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증국번 (문단 편집) == 생애 == 1811년 11월 26일 호남성 장사부 상향현(湘鄕縣)[* 現 [[중화인민공화국]] [[후난성]] [[샹탄시]] 샹샹시(湘鄕市).]의 부농 집안에서 아버지 죽정공(竹亭公) 증육제(曾毓濟, 1790 ~ 1857)와 어머니 증강씨(曾江氏, 1785 ~ 1852) 사이에서 5남 4녀 중 장남, 둘째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머리가 너무 안 좋았다고 한다. 한 일화로, 밤을 새서 한 문장을 외우고 있었는데 도둑이 공부하던 증국번 때문에 숨어 있었다가 밤을 새도 한 문장을 외우지 못하는 증국번이 답답해서 뺨을 때리고 그런 머리로 공부하지 말라고 소리치고 나왔다. 그러나 증국번은 열심히 공부해 여러 단계를 통과하는 과거시험을 모두 통과하고 진사[* 조선의 진사와는 사회적 지위가 다르다. 조선에서 진사는 향시에 합격한 대과응시자격이 있는 사람을 의미하지만 명나라, 청나라 시대의 진사는 중국 전체에서 수십명 안에 드는 수재 중에 수재였다. 즉, 조선과 비교하자면 조선의 진사와 달리 한 단계 시험(회시)을 더 통과해서 임금 앞에서 최종 순위를 가리는 전시에 올라있는 급이라고 봐야한다. 또한 중국의 진사는 일개 성을 대표하는 급의 수재였으며 벼슬에 임용되지 않더라도 진사라는 신분 자체로 지방 행정에 관여할 수 있었다.]에 임용되었다. 조선의 과거도 어렵다고 정평이 나 있었지만, 청나라는 그보다 인구가 20배가 넘게 많기 때문에 대단한 학식이 없으면 이렇게 과거에 급제하기가 어려웠다. 이후 과거급제자의 경력코스이자 일종의 관립 학술기관인 한림원[* 조선으로 치면 [[집현전]]이나 [[규장각]] 정도의 위치이다.]에서 일하면서 자신의 학문을 좀 더 갈고 닦았다. 이때 성리학에 대한 여러편의 논문을 남겼는데, 이 글들은 학문적으로 상당히 가치가 있는 것들이다. 그리하여 후의 [[캉유웨이]]와 함께 공양학의 시조로 평가받고 있다. 이렇게 증국번은 학자로서도 무시못할 업적을 남겼다. 이후 예부 우시랑에 제수되었으나, 1849년 모친이 별세하자 3년상을 지내려 고향에 돌아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