고 실제로는 어지간히 못생겼었나 보다... 대장군 [[장완]]이 익주자사를 겸임할 때, 초주는 전학종사로 임명되어 주의 학자들을 총괄했다. 후주 유선이 태자를 세우자(238년), 초주를 복야로 임명했으며, 후에 가령으로 전임시켰다. [[유선(삼국지)|유선]]이 점차 향략에 빠지자, 상소를 올려 그를 질타했다. >옛날 [[왕망]] 정권이 무너지자, 호걸들이 동시에 일어나 주와 군을 차지하고 제왕의 옥새를 갖기를 원했었습니다. 이때 현명하고 재능있는 선비들은 돌아가 의탁할 만한 사람을 그리고 희망했는데, 반드시 그 세력의 넓고 좁음을 근거로 하지 않고 오직 덕의 얕음과 두터움만을 보았을 뿐입니다. 이 때문에 당시의 [[경시제|경시]] 및 대중을 갖고 있는 자들은 대부분 세력면에서는 이미 넓고 컸지만, 쾌락을 추구하고 욕망을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고, 착한 일을 함에 있어서는 게을렀으며, 유람하며 사냥하고 먹고 마시면서 백상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광무제|세조]]가 처음으로 하북에 진입했을 때, 풍이 등이 그에게 권유하기를 '응당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해야만 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세조는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쓴 자들을 재심하여 처리하는 데 노력했으며, 음식을 절약하고, 법률과 제도에 따라 행동하였으므로 북쪽의 주에서는 칭송의 노래를 부르고 감탄하였고, 명성은 사방 먼 곳까지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등우는 남양에서부터 그를 따랐고, 오한, 구순은 세조를 알지는 못했지만 멀리서 그의 덕행을 전해듣고 임기응변의 계책을 사용하여 어양과 상곡의 돌격 기병대를 들어 광아에서 세조를 맞이했습니다. > >이 밖에 세조의 덕망을 흠모한 자로는 비융, 경순, 유식의 무리로부터 병든 몸을 수레에 싣고 관을 지고 오거나 강보의 어린이를 등에 엎고 오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 >그러므로 약한 것으로 강한 것이 되었다고 할 수 있고, 왕랑을 멸망시키고 동마를 평정하고 적미[* 赤眉: 반란집단인 적미군이다.]를 무찔러 제왕의 대업을 이루었습니다. [[낙양]]에 도착한 후, 세조는 일찍이 잠깐 외출하려고 거마를 준비시켰는데, 요기가 간언하여 말하기를, '천하는 아직 안녕되지 못한 상태인데, 신은 폐하께서 자주 외출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세조는 즉시 수레를 돌렸습니다. > >외효를 정벌했을 때, 영천의 도적들이 봉기했습니다. 세조는 낙양으로 돌아와 단지 구순을 파견하여 가도록 했는데, 구순이 말하기를, '영천에서는 폐하께서 원정을 하였기 때문에 간사한 자들이 봉기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들은 폐하께서 돌아온 것을 아직 모르고 있으니, 때에 맞춰 항복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폐하께서 직접 그곳으로 가면, 영천의 도적들은 반드시 항복할 것입니다' 라고했습니다. 그래서 세조는 영천으로 갔고, 그 결과 구순의 말처럼 되었습니다. 때문에 긴급한 일이 아니면 잠시 외출하는 것조차 과감히 하지 않고, 긴급한 일에 이르러서는 자신의 안위도 생각지 않으려고 한 것입니다. > >옛날의 제왕들은 좋은 일을 하려는 것 또한 이와 같았습니다. 때문에 경전에서는 '백성들은 이유없이 돌아가지 않는다' 라고 했습니다. 진실로 그들은 덕행을 우선한 것입니다. 지금 한나라는 액운을 만나 천하가 셋으로 나뉘어졌으며, 영웅과 지혜로운 선비들이 현명한 군주를 그리워하고 바라는 때입니다. 폐하께서는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3년간의 상을 마쳤는데, 말을 할 때마다 눈물을 흘리는 등 증민([[증삼]]과 [[민자건]])[* 둘 다 [[공자]]의 제자로 효성이 지극했다.]이라도 폐하를 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 >현명한 사람을 존경하고 재능있는 자를 임용하여 그들로 하여금 힘을 다하도록 하는 점에서는 [[주나라]]의 성강([[주성왕]], [[주강왕]])을 능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국내는 한마음으로 협력하고, 나이 많은 자와 적은 자가 힘을 내니, 신이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신은 큰 소원을 억제할 방법이 없으니, 그것은 폐하께서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는 일을 널리 하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무거운 수레를 끄는 자는 큰 힘을 내지 않는 것을 걱정할 것이고, 커다란 곤란을 제거하는 자는 널리 좋은 수단을 강구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할 것입니다. 그리고 [[종묘]]를 이어 섬기는 자는 헛되이 복을 구하지 않고, 백성들을 솔선하여 하늘을 존경해야만합니다. 호수나 숲에서 즐기시고, 어떤 때는 빈번하게 출동하시니, 신은 어리석고 고집스러워 사사로이 마음이 편할 수 없었습니다. 무릇 걱정이나 책임을 몸에 지고 있는 사람은 향락을 다할 틈이 없습니다. 선제의 뜻은 천하를 통일하는 것이나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진실로 향락을 다할 때가 아닙니다. 원컨대 악관[* 樂官: 음악을 담당하는 관리다.]을 줄이시고 후궁이 증착하여 만든 관을 감소하고, 단지 선제께서 펴시던 일만을 받들어 시행하고, 아래로는 자손들을 위해 절검을 보이십시오. 후에 중산대부에 임명되었지만, 여전히 태자를 모셨다. [[비의]] 이후 [[강유]]의 북벌로 인해 피폐해지자, '구국론'이라는 논문을 지어 지속되는 전쟁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제갈량]]의 공식 후계자였던 비의 생전에는 강유의 병력을 1만 정도로 제한하여 무리한 병력 소모를 막는 등 적절한 제어를 했지만 비의가 죽은 뒤 강유의 북벌은 성과도 있었으나 단곡 전투 등의 큰 패배를 겪어, 이에 촉의 백성들이 전쟁에 염증을 느껴 지쳤고 강유가 입은 피해를 원망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초주는 당시 상서령 진지와 형세의 이로움과 해로움에 대해 논의하고 조정에서 물러나 글을 써서 그것을 구국론(仇國論)이라고 했다. >인여국은 약소하고 조건국은 강대하지만 함께 천하를 다투어 구적이 되었습니다. 인여국에 고현경이라 하는 자가 있었는데 복우자에게 묻기를 '지금 국가의 대사는 아직 안정되지 않았으므로 조정의 윗사람과 아랫사람들이 내심 걱정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일에서 약한 것으로써 강한 것을 이길 수 있었던 사람은 어떤 방법을 이용했습니까?' 라고 했다. 복우자가 말하기를, '나는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대국의 입장에 있으면서 걱정이 없는 자는 항상 대부분 오만하고, 약소국의 입장에 있으면서 걱정이 있는 자는 항상 착한 행동을 사모한다고 합니다. 대부분 오만하면 동란을 낳게 되고, 착한 행동을 사모하면 천하를 태평스럽게 하게 되는데, 백성들을 양육하여 적은 수를 갖고 많은 수를 취했고, [[구천]]은 백성들을 긍휼히 여겨 약소국으로써 강대국을 이겼습니다. 이것이 그 방법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고현경은 '과거 강대한 [[항우]]와 약소한 한이 서로 다투어 싸웠으므로 하루라도 편안히 쉬는 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항우는 한나라와 맹약하여 홍구를 경계로 삼아 각기 돌아가 백성을 쉬도록 하려고 했습니다. > >그때 [[장량(전한)|장량]]은 백성들의 마음이 이미 정해졌다면 형세를 바꾸는 것은 어렵다고 주장하고 군대를 이끌고 항우를 추격하여 끝내는 항우를 타도했습니다. 어찌 문왕의 일을 따를 필요가 있겠습니까? 조건국에는 마침 환란이 있으니, 나는 그 틈을 타서 그 나라의 변방 지역을 함락시키고 그 환란이 가중되어 나라를 소멸시키기를 기다릴 것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복우자가 말했습니다. '은(殷), 주(周)의 교체기에는 왕후는 대대로 존경되었고, 군신 관계는 오래도록 공고했으며, 백성들은 군주의 통치에 습관이 되어 있었는데, 뿌리가 깊은 것은 뽑기 어렵고, 공고함에 의지한 것은 옮기기 어렵습니다. 이 시대에 있어서는 비록 한고조일지라도 어떻게 칼을 쥐고 말에 채찍질을 하여 천하를 취할 수 있었겠습니까? 진(秦)나라가 봉후를 폐지하고 군수를 설치한 후, 백성들은 진나라의 노역으로 지치고, 천하의 토지는 붕괴되는 듯했으며, 어떤 때는 해마다 군주를 바꾸고, 어떤 때는 달(月)마다 공을 바꾸었으므로 새나 짐승조차도 놀라 누구를 따라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호걸들이 일제히 다투며, 호랑이나 이리가 확득물을 찢어 나누듯이 영토를 분열하였는데, 신속하게 공격한 자가 가장 많이 얻었고, 행동이 느린 자는 병탄되었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와 조건국은 모두 새 군주에게 나라를 인도했고 시대는 바뀌어 진나라 말기 같은 혼란한 시대가 아니라 실로 육국이 동시에 할거하는 형세가 있습니다. > >때문에 [[주문왕|문왕]]은 될 수 있지만, [[한고조]]는 되기 어렵습니다. 대체로 백성들이 피로하다면 소란의 징조가 생기고, 위가 오만하고 아래가 포학하면 와해의 형세가 일어날 것입니다. 속담에 말하기를, '화살을 여러 번 쏴서 적을 맞히기를 바라는 것은 신중하게 살피고 쏘는 것만 못하다'라고 했습니다. 이 때문에 총명한 사람은 작은 이익 때문에 눈을 옮기지 않고, 주관적으로 추측하여 계획을 바꾸지 않으며, 시기가 가능해진 연후에 행동하고 시운이 부합된 이후에 일어납니다. 과거 [[탕왕]], [[주무왕|무왕]]의 군대가 두 번 싸우지 않고 이겼던 것은 진실로 백성들의 노고를 신중하게 보고 시기를 신중히 살폈기 때문입니다. 만일 무력을 다하여 몇 번이고 정벌하여 토지가 붕괴되는 형세가 생기고 불행히 어려움을 만나게 된다면, 비록 총명한 사람이라도 다른 방법을 강구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을 종횡으로 기이한 계책을 내어 틈도 없이 군대를 출동시켜 파도를 뚫고 쉐가 가는 길을 끊고, 계곡을 지나고 산을 넘어 배와 노에 의지하지 않고 나루터를 건너간다면 나는 어리석은 사람이므로 실제로 도달하지 못할 것입니다. >---- >구국론 구국론은 초주 같은 [[익주]] 출신의 의견을 반영한다는 의견이 있지만 사실 이 시점에선 외부 출신, 익주 출신을 가리지 않고 강유의 북벌을 비판하였다. 당장 이 구국론 자체가 외부 출신이자 제갈량의 후계자 비의의 뒤를 이은 [[진지(삼국지)|진지]]의 협조하에 지어진 논설이다. 서술한 바와 같이 구국론을 저술한 초주 외에도 제갈량과 같이 일했던 [[동궐]]이나 제갈량의 아들인 [[제갈첨]] 등 제갈량의 뒤를 잇는 정계인물들은 물론 [[요화]], [[장익(삼국지)|장익]] 같은 일선 장군 등, 당시 촉의 지각있던 인재들은 대부분 강유의 북벌을 비판하였다. 한 가지 특기할 부분이 있다면 [[화양국지]]에서 구국론을 '사람들이 살펴보려 함이 없었다(人莫察焉).'라고 적은 대목이다. 당대의 촉한 내정의 1인자인 진지의 협조를 받아 지은 논문이었는데도 왜 사람들의 호응이 없었는지는 의문이지만, [[양희]]전에는 그 당시 사람들이 초주를 논하기를 초주는 시대에 맞는 재능을 갖추지 못하여 주변에서 그를 존중해주는 사람이 적었다고[* 다만 양희는 초주를 높게 평가했고 식견있는 자들이 이 때문에 양희를 존경하여 이를 중시했다고 한다.] 직설적으로 적고 있는 것을 보아 촉한 시절 초주는 정치가보다 학자였고 그가 학자였던 만큼 이론을 세우고 과거의 일에 오늘 일을 비추어 보는 것에 밝아 익주 외부 출신들만 아니라 익주 사람들조차 그가 현실적이지 못하고 정책을 논하는데 재능이 없다는 평가 및 반응을 보였을 가능성이 있다. 거기다가 아무리 강유의 북벌을 비판한다고 해도 당시 촉한 사람들이 "한적불양립, 왕업불편안"이라는 한실부흥의 목표로 하는 촉한 건국의 이데올로기를 두고 한고조가 되기 어렵다며 이를 뒤로 미루자는 말을 외면했다는 말도 된다. 초주전에 따르면 광록대부[* 광록대부는 관질이 비(比) 2천석으로 구경(卿)인 광록훈 아래의 벼슬이다. 대부는 통상의 사무는 없고 오로지 자문에만 응답하는 직책이다. 한마디로 고위직은 맞는데 실제 하는 일은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 초주의 제자들이 유선정권 내에서 중용받지 못하기도 했었다.] 시절 구경(九卿) 다음가는 지위가 됐다. 초주는 비록 정사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유아한 품행으로 존경을 받았고, 때때로 중대한 문제를 자문하러 오면 항상 경전에 근거하여 대답을 했다. 그리고 후진 중에서 지적 관심이 강한 자들은 또한 그에게 의심나는 문제를 자문했다고 한다. 이런 재야에서의 존경과는 달리 막상 촉한 정계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은 약소했다. 이런 상황에서 초주가 은근히 따돌림을 받았고 이에 불만을 품었을 가능성은 있다. 참고로 초주의 촉한에서 최종직책이 바로 이 광록대부였다. 263년 겨울에 위의 [[등애]]가 강유관을 점령하고 막힘없는 기세로 진군했다. 그런데 촉나라, 특히 군주 유선은 위군이 금방 들어오지 않을거라 여겨 아예 방비를 않고 있었다.[* 밑에서도 얘기하겠으나 [[곽익]]의 증원 요청을 유선이 성도 방비엔 문제가 없다고 씹었다(...). 하다못해 제갈첨 격파 이후 뒤늦게나마 곽익을 부를 생각조차 하지도 않았다.] 한편 [[제갈첨]]의 군대가 패배한 후 촉한인들은 뜻하지 않게 위나라 군대가 도달하니 성을 지키는 데 조절과 통제를 못하였고 등애가 이미 평지로 들어왔다는 소문을 듣고 (그때부터) 민심이 동요했다.([[자치통감]]) 촉한의 조정에서는 등애가 이미 평지로(平)[* 삼국지집해에 따르면 정사 삼국지 초주전에서 등애가 음평(陰平)에 들어올 때부터 백성들이 동요한 것은 잘못 쓰여진 것으로 음평에서 '음'자를 빼서 등애군이 '평지(平)'에 들어오자 백성들이 동요한것이라 적어야 한다고 썼다. 하작이 말하길, 황숭이 말했다. "신속하게 가서 험지를 점거하여, 평지 진입을 저지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작이 말하길) 후인들이 음(陰)자를 잘못 더한 것이다.[* 즉 초주전의 음평(陰平)은 그냥 평(平)이라는 말이다.]]으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자, 유선은 신하들을 모아 상의했지만, 누구도 좋은 계책을 내지 못했다. 어떤 사람은 촉은 본래 오와 동맹국이었으므로 오나라로 도주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어떤 사람은 남중[* 南中, 익주(益州)의 남부 지역이다.]의 일곱 군이 험준하고 두절되어 있어 스스로 방어하기 쉬우므로 남쪽으로 도망 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초주는 이때 직책이 광록대부였는데 조정에서 오로지 혼자 항복론을 주장했다. 남쪽으로 가봐야 반란뿐이고 오나라에 의지해봐야 나중에 오나라가 망하면 두번 항복하는 꼴이 된다며 '걍 깔끔하게 여기서 항복합시다'라고 주장한 것인데, 위나라는 항복을 받지 않을 거라는 비난도 초주가 다시 동오가 항복하지 않았으니 촉을 대우해 줄 것이라고 반박해 초주의 이치를 당해낼 자가 없었다. 그러나 이 때 유선이 남쪽으로 들어가는 것을 결정짓지 못하고 주저했고 조정의 어떤 이들은 '폐하께서 위나라 군대가 깊숙이 침입하도록 하기 위해 남쪽으로 갈 계획을 갖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황제의 권위가 강한 촉한에서 황제의 의중이 남중으로 피신하는 계책을 쓰는 것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었고 초주가 주로 남중으로 피난하는 것을 반박하는 것으로 봐서 아무래도 당시 촉한 조정의 중론은 남중으로 가려는 것으로 흐르고 있었던 듯 하다. 이는 험요지가 많았던 남쪽으로 가면 지리에 밝지 못한 등애군이 유선과 촉한 조정을 제압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또 이 기록은 초주의 말을 듣고 주저하고 있다고 해도 유선 역시 처음엔 남쪽으로 들어갈 결정을 지을 생각이 있었다는 말도 된다. 이에 초주는 상소를 올려서 남중으로 가면 이민족을 소모시켜 심하면 반란의 위험이 있다는 주장에 덧붙여 여기에 일찍 항복하면 작위와 토지를 얻을 수 있고 만약 남쪽으로 가서 대세가 다하면 큰 화를 입을 것이며 성인은 운명을 알고 자기 견해를 고집하지 않는다고 유선을 유혹했다. 그래서 유선은 결국 수도에서 항전하거나 일단 다른 곳으로 후퇴하여 적의 보급선을 늘려 그들을 불리하게 하여 싸워볼 생각도 없이 조정의 의론도 무시한 채 오로지 초주의 건의만을 따라 항복하고야 만다. 이때 북지왕 [[유심]]이 유선이 초주의 계책을 쓰는 것을 분노하여 말했다. >"만약 계책과 힘이 다하여 화란과 실패가 임박했다면, 응당 부자(父子)와 군신(君臣)이 성을 등지고 한번 싸워 사직을 위해 함께 죽고 선제(先帝)를 만나는 것이 옳습니다." 이렇게 망하더라도 한 번 싸워는 보고 실패하면 '''다 같이 저승에서 유비를 만나자'''는 소리였으나 유선은 이미 항복할 생각이 만만해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마침내 옥새를 보냈다. 이날, 유심은 할아버지 소열제의 릉에서 곡하고는 먼저 처자식을 죽이고 그 뒤 자살하니 좌우에서 눈물을 흘리며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또 유선의 궁인들을 위나라 장수들에게 나누어주자 후궁 [[이소의]]가 '나는 이 치욕을 2번, 3번 감당할 수 없다'며 자결하였다. 이후 초주는 [[사마소]]에게 양성정후의 직위를 받았고 초주를 초빙했다. 초주는 출발하여 한중(漢中)에 도착했지만 병 때문에 가지 못했다. 265년 여름에 파군의 [[문립]]이 낙양으로부터 촉으로 돌아와서 초주를 방문했다.초주는 대화중에 서판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써서 문립에게 보여주었다. "전오(典午)는 갑자기 월유(月酉)에 죽는다." 전오(典午)란 '사마(司馬)'를 뜻하고 월유(月酉)는 '8월(月)'을 의미한다. 8월에 이르러 사마소는 과연 세상을 떠났다. 서진이 세워진 이후 낙양에 병든 몸을 이끌고 입시했다. 진 왕실이 제위에 오르자, 여러 차례 조서를 내려 초주를 빨리 입궐하도록 했다. 초주는 병든 몸을 수레에 싣고 267년 낙양에 도착했다. 초주가 질병으로 일어나지 못하자, 그의 집으로 가서 기도위로 임명했다. 초주는 자신이 공로가 없는데 봉토를 받았으므로 작위와 봉토를 돌려주려고 했지만,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69년에 [[진수(역사가)|진수]]는 일찍이 파서군의 중정(中正)을 맡고 있었는데, 인물을 평가하는 일을 마치고 휴가를 요청하여 집으로 돌아오면서 초주가 있는 곳으로 가서 이별을 했다. 초주가 진수에게 말했다. "옛날 [[공자]]는 72세로 [[유향]]과 [[양웅]]은 71세로 세상을 떠났네. 지금 나의 나이는 70세를 넘었네. 줄곧 공자의 유풍을 흠모하여 유양과 궤를 함께 할 수 있었네. 아마 다음해를 넘기지 못하고 반드시 영원히 떠나게 될 것이므로 다시는 서로 만나지 못할것이네." 진수는 초주가 미래의 일을 아는 기술이 있음을 의심했는데, 그는 공자 등의 말을 빌려 서술했을 뿐이었다. 초주는 태시 6년(270년) 가을에 산기상시로 임명되었지만, 질병이 심해 임명을 받지 못했고, 겨울이 되자 죽었다. 진양추에 실린 조서에 따르면 '[[사마염|짐]]이 심히 슬퍼하니 조복 한 구, 옷 한 벌, 금전 15만을 내린다.' 초주는 초희가 상언하는 것을 멈추게 했는데 초주가 임종에 이르러 초희에게 부탁하길 '오랫동안 병을 앓아 일찍이 조정에 나가 조회한 적이 없는데 만약 나라에서 은혜로 조복이나 옷가지 등을 내린다면 몸에 입히지 말라. 응당 구묘로 돌아갈 텐데 길이 험난하니 미리 가벼운 관을 준비하라. 빈렴이 끝나면 받은 것들을 위로 돌려보내도록 하라.'하니 조서를 내려 의복을 되돌리고 관목을 마련할 비용을 주었다. 익부기구전에 따르면 익주자사 동영(董榮)이 초주의 상을 주학에 그려놓고 종사 이통으로 하여금 송을 짓도록 하였는데 송에 이르길 "근신한 초후여! 고대 성현의 덕을 좋아하고 유학을 전술하며 도리를 보배처럼 여기고 진솔함을 품었네. 세속의 성쇠를 명찰하고 고아한 명성과 아름다운 행적이 시종 책에 적혀있네. 우리 후배들은 현자를 존경하여 찬예하지 않는 말이 없고 여러 전대의 철인을 따라잡아 그림을 그렸네. 아~! 앞으로 올 사람들이여 이 현저한 모범에 교훈을 얻기 바라네." 초주에겐 세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초희(譙熙), 초현(譙賢), 초동(譙同)이다. 어린 아들인 초동(譙同)은 초주의 학업을 매우 좋아하였으며, 또한 충의와 질박함을 행동의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석현의 현령으로 제수했는데, 동궁세마(東宮洗馬)로 승진시켜 불렀지만 취임하지 않았다. 손자로는 큰 아들 초희의 아들인 [[초수]]와, [[서진]]에서 재동내사를 지낸 초등(譙登)이 있다. 초주의 직계는 아니지만 같은 초씨 가문인 초헌지(譙献之)는 초수와는 같은 항렬이다. 선대와의 직접적인 관계 언급이 없는걸로 봐선 방계 후손으로 보이는데 성한정권에서 사공을 지냈고 이후 동진의 환온이 성한을 멸한 후에는 참좌가 되었다. 초헌지의 손자 초종(譙縱)은 어려서 신중하여 촉인들이 그를 사랑했다. 안서부참군이 되었고 일찍이 성도왕을 칭했다. 초종이 성도왕을 칭하면서 수립한 정권을 '후촉' 이라고도 부르는데 이후 초종은 훗날 남조 송나라의 무제가 되는 [[무제(유송)|유유]]를 토벌하겠다고 벼르다가 유유가 보낸 동진의 익주자사 주령석에게 패사한다. 그에 대해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전형적인 문사로 자기가 하고 싶은 학문하면서, 촉한에 충성했다. 실무직에 있어본 적은 한번도 없지만, 촉에 해를 끼친적도 없다. 그래서 정사에서의 비중은 비유하자면 공기였는데, 멸망 직전에 올린 간언이 연의 덕분에 굉장히 유명해져 오늘날까지 회자된다.''' [[진수(역사가)|진수]]는 초주에 대해 [[동중서]]의 규범을 지닌 일세의 [[선비]]라 평하고 있다. 그러나 진수가 초주의 제자인데, 진수가 개인적인 원한으로 인하여 [[제갈첨]]에 대해 악평을 썼다는 주장도 있으므로, 진수가 스승 초주를 치켜세웠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천문학이 어쩌고 저쩌고 하니 사람일이 어찌 저찌 또는 저 나무가 부러졌으니, 나랏일이 어찌 저찌 이런 논설을 펴는 걸 보면 동중서 계열의 학자가 맞긴 한 것 같다. 천문과 기타 학문에도 능해 [[사마소]]의 죽음을 예견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삼 10의 계략 특기인 천문을 가지고 있다.] 외모가 꽤나 웃기게 생겼었는지, 초주가 면접을 볼 때 [[등애|말을 자주 더듬어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웃느라 난리였다고 한다. 이에 대해 누군가 주의를 주자, 제갈량이 '나(고)도 웃긴데 어찌하겠는가?'(孤尙不能忍, 況左右乎)라며 반문하였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