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의제문 (문단 편집) == 누가 보고했나 == 일반적으로 조의제문의 최초 발견자이자 보고자로 거론되어 수백 년 동안 비판받았던 [[이극돈]]은 오히려 능력 있는 관료였다. '[[불경]]을 외워서 벼슬한 인물'이란 것은 근거조차 불분명한 [[김일손]]의 비판으로, 같은 사료에는 오히려 '능력에 비해서 출세가 늦었다.'는 말도 나온다. 그리고 이극돈은 김일손이 유언비어처럼 적은 사초의 왜곡된 부분을 지적했을 뿐, 조의제문의 문제점을 지적한 건 김일손의 실토와 유자광의 보고였다. 이극돈네 집안인 [[광주 이씨]] 자체는 당시 최고 명문가 중 하나였고, 이극돈의 5형제 중 [[정승]] 2명에다가 [[판서]] 하나(이극돈)가 나왔다. 명문가 집안답게 당시 국정을 총괄하고 있었고 나름 나라를 이끌어가는 자부심도 있었던 집안이었다. 더군다나 이극돈은 그 집안에서 기대받는 인재로 차기 정승감으로 인정받았던 사람인데다가 아들은 잡과를 볼 정도로 솔선한 인물이다. 물론 이극돈이 [[사림파]]와 관계가 안 좋았던 것 자체는 사실이지만[* 이극돈은 김일손의 정랑 진입을 막았고, "요새 애들은 너무 경망스러워."란 논지의 말도 한 적이 있었다. 후술하겠지만, 이들은 실제 경망스럽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최소한 가문의 후광만으로 관료 생활을 한 건 아니다. [[함경도]]에 가서 국경 경비도 선 적이 있는 인물이고 훈구공신과도 거리가 있었다.[* 따지고 보면 훈구대신의 자제긴 하지만, 어차피 사림이건 훈구건 혈맥으로 얽혀 있는 경우가 많았다.] 오히려 이극돈은 조의제문을 최대한 덮어두려고 노력했다. 조의제문을 처음 봤을 때는 같이 이를 보았던 [[노사신]]과 '어쩌다 우리 후배들이 이렇게 되었냐'고 같이 울기까지 했다고 한다.[* 노사신도 이극돈과 같은 생각이었는지, 무오사화 내내 피를 더 보려는 유자광을 막아서서 그 당시 많은 이들이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때 노사신이 살려준 이들은 연산군과 대간의 대립에서 늘상 노사신이 연산군의 편에 서자 노사신을 간신이라고 갈궈댄 사림이었다. 노사신이 자신들을 도와준 이후에야 그런 태도를 조금 버린다.] 더군다나 김일손이 사초에 세조가 단종의 시체를 버려 짐승들이 먹게 했다[* 사실과 일부 일치한다. 실제 단종의 유해는 죽은 뒤 그대로 버려진 상황에서 지역 향리인 엄흥도가 몰래 묻었고 단종의 시신은 중종 때까지 행방을 알 수 없었으니 짐승이 뜯어먹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였다. 그래도 역시 뜬소문의 영역이니만큼, '이러한 이야기도 있다' 정도로 간략하게 적을 일이지, 정론인 것처럼 단정할 일은 아니었다.]거나, 성종의 아버지였던 [[의경세자|덕종]]의 후궁들을 세조가 찝적댔다[* 전혀 사실과 다르다. 의경세자 사후 상례를 치뤘는데 상이 다 끝난 뒤에도 의경세자의 후궁이던 권 귀인이 고기도 안 먹자 세조가 고기를 먹을 것을 권유했는데 권 귀인이 거절하자 세조가 분노했다는 이야기를 김일손이 악의적으로 왜곡한 것. 게다가 의외로 세조는 여색에는 관심이 적어서 후궁도 왕자 시절에 첩으로 들였다가 국왕 즉위 후 후궁으로 격상된 2명을 제외하면 전혀 후궁을 들이지 않았고, 그나마도 1명은 세조가 즉위한 뒤 관심을 끊자 [[구성군|구성군 이준]]에게 연애편지를 보냈다가 발각당해서 처형당했다.]는 등등의 [[카더라]]성 기록까지 수록해버렸기 때문에, 이게 국왕 귀로 들어간다면 김일손 한 명에서 끝날 일이 아니라 아예 조선의 관료사회 전체가 큰 위험에 빠질 수도 있었다. 당시 사관들은 강력한 책임감과 엄정한 역사의식으로 무장해야 하는 초 엘리트들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벌어진 사건이 예종 대에 벌어진 '민수의 옥'인데 민수라는 사관이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훈구대신들의 비리 등을 너무 많이 기록해 이와 관련해서 밉보일까봐 사초를 관리하던 친구와 공모하여 자기가 쓴 사초를 고쳐 쓰고, 원숙강이라는 다른 사관도 그런 식으로 고쳐 썼다가 들통나자 친구와 원숙강은 사형, 민수는 예종의 서연관 스승이라는 점이 감안되었는지 장 100대에 제주 유배형에 처해진 사건이다. 이 때 얼마나 예종이 빡쳤는지 왕을 비판하는 기록은 잘도 남기면서 재상을 비판하는 기록은 없애려 했냐고 추궁했다. 이에 대한 그들의 대답이 더 걸작인데 재상에게 밉보이면 화가 빠르게 미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이는 그만큼 예종, 성종 초 훈구재상들의 권위가 셌다는 증거다.] 따라서 기록 작성에서 무엇보다도 공정성을 잃지 말아야 했다. 거기다가 웬만하면 실록 기록을 삭제하지 않는 전통까지 고려하면... 사관들이 부여받은 책임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그런 걸 충분히 알고 있던 이극돈이 김일손의 사초를 본 순간 기분이 어땠을지는 충분히 상상 가능하다. 더구나 이건 유교적 역사관에 대단히 어긋난다. 무오사화의 경우처럼 국왕이 알게 되면 실록과 사관 자체가 날아가버리는 수가 있다. 이걸 사림의 수장이라는 인물이 해대고 있으니 후대는 어떻게 될지 뻔할 노릇이다.[* 이 시기 사림은 이런 소설에 가까운 야담에 관심이 가서 관련서적이 좀 나오게 되는데, 김종직의 사제인 [[남효온]]의 소설 [[육신전]] 역시 이와 유사한 케이스였고, 이 책 역시 선조 때에 한번 사단이 나 선조는 육신전을 몽땅 불태워버리고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들도 처벌하겠다고 말했다. 과격하게 말해 사람이 피해를 입지 않았다뿐이지, 육신전 사건은 '무오사화 시즌 2' 였는데 둘 다 공통점이 찌라시가 발단이었고 이를 왕이 알아 보게 되고 분노했다는 것이 같다.] 그래서 이극돈은 이 문제의 보고를 올리는 데 주저했지만 이미 김일손의 사초가 문제가 있다는 소문은 이극돈 한 사람만 입을 다문다고 끝날 문제가 아닐 정도로 좌악 퍼져 있었고, 당시 낙하산이었던 한치형은 그 소문을 듣고 이극돈을 달달 볶아댔다.[* 참고로 한치형은 인수대비의 사촌으로 영의정까지 하게 되는 인물인데 연산군에게 바른 말만 하다가 갑자사화 전에 죽었다. 이 바른 말 경력 덕분에 부관능지를 당한다. 연산군 시절에 부관참시당한 영의정들은 [[정창손|많]][[한명회|았]][[정인지|지만]], 부관능지까지 당한 사람은 관료 전체를 통틀어도 굉장히 드물다.] 하지만 정작 조의제문을 연산군한테 처음 올린 사람은 이극돈도, 한치형도 아닌 [[유자광]]으로 보인다. 기록에 보면 조의제문을 본 이극돈이 이를 봉하고 일체 발설하지 않도록 했는데 막상 다음날이 되니 한치형, 이극돈, 노사신, [[윤필상]]등이 떼로 (살아남기 위해) [[연산군]]을 찾아가서 조의제문 문제를 거론했다. 이는 연산군이 조의제문을 누군가한테서 엿들은 다음에 이극돈 등한테 '빨리 갖고 와' 하고 버럭질한 결과로 추정되는데, 조의제문 문제를 거론한 중신들 중에 유자광만이 실록청 당상이 아니었기에 조의제문 문제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못했다. 즉, 유자광이 먼저 꼰지르고 열받은 연산군이 이극돈을 조진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이에 이극돈은 '사초는 원래 임금이 볼 수 없으니, 그걸 발췌하면 원칙도 지켜지고 문제도 해결된다.'는 식으로 절충하려고 했지만, 결국 이 작업으로 이극돈은 무오사화란 사건에 자기 이름을 제대로 남기고 말았다. 오히려 이 사건으로 벌어진 무오사화 때문에 이극돈은 보고를 늦게 했다는 죄목으로 삭탈관직을 당했고, 당연히 올라갈 거라 예상되었던 정승 직위까지도 놓쳤다. 그 대신 동생 이극균이 좌의정에 임명되었지만 연산군은 이때부터 광주 이씨 집안을 경계하게 되고 기어이 [[갑자사화]] 때 트집을 잡아 집안 자체를 멸문한 거나 다름없게 만든다.[* 그나마 이극돈은 멸문당하는 꼴은 보지 않고 갑자사화 1년 전인 1503년에 사망했다.] 덤으로 [[중종반정]] 이후에는 또 이러한 전력이 터무니없을 정도로 지적당하고 까여서 이 가문 사람들은 대대로 고생 숱하게 했고, 후손 [[이이첨]] 또한 이 부분을 숱하게 인신공격당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