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의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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弔義帝文[1]
1. 개요[편집]
조선시대의 문신 김종직이 생전에 세조의 왕위 찬탈을 은유적으로 비판했던 글.
조의제문(弔義帝文)이란 제목은 '의제를 조문하는 글'이란 뜻이다. 그래서 조의-제문이 아니라 조-의제-문이라고 읽어야 한다. 초한쟁패기 항우에게 살해당한 초의제(회왕)의 귀신이 꿈에서 나타났다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의제는 항량의 초나라 부흥군에 왕으로 옹립된 왕실의 직계 후손이었으나, 항우에게 쫓겨나 살해당했다. 당시에 아이였다는 점과 일찍 쫓겨나 살해당했다는 점에서 단종과 겹친다. "아무런 관계도 없는 회왕이 왜 꿈에 나타났을까?"라는 마지막 문장의 뉘앙스도 그렇지만, 결정적인 단서가 바로 칠장복[2] 이었다. 세자를 거쳐 왕으로 즉위한 정통성 있는 임금, 즉,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을 의미한다는 것. 게다가 조의제문에 나오는 날짜인 정축년 10월은 단종이 살해된 시기를 뜻한다. 단종은 1457년 10월 21일(음력)에 죽었는데, 이 1457년이 바로 정축년이다.
정리하자면, 여기서 항우는 왕위를 빼앗은 세조를 뜻하고, 의제는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유배당한 단종을 의미한다.
2. 왜 썼나[편집]
사실 김종직은 이전에도 잡학과 불교를 중시했던 세조에게 간언했다가 삭탈된 적이 있을 만큼 강직했고, 조의제문을 지을 당시 김종직의 나이는 27살에 재기 넘치던 젊은 시절. 그의 원칙주의적 성격으로 보면 내심 세조의 왕위 찬탈에 비판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의제문을 작성한 것과 앞서 말한 삭탈관직을 제외하면 크게 세조와 각을 세우는 일은 없던 것으로 보아 어떤 실제적인 계획이 있었다기보다는'세조의 왕위 찬탈'에 대한 일반적인 비판으로 해석된다.
3. 누가 보고했나[편집]
일반적으로 조의제문의 최초 발견자이자 보고자로 거론되어 수백 년 동안 비판받았던 이극돈은 오히려 능력 있는 관료였다. '불경을 외워서 벼슬한 인물'이란 것은 근거조차 불분명한 김일손의 비판으로, 같은 사료에는 오히려 '능력에 비해서 출세가 늦었다.'는 말도 나온다. 그리고 이극돈은 김일손이 유언비어처럼 적은 사초의 왜곡된 부분을 지적했을 뿐, 조의제문의 문제점을 지적한 건 김일손의 실토와 유자광의 보고였다.
이극돈네 집안인 광주 이씨 자체는 당시 최고 명문가 중 하나였고, 이극돈의 5형제 중 정승 2명에다가 판서 하나(이극돈)가 나왔다. 명문가 집안답게 당시 국정을 총괄하고 있었고 나름 나라를 이끌어가는 자부심도 있었던 집안이었다. 더군다나 이극돈은 그 집안에서 기대받는 인재로 차기 정승감으로 인정받았던 사람인데다가 아들은 잡과를 볼 정도로 솔선한 인물이다. 물론 이극돈이 사림파와 관계가 안 좋았던 것 자체는 사실이지만[3] 최소한 가문의 후광만으로 관료 생활을 한 건 아니다. 함경도에 가서 국경 경비도 선 적이 있는 인물이고 훈구공신과도 거리가 있었다.[4]
오히려 이극돈은 조의제문을 최대한 덮어두려고 노력했다. 조의제문을 처음 봤을 때는 같이 이를 보았던 노사신과 '어쩌다 우리 후배들이 이렇게 되었냐'고 같이 울기까지 했다고 한다.[5] 더군다나 김일손이 사초에 세조가 단종의 시체를 버려 짐승들이 먹게 했다[6] 거나, 성종의 아버지였던 덕종의 후궁들을 세조가 찝적댔다[7] 는 등등의 카더라성 기록까지 수록해버렸기 때문에, 이게 국왕 귀로 들어간다면 김일손 한 명에서 끝날 일이 아니라 아예 조선의 관료사회 전체가 큰 위험에 빠질 수도 있었다.
당시 사관들은 강력한 책임감과 엄정한 역사의식으로 무장해야 하는 초 엘리트들이었다.[8] 따라서 기록 작성에서 무엇보다도 공정성을 잃지 말아야 했다. 거기다가 웬만하면 실록 기록을 삭제하지 않는 전통까지 고려하면... 사관들이 부여받은 책임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그런 걸 충분히 알고 있던 이극돈이 김일손의 사초를 본 순간 기분이 어땠을지는 충분히 상상 가능하다. 더구나 이건 유교적 역사관에 대단히 어긋난다. 무오사화의 경우처럼 국왕이 알게 되면 실록과 사관 자체가 날아가버리는 수가 있다. 이걸 사림의 수장이라는 인물이 해대고 있으니 후대는 어떻게 될지 뻔할 노릇이다.[9]
그래서 이극돈은 이 문제의 보고를 올리는 데 주저했지만 이미 김일손의 사초가 문제가 있다는 소문은 이극돈 한 사람만 입을 다문다고 끝날 문제가 아닐 정도로 좌악 퍼져 있었고, 당시 낙하산이었던 한치형은 그 소문을 듣고 이극돈을 달달 볶아댔다.[10]
하지만 정작 조의제문을 연산군한테 처음 올린 사람은 이극돈도, 한치형도 아닌 유자광으로 보인다. 기록에 보면 조의제문을 본 이극돈이 이를 봉하고 일체 발설하지 않도록 했는데 막상 다음날이 되니 한치형, 이극돈, 노사신, 윤필상등이 떼로 (살아남기 위해) 연산군을 찾아가서 조의제문 문제를 거론했다. 이는 연산군이 조의제문을 누군가한테서 엿들은 다음에 이극돈 등한테 '빨리 갖고 와' 하고 버럭질한 결과로 추정되는데, 조의제문 문제를 거론한 중신들 중에 유자광만이 실록청 당상이 아니었기에 조의제문 문제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못했다. 즉, 유자광이 먼저 꼰지르고 열받은 연산군이 이극돈을 조진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이에 이극돈은 '사초는 원래 임금이 볼 수 없으니, 그걸 발췌하면 원칙도 지켜지고 문제도 해결된다.'는 식으로 절충하려고 했지만, 결국 이 작업으로 이극돈은 무오사화란 사건에 자기 이름을 제대로 남기고 말았다.
오히려 이 사건으로 벌어진 무오사화 때문에 이극돈은 보고를 늦게 했다는 죄목으로 삭탈관직을 당했고, 당연히 올라갈 거라 예상되었던 정승 직위까지도 놓쳤다. 그 대신 동생 이극균이 좌의정에 임명되었지만 연산군은 이때부터 광주 이씨 집안을 경계하게 되고 기어이 갑자사화 때 트집을 잡아 집안 자체를 멸문한 거나 다름없게 만든다.[11] 덤으로 중종반정 이후에는 또 이러한 전력이 터무니없을 정도로 지적당하고 까여서 이 가문 사람들은 대대로 고생 숱하게 했고, 후손 이이첨 또한 이 부분을 숱하게 인신공격당했다.
4. 무오사화[편집]
이 조의제문은 연산군대에 있었던 무오사화의 중요 원인 중 하나다. 뒤에 보겠지만 무오사화는 조의제문 때문에 일어나게 된 게 아니다. 정확히는 김일손이 세조를 비난하며 왕실 스캔들 기사를 사초[12] 에 기록한 사건으로 인하여 김일손이 압송되고, 사초에 적혀있던 김일손의 다른 기사 부분들을 검토하던 도중 조의제문이 걸려들게 된다.
조의제문은 당시 지식인들도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은유적 표현이 가득한 글이었는데, 유자광이 친절히 이 글을 해석해서 연산군에게 알려주었고, 조의제문이 세조의 쿠데타(계유정난)에 대해 비난하는 글임이 밝혀지며 설령 김종직이 그런 의도로 쓰지 않았다 하더라도, 제자인 김일손은 그런 용도로 사용했다는 것이 심문과정에서 밝혀졌다. 그리고 무오사화라는 헬게이트가 열리게 된다.
"조룡이 아각을 농했다.’는 조룡은 진 시황인데, 종직이 진 시황을 세조에게 비한 것이요, 그 ‘왕위를 얻되 백성의 소망을 따랐다.’고 한 왕은 초 회왕의 후손 심인데, 처음에 항량이 진을 치고 손심을 찾아서 의제를 삼았으니, 종직은 의제를 노산에게 비한 것이다. 그 ‘양흔 낭탐하여 관군을 함부로 무찔렀다.’고 한 것은, 종직이 양흔 낭탐으로 세조를 가리키고, 관군을 함부로 무찌른 것으로 세조가 김종서를 베인 데 비한 것이요. 그 ‘어찌 잡아다가 제부에 기름칠 아니 했느냐.’고 한 것은, 종직이 노산이 왜 세조를 잡아버리지 못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 ‘반서를 입어 해석이 되었다.’는 것은, 종직이 노산이 세조를 잡아버리지 못하고, 도리어 세조에게 죽었느냐 하는 것이요. 그 ‘자양은 노필 따름이여, 생각이 진돈하여 흠흠하다.’고 한 것은, 종직이 주자를 자처하여 그 마음에 부를 짓는 것을, 《강목》의 필에 비의한 것이다. 그런데 일손이 그 문에 찬을 붙이기를 ‘이로써 충분을 부쳤다.’ 하였다. 생각건대, 우리 세조 대왕께서 국가가 위의한 즈음을 당하여, 간신이 난을 꾀해 화의 기틀이 발작하려는 찰라에 역적 무리들을 베어 없앰으로써 종묘 사직이 위태했다가 다시 편안하여 자손이 서로 계승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니, 그 공과 업이 높고 커서 덕이 백왕의 으뜸이신데, 뜻밖에 종직이 그 문도들과 성덕을 기롱하고 논평하여 일손으로 하여금 역사에 무서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이 어찌 일조일석의 연고이겠느냐. 속으로 불신의 마음을 가지고 세 조정을 내리 섬겼으니, 나는 이제 생각할 때 두렵고 떨림을 금치 못한다. 동·서반 3품 이상과 대간·홍문관들로 하여금 형을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연산군 일기)
윤필상이 "차마 입으로는 읽지 못할 뿐 아니오라 눈으로 볼 수도 없나이다"라고 했고, 김종직 사단인 표연말, 홍한 등까지 앞다퉈서 극형을 주장했을 정도로 실록에 올라갈 수 없는 문장인데,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이후 쓰여진 연산군 일기에 버젓이 전문이 오르게 된다. 되려 연산군과 유자광 덕분에(?) 문장이 제대로 남아버린 셈이다.
5. 조의제문 원문[편집]
출처
이 내용이 김종직 본인의 개인 문집에만 실려 있었다면 사화로까지 번지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이걸 김종직의 제자인 김일손이 제멋대로 조정의 사초에 기록해버렸고 그것이 들통난 것이 문제였기 때문에 이런 사달이 난 것이다. 나중에 허균이 세조 밑에서 벼슬을 했으면서 조의제문을 쓴 것은 가소로운 일이라고 김종직을 맹비난하기도 하였다. 물론 허균은 이단아 취급받던 사람인지라 다른 유학자들에게서 '네놈이 무슨 자격으로 김종직을 비난하느냐?'고 핀잔을 받았지만, 허균은 유교적 입장에서 완벽한 정론을 취한 것이다. 유교적 도덕관으로 볼 때 왕의 정통성을 인정할 수 없으면 바로 죽일 테면 죽이라고 맞서건 벼슬을 버리고 은일(隱逸)하건 해야지, 앞에서는 섬기면서 뒤에서는 까는 글을 쓰는 표리부동한 짓은 결코 용납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남효온이 집필한 《육신전》에도 '사육신은 공문에 臣자 대신 巨자를 썼다'느니, '녹봉을 받았지만 전혀 쓰지 않고 그대로 쌓아두었다'는 등 작위적이고 구차해 보이기까지 하는 설정이 추가된 것 역시 '사육신은 세조를 섬기지 않았다'고 하기 위함이다. 물론 사육신이야 실제로 자신들의 죽음으로 단종에 대한 충절을 보여 후대에도 충절의 상징으로 남았지만, 그럼에도 한때 세조 아래서 신하로 있었다는 것은 유교적 관점에서 그들의 정당성에 지우지 못할 흠결로 남았다는 것.[28]
이 때문에 남효온은 자신이 쓴 소설 《육신전》에서 우스꽝스러운 말장난을 치면서까지 단종복위세력의 정당성을 강변해야 했던 것이다. 그나마 사육신은 어쨌건 목숨을 걸고 세조에 맞서다 당당히 죽음을 맞이했다는 실적을 남김으로써 자신들의 충절을 증명했고, 유교적 명분론을 중시하던 조선 중후기 당시에도 사육신이 충절의 상징으로 널리 존경받았다는 것은 당대인들 역시 명분론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정도 융통성 있게 해석했다는 근거는 될 것이다.[29]
하지만 김종직은 세조대에 출사하여 그 아들인 예종을 거쳐 손자인 성종대까지 벼슬을 했고, 특히 성종대에는 왕의 총애를 받아 관직이 판서, 홍문관 대제학에 이르렀는데도 뒤에서 자신에게 벼슬을 시켜 준 왕(과 선대왕)을 씹어댔고, 또 그렇다고 뒷다마 까는 것 이외에는 단종의 복위를 위해 특별히 노력한 행적이 보이지도 않으니 표리부동하다, 치졸하고 가소롭다고 욕을 먹어도 반론할 말이 없는 셈이다.
사초에 기록한 내용은 숨길 수가 없다. 그것은 당대는 어쨌든 다음 임금대의 신하들이 실록을 편찬하며 반드시 열람해야 하는 문서고[30] 수정할 수도 없는데, 그것을 모를 리가 없는 사관이었던 김일손이 그 짓을 해놓은 의도는 분명했다. 후세가 다 보라고 일부러 싸지른 것. 그리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연산군은 그렇게 "사관의 기록으로 정통성을 부정당한" 임금인 세조의 증손자인데 조선은 왕조국가였고 연산군이 가진 왕통의 뿌리는 세조에게 있었다. 이런 일을 당상관이 다 알게 됐고 왕인 자신에게 쉬쉬하는 판이니 이쯤 되면 어느 왕이라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