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차두리 (문단 편집) === 플레이 스타일 === [youtube(kTMUCcYEWok)] 현역 시절 차두리하면 피지컬과[* 체력도 뛰어나 셔틀런을 박지성 못지 않게 잘 했다고 한다.] 몸싸움, 스피드가 가장 대표적인 특징이었다. 유럽과 한국에서 뛰는 동안 리그에서나 국가대표팀에서나 어떤 선수를 만나더라도 압도적인 몸싸움을 보여준 덕분에 [[터미네이터|차미네이터]], [[마이콘|차이콘]], [[트리케라톱스|두리케라톱스]], [[아이언맨|차이언맨]], [[울트라리스크|차두라리스크]], [[폭주기관차]], [[인간흉기]], [[인간]] [[수류탄]], [[광전사(스타크래프트 시리즈)|발업 질럿]], [[안드로이드|차드로이드]] 등의 수많은 별명이 따라다녔다. 그중에서도 현재는 역시 '''차미네이터'''란 별명이 가장 대표적으로 기억되고 있다. 차두리의 피지컬은 당시 국가대표팀 동료들도 치를 떨 정도였는데, 오죽하면 2002 월드컵 기간에 상대 선수와의 충돌 대비 훈련 도중 [[이영표]]가 차두리에게 부딪혀 부상을 입고 조별예선 2경기에 결장한 적도 있었고, 수비 연습을 같이 해주던 [[정해성]] 코치는 차두리와 충돌한 직후 [[갈비뼈]]가 부러졌다고 한다.(...) 이에 대해 히딩크는 차두리에게 오히려 잘했다며 윙크를 날렸다는데, 이 정도의 힘과 투지라면 외국의 거구들도 나가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출처: 히딩크 자서전 '마이 웨이' 229p.] [[박지성]], [[안정환]], [[이을용]]도 공통적으로 차두리랑은 '''부딪히는게 아니라 피해야 된다'''고 말한 바 있다.[[https://theqoo.net/index.php?mid=square&document_srl=2656467334|#]] 2023년 [[김민재]]도 차두리와 조우해 자기가 안된다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https://www.youtube.com/shorts/KHAW4Vlwqkg|#]] 실제 차두리는 아시아 축구 역사상 최고 수준의 [[http://i.imgur.com/E9jmmxq.gif|피지컬]]과[* 아시아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상위 1%에 들만한 피지컬이다. 당대 최고의 피지컬 플레이어였던 [[디디에 드록바]]와의 몸싸움에서도 밀리지 않았을 정도니 말 다했다. 링크된 움짤은 전설의 [[한일전]] 두리블.] [[http://i.imgur.com/87LCAGH.gif|무시무시한 스피드]], [[http://i.imgur.com/iYXUmXb.gif|가공할 순간돌파력]]을 갖춘 선수였다. [[2002 월드컵]] [[히딩크호]] 선수들 중 30m와 100m 모두 가장 빠른 속도로 주파했다고 한다. 측정된 기록으로는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2/08/29/2002082970125.html|30m 기록은 3.8초]],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7/17/2011071700321.html|100m 기록은 11.2초]][* 참고로 육상 [[100m 달리기]] 한국 기록이 2017년 6월 김국영이 기록한 10초 07이다. 또 당시 축구 국대 선수들은 (골키퍼 라인을 제외하면) 아무리 느려도 12초대는 주파했다고 한다. 즉, 당시 국대하려면 11~12초대는 나와야 된다는 것.]로, 그 외 50m와 125m도 1위였다고 한다.[* 여담으로 그 외 빨랐던 선수로는 이천수, 최태욱, 박지성 등이 있었다.] 당시 차두리의 최고 속도는 대략 36km/h 안팎으로 추정된다. 이런 단거리, 장거리 가리지 않는 뛰어난 스피드는 몸싸움과 결합해 차두리 특유의 '''직선적인 돌파력'''으로 나타났고, 특히 달리는 거리가 길 수 밖에 없는 윙백/풀백 시절 돋보이게 된다. 몸싸움 역시 비록 은퇴 직전이긴 했지만 독일 최강의 하드웨어로 손꼽히던 [[슈테판 에펜베르크]][* [[FC 바이에른 뮌헨]]를 챔피언스리그 우승으로 이끌고 구단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레전드 선수이다. [[1994 FIFA 월드컵 미국]] 독일전에서 [[fuck|법규]]를 시전하신 한성깔하는 인물이기도 하다.]가 리그 경기에서 차두리를 상대하다가 벌렁 나자빠질 정도였다. 그야말로 신체 능력은 가히 월드 클래스.[* 이 무지막지한 몸은 부친 [[차범근]]의 유전빨에 더해 차범근이 프로선수로 성공하고 본인이 어릴 적 못 먹은 [[고기]]를 아들은 실컷 먹여가며 만든 결과로 보인다. 여담으로 이러한 차범근의 피지컬은 차두리에게만 물려준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이는데, 차두리가 근육으로 압축해 놓은 몸이라면 누나인 [[차하나]]는 다 풀어 놓은 상태라는 목격담이 있다. 실제로 [[차하나]]가 차범근과 같이 찍은 결혼식 사진을 보면 키 179cm인 아버지와 큰 차이가 없다. [[http://www.bluewings.kr/files/old_upload/news/B0_1097279308.jpg|차하나 씨 결혼식 때 아버지와 찍은 사진]]. 해병대 출신 막내 세찌 또한 강력한 피지컬을 자랑한다. 덕분에 일부 네티즌들은 이 집안은 품종 유지(?)를 위해서라도 골격 좋은 배우자랑 만나 자손 많이 낳아야 한다는 드립도 친다.(...) 배성재 캐스터는 실제로 2010년대 초반 요르단 2차전 때 당시 차범근 해설 위원 보고 "얼마 전에 2030년 월드컵 주축이 될 유망주를 얻으셨죠?"라고 농담삼아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기본기가 떨어져서[* 차두리가 본격적으로 축구선수가 된 것은 [[중학생]] 때였으며, 후술되어 있지만 98년 월드컵 전까진 축구 선수가 아닌 스포츠 [[기자]]를 꿈꾸던 학생이었다. 2002년 당시 [[히딩크]]가 국대에 콜업한 것도 프로선수가 아닌 대학생 차두리를 뽑은거였다. 이렇게 차두리가 늦게 선수 생활을 시작해서 그런지 차범근도 차두리의 기본기를 봐주지 못한 것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한다.] 어느 순간 공과 따로 놀거나[* 국가대표 경기 도중에는 공보다 더 빨라서 차두리가 먼저 골라인 밖으로 나간 다음에 공이 골라인 밖으로 나간 적도 있었다. 덕분에 오죽하면 '30대가 된 뒤부터는 피지컬이 전성기보다 떨어져서 공이랑 같이 달려 전성기가 온 것'이라는 농담까지 생겼다.] 경기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해 위험한 장면을 연출하는 문제가 종종 있었다. 결국 이 문제 때문에 처음 포지션은 [[스트라이커]]였으나, 둔탁한 볼터치에 결정력이 좋지 않아서 [[윙 포워드]], [[윙어]]로 점점 내려가다 결국 2000년대 중후반 [[풀백]]/[[윙백]]으로 전향한다. [[풀백]]으로 말년인 2010년대 중반까지도 [[대기만성]]한걸 생각하면 좀 더 일찍 포메이션 전환하지 못한게 아쉬운 부분인데, 2002년 당시 히딩크 감독도 차두리에게 [[윙백]] 전향을 권유한 바 있기에 더 아쉬운 부분이다. 이땐 [[차범근|아버지]] 포지션에서 성공해야 된다는 생각도 있어서였는지 차두리가 정중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그러다 2006~07시즌 [[1.FSV 마인츠05]]에서 뛰면서 [[위르겐 클롭]] 감독의 권유로 수비수로 전향한 후 그의 진가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히딩크, 클롭 두 명장이 모두 풀백을 권유한거 보면 차두리 특징을 잘 캐치한 모양. 그리고 그들의 안목이 틀리지 않아 수비수로 전향한 뒤 차두리는 타고난 철벽같은 몸과 엄청난 순간 가속으로 주포지션인 [[라이트백]]뿐만 아니라 [[센터백]] 자리도 필요할 땐 가담하는 엄청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공격 능력이야 포변하기 전 공격수 능력이 있는데다 특히 압박이 덜한 후방, 그것도 측면에 위치하며 이전보다 상대편의 견제를 덜 받게 되었고, 윙어가 중앙으로 좁혀 들어오며 풀백이 측면 공격에 가담하는 전술이 대세가 되자 공격수 시절보다 안정적인 크로스와 드리블을 많이 보여줬다. 수비수가 되면서 오히려 공격력이 상승한 것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성인 무대에 데뷔하고 몇년이 지난 이후에야 포메이션을 변경한 탓에 수비 스킬은 부족할 수 밖에 없었고 이를 속도와 피지컬로 커버했다. 만약 이러한 포지션 변경을 선수 커리어 초기에 했다면 안정적인 수비와 적극적인 공격가담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은 선수 수준으로 성장했을지 모를 일이었지만, 역시 너무 늦은 나이가 문제.[* 사실 20대 중후반에 포지션을 변경해서 성공한 케이스가 아주 드물지는 않다. 차두리의 경우 나이 문제보다는 본인의 부족한 기본기 문제가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분데스리가를 그만두고 [[FC 서울]]로 이적해 [[K리그]] 무대를 밟으며 계속 좋은 활약을 보여주는 등 입지를 다지다가 2010년대 중반 은퇴 직전 올라탄 [[슈틸리케호]]에서 제대로 포텐이 터지게 되어 측면파괴자로서 그야말로 눈부신 활약을 하여 [[박수]] 칠 때 떠난다는 말을 제대로 증명하고 떠나게 되었다. 하드웨어가 워낙 좋다 보니 대표팀에 부임하는 감독들이 내외국인을 막론하고 차두리의 [[유혹]]에서 벗어나질 못했는데, 처음부터 수비수로 뛰었다면 송종국 부진 이후 2000년대 중후반 내내 대표팀의 고질병이었던 라이트백 문제는 진작 해결되었을 것이다.[* 레프트백은 [[이영표]]가 은퇴한 2011년부터 문제점으로 지적되었고, 그마저도 조광래가 [[김영권|수비 포지션 파괴]]를 하고 홍명보가 폼이 떨어진 윤석영만 기용해서 문제를 심화시킨 면이 더 컸다. 하지만 라이트백은 [[송종국]]의 전성기가 3년도 채 못가면서 2006년 독일 월드컵 이전부터 꾸준히 지적되어 온 문제였다. 폼 떨어진 송종국을 대체할 멤버가 필요했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아드보가트호에선 [[조원희]]를 꾸준히 시험했으나 공수밸런스 문제가 두드러져 월드컵에선 토고전에 송종국을 썼고 송종국의 폼이 너무 저조하자 전성기였던 김동진을 주전 레프트백, 이영표를 라이트백으로 쓰는 임시방편으로 떼웠다. 2007년 베어벡호에서 급부상한 [[오범석]]은 남아공 월드컵을 앞두고 점점 불안해져서 라이트백 포지션에 완전히 적응한 차두리가 주전이 되었다. [[최철순]], [[최효진]] 같은 선수들도 있긴 했지만 피지컬이 약해서 유럽, 아프리카 선수들에게 정면으로 맞서기는 힘들다는 평가를 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