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진종채 (문단 편집) == 생애 == 1923년 11월 21일 [[경상북도]] [[포항시|영일군]] [[기계면]](현 [[포항시]] [[북구(포항)|북구]] [[기계면]]) 인비리에서 아버지 진찬욱(陳燦旭, 1903 ~ 1986. 7. 9)[* 초명 진성진(陳成鎭). 1951년 기계면장을 역임했다.]과 어머니 [[경주 최씨]](1903 ~ 1977. 9. 23)[* 최자진(崔子鎭)의 딸이다.] 사이의 5남 1녀 중 장남으로 [[https://www.kyongbuk.co.kr/news/articleView.html?idxno=972503|태어났다]]. [[경북대학교/학부/사범대학|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다시 [[육군사관학교]]에 진학, 1949년 8기로 졸업해 [[대한민국 육군]] [[장교]]로 임관했다.[* 진종채를 군내 요직에 중용했던 [[박정희]]도 대구사범학교와 육사를 함께 졸업했다.] [[김종필]], [[김형욱]] 등 [[5.16 군사정변]]의 주역이 동기이며, 군 복무 중에 [[경남대학교]]를 졸업했다. [[서종철]], [[노재현]], [[윤필용]] 등과 함께 [[전두환]] 등 [[하나회]]의 주요 후원자로 꼽힌다.[* 윤필용 사건으로 중간에 숙청된 윤필용과 달리 진종채, 서종철, 노재현은 [[10.26 사건]] 때까지 군에 영향력을 행사해 영남 군벌 3인방으로 불렸다.] [[제3보병사단]] [[제23보병여단|제23보병연대장]], [[제8기동사단|제8보병사단장]], [[국군정보사령부|육군정보사령관]] 등을 맡다 [[1973년]] [[윤필용 사건]]으로 윤필용이 물러나자 [[수도방위사령부|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이때 하나회를 뿌리뽑으려는 [[강창성]] [[국군기무사령부/사령관|육군보안사령관]]을 견제하기 위해 [[박정희]]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에게 육군보안사령부가 [[휘발유]]를 불법으로 판매한다고 보고했다. 이로 인해 강창성은 3관구사령관으로 좌천됐다. [[1975년]] [[국군기무사령부/사령관|육군보안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이후 [[1977년]] 중장 진급과 동시에 육군보안사령부를 국군보안사령부로 확대 개편하였다. 그런데 [[1977년]] 대대장 월북 사건을 납북이라고 거짓 보고하였다가 박정희 대통령의 분노를 샀다. 그리고 [[중앙정보부]]에서 파견된 [[김기춘]] [[검사(법조인)|검사]]에 의해 국군보안사령부의 정보처가 폐지되는 등의 국군보안사령부 축소안이 실행되었다. 또한 본인이 권력지향형 인물이 아니어서 보안사 권력 확장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대대장 월북 거짓 보고 사건의 여파로 [[1979년]] [[제2작전사령관|제2야전군사령관]]으로 보직 이동했다. 보안사령관 후임자로 전두환을 적극 추천하였고, 갓 사단장[* 소장 진급은 1977년 대통령경호실 작전차장보 시절에 했으며, 1978년에 소장 2차 보직으로 [[요직|알짜보직]]인 [[제1보병사단]]장을 거쳤고 당시 [[땅굴/북한#s-3.3|제3땅굴]] 발견에 힘입어 1979년에 소장 3차 보직을 국군보안사령관으로 받아 [[영전]]한 것이다.]을 마친 전두환이 핵심 요직인 보안사령관에 임명되면서, 이 결정은 나비효과처럼 [[12.12 군사반란]]으로 이어지게 된다. [[10.26 사태]] 후 규정에 의거하여 보안사령관이 대통령 시해 합동수사본부장이 됨으로써 전두환의 권력 장악 시나리오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전두환의 후원자여서 그런지 12.12 군사 반란 이후 세 명의 야전군 사령관 중 유일하게 유임되었고[* 12.12 군사반란 당시 야전군 사령관은 [[김학원(군인)|김학원]] 제1야전군사령관(중장), 진종채 제2야전군사령관(대장), [[이건영]] 제3야전군사령관(중장)이다. 이 중 반란군에게 호의적이었던 진종채 제2야전군사령관을 제외한 제1, 3군사령관은 반란 이후 보직 해임되었다. 그리고 제1군사령관에는 반란군의 회유에 넘어갔던 [[윤성민]] 당시 육군참모차장이, 제3군사령관에는 반란군의 핵심 멤버였던 [[유학성]] 당시 국방부 군수차관보가 임명되었다.][* 당시 경질된 김학원 제1야전군사령관은 얼마 못 가 홧병으로 세상을 등졌다. 그리고 이건영 제3야전군사령관은 신군부 세력의 반대파 회유에 따라 한국마사회 회장으로 임명되어 10년간 재임하였다.] [[1980년]] [[대장(계급)|대장]]에 진급하였다. 제2야전군사령관 임기 중이던 [[1980년]] [[5월]], [[5.18 민주화운동]]의 계엄군의 지휘계통상에 있었지만 발포 명령 여부에 대해서는 부인했다. 그러나 2019년에 이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증언이 나오면서 발포 명령이 실제로 내려졌다는 주장이 더 큰 힘을 받게 되었다. 1980년 5월 20일 당시 상무대에서 통신병으로 근무하였던 박수철[* 당시 계급은 상병]은 발포 명령이 담겨 있었던 암호로 된 통신문을 받았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고 증언하였다. [[https://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aspx?news_id=NB11818543|출처]] > 폭도로 보이는 자들이 금일 20시 야음을 틈타 상무대를 습격하기로 돼 있는 바, 모든 장병들은 자기 구역에서 맞교대를 실시하고…(중략) 수상한 자가 접근할 시에는 복부 이하로 사격을 가하여 제압하라… 보낸 사람은 2군사령관 진종채 하지만 해당 문서가 직접적으로 발견되지는 않았다. [[1981년]] 대장으로 예편하였다. 예편 이후 진해화학(1987년 [[한일합섬]]에 인수) 사장을 맡은 것 외에는 다른 직책을 맡지는 않았다. [[1995년]] [[김영삼]] 정부의 역사 바로 세우기에 의해 [[12.12 군사반란]],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검찰 소환조사를 받고 고소되었으나 결국 [[불기소처분]] 되었다. 이때 첫째 사위인 [[조준웅]] 검사[* 2007년 삼성그룹 특별검사였다.]가 해당 수사팀에 속하였다가 장인이 관련되었다는 이유로 수사팀에서 제외되었다. 그후 1998년 3월 27일 [[서울특별시]]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하였다.[[https://www.hankyung.com/news/article/1998032800471|#]] 그의 유해는 1998년 3월 30일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1묘역에 안장되었다. [[분류:대한민국의 군인]][[분류:북구(포항) 출신 인물]][[분류:여양 진씨]][[분류:1923년 출생]][[분류:1998년 사망]][[분류:육군사관학교 출신]][[분류:경북대학교 출신/전신 학교]][[분류:경남대학교 출신]][[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분류:5.18 민주화운동/관련 인물 및 단체]]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