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홍제 (문단 편집) == 생애 == 1906년 5월 20일 [[경상남도]] [[함안군]] 대곡면 동촌리(현 함안군 군북면 동촌리) 신창마을의 천석꾼 집안[* 실제로는 2천석 정도였다. 참고로 쌀 1천석을 수확하기 위해선 농지가 적어도 20만평이 필요하다.]에서 아버지 조용돈(趙鏞惇)과 어머니 안부봉(安夫奉)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921년 4월 1일 군북공립보통학교가 개교하자 입학하였으나, 이듬해인 1922년 [[경기도]] [[경성부]]로 이주하여 [[중동고등학교|중동학교]] 초등과에 전학하여 과정을 반년 만에 수료하였다. 이어 [[광신방송예술고등학교|협성실업학교]](協成實業學校) 보통과에 입학하여 수료한 뒤 19세 때 [[중앙고등학교|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1926년 6월 [[6.10 만세 운동]] 당시 체조선생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465|조철호]](趙喆鎬)를 비롯해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7957|이선호]](李先鎬)·[[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3569|유면희]](柳冕熙)·[[이현상]]·[[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4356|박용규]](朴龍圭)·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4146|이동환]](李東煥) 등과 함께 동맹휴학을 주도했고, 직후에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이송된 뒤 [[서대문형무소]]에 [[http://db.history.go.kr/id/su_008_1926_06_19_1140|수감되었다]]. 이후 학교로부터 제적당했으므로, 중앙고 18회 앨범(1927년 3월 졸업)에 그의 사진이 없다. 1928년 [[일본]] 유학을 결심했으나 조선에서 고등보통학교 중퇴 학력이었기에 일본에서 보통학교를 다시 다녀야 했다. 이 때문에 선배들의 권유를 받고 간도 용정중학교의 졸업장과 성적증명서를 위조하여 와세다공업전문학교 기계과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기계과 수업에 통 흥미를 붙이지 못했던 그는 학적을 그대로 둔 채 니혼대학 야간전문부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하여 낮에는 기계과 수업을, 밤에는 정치경제학 수업을 들었다.[[https://books.google.co.kr/books?id=dON1DwAAQBAJ&pg=PT192&lpg=PT192&dq=%EC%A1%B0%ED%99%8D%EC%A0%9C+%ED%98%B8%EC%84%B8%EC%9D%B4%EB%8C%80%ED%95%99&source=bl&ots=HE7UZgk1aA&sig=ACfU3U06GOgQ6Tkc3gcYrdkr4e8DhRu7-Q&hl=ko&sa=X&ved=2ahUKEwjEy4CfqOzwAhWiHIgKHW_VAX0Q6AEwB3oECA0QAw#v=onepage&q=%EC%A1%B0%ED%99%8D%EC%A0%9C%20%ED%98%B8%EC%84%B8%EC%9D%B4%EB%8C%80%ED%95%99&f=false|#]] 방학 때 집으로 돌아온 그는 가짜 졸업장을 내고 편법으로 공부하는 것이 영 탐탁치 않았고, 같은 해 일본으로 돌아온 직후 가마쿠라중학교 4학년에 편입하여 이듬해 졸업하였다.[[https://books.google.co.kr/books?id=dON1DwAAQBAJ&pg=PT192&lpg=PT192&dq=%EC%A1%B0%ED%99%8D%EC%A0%9C+%ED%98%B8%EC%84%B8%EC%9D%B4%EB%8C%80%ED%95%99&source=bl&ots=HE7UZgk1aA&sig=ACfU3U06GOgQ6Tkc3gcYrdkr4e8DhRu7-Q&hl=ko&sa=X&ved=2ahUKEwjEy4CfqOzwAhWiHIgKHW_VAX0Q6AEwB3oECA0QAw#v=onepage&q=%EC%A1%B0%ED%99%8D%EC%A0%9C%20%ED%98%B8%EC%84%B8%EC%9D%B4%EB%8C%80%ED%95%99&f=false|#]] 그리고 [[호세이대학]] 독일경제학과에 입학하여 30세 되던 1935년에서야 졸업하였다. 집안이 알아주는 땅부잣집이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다. 그의 생가로 들어가는 덕촌리(신창리와 동네가 붙어 있다) 어귀에는 "1935년 유례없는 가뭄이 들었을 때 이 곳에 살던 조씨 부자가 쌀을 나눠주어 사람들이 연명하였다"라는 내용의 송덕비가 있는데 이 집안 것으로 보인다. [[호세이대학]] 졸업 후에는 귀국하여 1935년 3월 25일 [[동아일보사]] 함안지국 총무에 [[http://db.history.go.kr/id/npda_1935_04_15_x0008_0710|임명되었다]]. 1938년 6월 1일 마산세무서 소득조사위원에 [[http://db.history.go.kr/id/gb_1938_06_08_a34160_00230|임명되었고]], 1940년 4월 13일 군북금융조합장에 [[http://db.history.go.kr/id/npda_1940_04_19_x0007_1320|선출되었다]]. 1941년 3월 31일 마산세무서 소득조사위원으로 있던 중 [[http://db.history.go.kr/id/gb_1941_04_08_a42600_00290|大山洪濟]]([[오오야마]] 코사이)로 [[창씨개명]]했다. 1942년에 군북산업주식회사를 설립, 정미업을 운영하였다. 당시 [[남강]]변이 온통 늪지대인 것과 달리 군북면은 나름 이 일대에서 단위생산력이 높은 곡창이었고 철도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쌀을 사고파는 미전이 10군데나 있을 정도로 물동량이 많은 곳이기도 했다. 해방 후인 1948년에는 삼성상회의 [[이병철]]과 공동출자로[* 조홍제 측이 7, 이병철 측이 3의 비율이었다.] 삼성물산공사(현 [[삼성물산]])를 설립하여 부사장으로 취임하였다. 이후 [[CJ제일제당|제일제당]] 사장을 역임하면서 [[삼성|삼성그룹]]에 종사하다가 1962년 삼성그룹에서 독립, 효성물산주식회사를 세우고 경영하였다. 처음에는 제분업에 참여하였다가 1966년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 대전피혁 등을 인수하였다. 이후 섬유사업 등에도 진출하였다. 효성그룹 회장 이외에는 인재양성에 관심을 보여 배명중학교-[[배명고등학교]] 재단[[이사장]],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1976년에 재정난에 빠진 동양학원([[동양중학교]], [[동양고등학교]], [[동양미래대학교]])을 인수하여 당시 동양공업전문대학(현 동양미래대학교)의 첫 [[이사장]]을 역임하며 아낌없는 투자로 동양학원을 키웠다. 단, 학교의 운영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현재 동양학원 모든 학교의 교시인 積財千萬不如薄技在身 (몸에 지닌 작은 기술이 천만금의 재산보다 낫다.) 는 교육에 힘쓰며 그가 내세웠던 의지를 그대로 계승한 것이며, 마지막 남은 생에 동양공업전문대학의 졸업식을 참여하였다. 이러한 기여에 따라 2006년에 학교 내에 조홍제 전 이사장의 동상이 제막되었다. 1984년 1월 16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서울)|명륜동]]에서 그가 별세한 이후 장남 [[조석래]]가 효성그룹 회장이 되었고 차남 [[조양래]]는 [[한국앤컴퍼니]] 회장이 되었다. 3남인 [[조욱래]]는 대전피혁을 물려받았으나, 1997년 효성기계 부도 후 현재 DSDL 회장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