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앙선 (문단 편집) == 개량 == 개통되기 전부터 제천역-풍기역 구간에 직류 3,000V로 전철화하는 계획이 있었고, 동시에 [[데로형 전기기관차]]를 투입할 계획이었다. 이것을 바탕으로 개통 초기인 1941년부터 착공하기 시작했지만 전철화를 얼마 앞둔 시점에 일제의 패망으로 해방되면서 공사가 중단됐다. [youtube(7vtSf5hwzsg)] 그러다가 [[1973년]] 6월에 [[청량리역]] - [[제천역]] 155.2㎞ 구간이 교류 25,000V 60㎐로 일찌감치 전철화됐다. 이는 대한민국 핵심 철도노선인 [[경부선]]이 수원역까지만 전철화되기 1년 전에 이미 전철화된 것으로, 여객보다 화물 운송이 중요하게 취급되는 중앙선의 특성상 강한 견인력을 가지고 있는 전기기관차를 투입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수도권 전철 1호선]] 차량인 [[초저항]] 전동차의 시운전이 중앙선에서 이뤄지기도 했는데, 청량리 - 양평(52.4㎞) 구간을 시운전했었다. 더불어 그 당시 주력 화물이 [[시멘트]]와 [[무연탄]]이었기에 중앙선은 물론이고 영동선, 이후 건설되는 태백선이 우선적으로 전철화, [[열차집중제어장치|CTC]]화가 이루어졌으며, 이들 구간에서는 전기기관차 두 대가 중련하고 벌크 시멘트를 40~50량씩 끌고 가는 차력쇼를 자주 볼 수 있다. 제아무리 경부선 컨테이너 열차라도 중련 기관차로 한꺼번에 40량씩 끌진 않는다. 이로 인해 중앙선 역들은 다른 곳에 비해 구내 선로가 무지막지하게 긴데, 승강장은 단 8량 기준으로 만들어진 모습을 볼 수 있다. 1960년대 후반에 선로용량 한계를 넘었다고 판단되는 구간에 대해 복선화 계획이 나왔다. 당시 폭증하는 화물수요에 대처하기 위해서라도 선로용량 확충과 전철화가 시급하다는 이야기가 나왔으며[*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611190032920400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6-11-19&officeId=00032&pageNo=4&printNo=6493&publishType=00020|「中央線複線化(중앙선복선화)」]], 경향신문, 1966-11-19][*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6122400099203002&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66-12-24&officeId=00009&pageNo=3&printNo=236&publishType=00020|「湖南(호남)·中央(중앙) 複線化(복선화)」]], 매일경제, 1966-12-24], 이 계획의 대상이 된 구간은 [[청량리역]] - [[덕소역]], [[구둔역]] - [[양동역|양동역]], [[제천역]] - [[도담역]] 이 세 구간으로[*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7081700329204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7-08-17&officeId=00032&pageNo=4&printNo=6722&publishType=00020|「百年大計(백년대계)의 靑写真(청사진)」]], 경향신문, 1967-08-17], 실제로 이 무렵 구둔역 - 양동역 구간은 공사를 시작했으나 얼마 못 가 예산 문제로 중지됐다. 향후 10년간 6145억이 필요하고, 철도는 별도로 640억의 예산이 필요한데 연간 120억에 불과한 건설부 예산을 어디서 무슨 수단으로 늘리며 외자는 어떻게 유치할 것인지에 대한 비판점이 있다고 이미 지적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구둔역과 매곡역 사이의 구 선로 구간에는 뚫다 만 터널과 비교적 넓은 복선 부지(구둔-매곡 구간) 등이 상당수 남아 있다.[* [[https://blog.naver.com/kgh19941061/10154016775|네이버 블로그]]] 본래는 공사하다 만 상태 그대로 남겨졌지만 인터넷 블로그에서 알려지고 한국철도공사 측에서 입구를 봉쇄했다. 그러나 철도보다 도로교통을 중시하던 박정희 정권의 정책으로 예산이 모자라 기존 역의 길이를 늘리거나 새로운 신호장을 여기저기 설치하여 열차가 교행할 수 있는 장소를 늘리는 방법으로 땜질 처리하는데 그쳤다. 몇몇 역에 보이는 승강장 길이에 비해 매우 긴 구내 선로와 [[동교신호장|동교역]], [[유교신호장|유교역]], [[금교신호장|금교역]], [[창교신호장|창교역]], [[연교신호장|연교역]]이 이때 생겼다. 하지만 이것도 임시방편에 불과한 조치였고, 세월이 흐르면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져서 복선화에 다시금 박차를 가하게 됐다.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일찍이 복선화가 점쳐지고 있었던 세 구간 중 구둔역 - 양동역 경우엔 예산 부족으로 도중에 중단됐지만 나머지의 경우, 1978년의 수도권 전철화 계획[*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78092700099201003&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78-09-27&officeId=00009&pageNo=1&printNo=3865&publishType=00020|「地下鐵(지하철) 3.4·5號線(호선) 85年(연)완공」]], 매일경제, 1978-09-27] 및 1989년『철도건설중장기계획』등으로 다시 이야기가 나오다가[*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9091600329214005&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89-09-16&officeId=00032&pageNo=14&printNo=13530&publishType=00020|「"체증없는 鐵馬(철마)"21세기 快走(쾌주)」]], 경향신문, 1989-09-16] 하술된 바와 같이 2010년대에 들어와서 차례차례 완공됐다. 1988년 12월에는 제천역~[[영주역]] 구간에 전철화가 되면서 중앙선 개통 초기부터 계획하던 제천 - 풍기 구간이 수십 년 늦게 전철화가 완성됐다.[* [[https://imnews.imbc.com/replay/1988/nwdesk/article/1817279_29513.html|「중앙선 철도 영주.단양간 전철 개통[백지연]」]], MBC, 1988-12-23] 개량 전 운행자료는 상당수가 남양주시 조안면에서 촬영된 자료로, 조안면이 [[전원일기]] 촬영지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 외 지역의 영상자료는 찾기 힘들거나 없다. 1990년대 후반부터 개량 필요성이 대두됐고, 기존 선로를 복선화, 전철화, [[직선화]]하는 대대적인 사업에 들어가게 된다. 사업 명칭에는 복선전철화만 포함되어 있으나 대부분 굴곡진 선로를 펴는 직선화 사업도 병행된다. 사실상 주요역 몇 개를 제외하고는 새롭게 선로를 까는 개념이다. 이로써 [[폐역]][* 이설하더라도 이름이 승계되는 역/신호장 제외]되는 역/신호장은 34개이다. 2021년 열차운행세칙에 따르면 청량리 ~ 망우 110㎞/h, 망우 ~ 덕소 150㎞/h, 덕소 ~ 서원주 최고 230㎞/h, 서원주 ~ 원주 170㎞/h, 원주 ~ 봉양 250㎞/h, 봉양 ~ 안동 150㎞/h로 정하고 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