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홍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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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조홍제
(1966~1984)
제2대
조석래
(1984~2016)
제3대
조현준
(2016~ )



효성그룹 초대 회장
조홍제
趙洪濟


파일:조홍제.jpg

창씨명
오오야마 코사이(大山洪濟)[1]
아호
만우(晩愚)
본관
함안 조씨[2]
출생
1906년 5월 20일
경상남도 함안군 대곡면 동촌리
(현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동촌리 신창마을)[3]
사망
1984년 1월 16일 (향년 77세)
학력
군북공립보통학교 (전학[4])중동학교 (초등과 / 수료)
협성실업학교 (보통과 / 수료)
중앙고등보통학교 (4학년 / 중퇴)
용정중학교 (졸업[5])
와세다공업전문학교 (기계과 / 1학년 / 중퇴)
니혼대학 야간전문부 (정치경제학 / 1학년 / 중퇴)
가마쿠라중학교 (졸업[6])
호세이대학 (독일경제학 / 학사)
부모
아버지 조용돈, 어머니 안부봉
형제자매
남동생 조성제
배우자
하정옥
자녀
장녀 조명숙
차녀 조명률
장남 조석래
차남 조양래
삼남 조욱래

1. 개요
2. 생애
4. 기타



1. 개요[편집]


대한민국기업인으로서, 삼성물산효성그룹의 창업주이다.


2. 생애[편집]


1906년 5월 20일 경상남도 함안군 대곡면 동촌리(현 함안군 군북면 동촌리) 신창마을의 천석꾼 집안[7]에서 아버지 조용돈(趙鏞惇)과 어머니 안부봉(安夫奉)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921년 4월 1일 군북공립보통학교가 개교하자 입학하였으나, 이듬해인 1922년 경기도 경성부로 이주하여 중동학교 초등과에 전학하여 과정을 반년 만에 수료하였다. 이어 협성실업학교(協成實業學校) 보통과에 입학하여 수료한 뒤 19세 때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1926년 6월 6.10 만세 운동 당시 체조선생 조철호(趙喆鎬)를 비롯해 이선호(李先鎬)·유면희(柳冕熙)·이현상·박용규(朴龍圭)· 이동환(李東煥) 등과 함께 동맹휴학을 주도했고, 직후에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이송된 뒤 서대문형무소수감되었다. 이후 학교로부터 제적당했으므로, 중앙고 18회 앨범(1927년 3월 졸업)에 그의 사진이 없다.

1928년 일본 유학을 결심했으나 조선에서 고등보통학교 중퇴 학력이었기에 일본에서 보통학교를 다시 다녀야 했다. 이 때문에 선배들의 권유를 받고 간도 용정중학교의 졸업장과 성적증명서를 위조하여 와세다공업전문학교 기계과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기계과 수업에 통 흥미를 붙이지 못했던 그는 학적을 그대로 둔 채 니혼대학 야간전문부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하여 낮에는 기계과 수업을, 밤에는 정치경제학 수업을 들었다.#

방학 때 집으로 돌아온 그는 가짜 졸업장을 내고 편법으로 공부하는 것이 영 탐탁치 않았고, 같은 해 일본으로 돌아온 직후 가마쿠라중학교 4학년에 편입하여 이듬해 졸업하였다.# 그리고 호세이대학 독일경제학과에 입학하여 30세 되던 1935년에서야 졸업하였다. 집안이 알아주는 땅부잣집이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다. 그의 생가로 들어가는 덕촌리(신창리와 동네가 붙어 있다) 어귀에는 "1935년 유례없는 가뭄이 들었을 때 이 곳에 살던 조씨 부자가 쌀을 나눠주어 사람들이 연명하였다"라는 내용의 송덕비가 있는데 이 집안 것으로 보인다.

호세이대학 졸업 후에는 귀국하여 1935년 3월 25일 동아일보사 함안지국 총무에 임명되었다. 1938년 6월 1일 마산세무서 소득조사위원에 임명되었고, 1940년 4월 13일 군북금융조합장에 선출되었다. 1941년 3월 31일 마산세무서 소득조사위원으로 있던 중 大山洪濟(오오야마 코사이)로 창씨개명했다.

1942년에 군북산업주식회사를 설립, 정미업을 운영하였다. 당시 남강변이 온통 늪지대인 것과 달리 군북면은 나름 이 일대에서 단위생산력이 높은 곡창이었고 철도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쌀을 사고파는 미전이 10군데나 있을 정도로 물동량이 많은 곳이기도 했다.

해방 후인 1948년에는 삼성상회의 이병철과 공동출자로[8] 삼성물산공사(현 삼성물산)를 설립하여 부사장으로 취임하였다. 이후 제일제당 사장을 역임하면서 삼성그룹에 종사하다가 1962년 삼성그룹에서 독립, 효성물산주식회사를 세우고 경영하였다. 처음에는 제분업에 참여하였다가 1966년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 대전피혁 등을 인수하였다. 이후 섬유사업 등에도 진출하였다.

효성그룹 회장 이외에는 인재양성에 관심을 보여 배명중학교-배명고등학교 재단이사장,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1976년에 재정난에 빠진 동양학원(동양중학교, 동양고등학교, 동양미래대학교)을 인수하여 당시 동양공업전문대학(현 동양미래대학교)의 첫 이사장을 역임하며 아낌없는 투자로 동양학원을 키웠다. 단, 학교의 운영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현재 동양학원 모든 학교의 교시인 積財千萬不如薄技在身 (몸에 지닌 작은 기술이 천만금의 재산보다 낫다.) 는 교육에 힘쓰며 그가 내세웠던 의지를 그대로 계승한 것이며, 마지막 남은 생에 동양공업전문대학의 졸업식을 참여하였다. 이러한 기여에 따라 2006년에 학교 내에 조홍제 전 이사장의 동상이 제막되었다.

1984년 1월 16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에서 그가 별세한 이후 장남 조석래가 효성그룹 회장이 되었고 차남 조양래한국앤컴퍼니 회장이 되었다. 3남인 조욱래는 대전피혁을 물려받았으나, 1997년 효성기계 부도 후 현재 DSDL 회장이다.


3. 가족관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범효성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기타[편집]


그의 집안은 군북면에서 알아주는 만석꾼이었다. 군북역 항목에도 나와있는 이야기지만, 신창리 일대에서 지하수가 분수령이 되는데 풍수지리에서는 이 냇물과 멀리 남강 정암바위의 기를 받은 거라고 얘기하고 있다. 풍수지리는 유사과학이니 믿거나 말거나로 봐도 무방하지만 진주시로 들어가는 경전선 복선전철화를 단행하며 효성그룹 재실(명관리 소재) 뒷산이 싹둑 잘려나간 직후 효성그룹이 검찰조사를 받고 내홍을 치룬 걸 보고 지역 주민들은 이 지역의 풍수를 또 이야깃거리로 삼았다.

말년에 자신이 나고 자란 신창리 동네에 위치해 있고 자신이 처음에 입학했던 군북초등학교[9]에 이것저것 많이 기증했다. 효성컴퓨터[10]로 도배된 교실 2개 크기의 컴퓨터실이나 각종 생물 표본과 기자재가 완비된 과학실, 웬만한 도회지 학교에도 없는 거대한 체육관 같은 게 이런 시골 구석 학교에 존재하는 건 다 조홍제 회장의 덕이 크다. 조홍제 회장 사후에도 지원은 계속 이어져서 21세기에는 6학급짜리 분교급 학교인데도 운동장에 우레탄 트랙까지 깔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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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41년 4월 8일 조선총독부 관보 제4260호[2] 충의공파-부장공파 29세 제(濟) 항렬.[3] 출생지인 1129번지에 조홍제 생가가 보존되어 있다.[4] 지수초등학교 측에서는 LG그룹 창업주 구인회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등과 함께 같은 시기에 조홍제가 학교를 다녔음을 적극 홍보하고 있으나, 정작 효성그룹 측에서는 1921년 현 군북초등학교의 전신인 군북공립보통학교 개교와 동시에 입학하여 다니다가 1922년 중동학교 초등과로 전학했기에 지수초등학교와는 직접적인 인연이 없다고 밝혔다.#[5] 실제로는 입학 자체를 하지 않았다. 1928년 일본에 유학하려고 결심했으나 조선에서 고등보통학교 중퇴 학력이었기에 원래대로라면 일본에서 보통학교를 다시 다녀야 했다. 이 때문에 선배들의 권유를 받고 용정중학교의 졸업장과 성적증명서를 위조하였다.#[6] 일본 유학 도중 중학교 졸업장을 위조해 편법으로 공부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1928년 가마쿠라중학교 4학년에 편입하였다.[7] 실제로는 2천석 정도였다. 참고로 쌀 1천석을 수확하기 위해선 농지가 적어도 20만평이 필요하다.[8] 조홍제 측이 7, 이병철 측이 3의 비율이었다.[9] 행정구역상으로는 덕대리지만, 어차피 덕대리 덕촌리 신창리는 그냥 딱 붙어있는 한 덩어리의 동네다.[10] 현재 효성노틸러스는 ATM기 같은 비즈니스 솔루션만 취급하지만 당시는 8비트 개인용 컴퓨터도 출시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