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서성 (문단 편집) === [[한나라]]~[[위진남북조]] === 중서성의 기원은 궁중의 문서를 맡아보던 한나라의 비서성(秘書省)으로써 중서는 본래 [[삼국지/관직|황제 가까이에 있으면서 정책을 결정하는 내조(內朝)에 속하는 관부로 전국 민정을 총괄하는 정책의 실행관부인 상서와 함께 황제와 외조(外朝)]] 사이의 문서 출납을 관리했으나, [[광무제]] 이후 상서가 외조로 분리되어 좀 더 실질적인 업무를 맡게 됨으로써 중서는 내-외조의 연결을 독점하는 중핵이 되었다. 즉 [[십상시]]로 우리에게 익숙한, 후한 말 황제의 눈과 귀를 막은 [[환관]]의 전횡은, 그들 [[중상시]]들이 전통적으로 이 중서를 포함한 내조 전반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것. 한나라 때 중서는 사실 그 독자적으로 의미를 가지기 보다는 이런저런 환관 내조의 일부 관부에 불과했다. 환관 체제의 타파를 추구한다는 공통의 목표 아래 [[조조]] 이래 조씨와 [[호족]] 세력이 손을 잡음으로써 성립된 [[위(삼국시대)|조위]]에서는 '탁류'로 변질된 내조 권력의 원류 - 즉 환관과 외척을 정치 무대에서 배제시키는 것을 사실상의 국시로 삼고, 그들의 전유물이었던 내조 관직을 사인(=호족)에게 전면 개방하였는데 [[위세조]](조비) 때 비서성을 중서성으로 고쳐 [[상서성]]을 점점 대신하였으며 중서성의 장관으로 추밀에 관해서도 다루게 했다. 조위 때 내조가 본래의 폐쇄성(즉,사인 계급에 대한 배타성)을 상실하며 외조와 구분이 유명무실해지는 과정에서 과거 내조 기관에 가까운 폐쇄성을 유지한 '최후의 내조'로 남은 것이 이 시기 중서의 위치를 독보적으로 만든 것이다. [[위열조]](조예) 사후, '[[조방|삼]][[조모|소]][[조환|제]]'의 시대에 이르러 황제권의 약화와 동시에 중서는 그 존재감을 크게 상실하는데, 이후 결국 [[사마]]씨가 조씨로부터 황위를 찬탈해 세워진 [[서진]]에서 중서의 자리는 주류 대호족 세력에게 넘어가고 만다. 즉 정리해 보자면 환관의 전유물이었던 한대의 중서가 황제(조씨)의 측근/수족의 역할에 철저했던 위대의 중서를 거쳐 마침내 주류 대호족 계층이 진출, 장악한 서진의 중서로 완성된 셈인데 이러한 중서의 변화는 결국 한말 당고의 금 이래 호족 사대부 계층 전체의 비원, 즉 자신들이 가진 향촌 지배력에 걸맞은 중앙 정부 내에서의 발언권과 입지 확보라는 과제가, 조씨와의 팽팽한 연립 정권이었던 조위를 거쳐, 끝내 [[문벌귀족(중국)|문벌귀족]] 자신들의 계층에서 황제를 배출해 내고 만 서진대에 이르러 어떻게 실현되었는지 그 전개를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로 보인다. 한-위진남북조 체제 그 자체의 변화와, 그것이 가지는 역사 발전 단계에서의 의미/방향성을 해석할 수 있는 열쇠가 바로 이 중서의 변혁사라고 볼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