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국(인물)/생애 (문단 편집) == 정치 이전 == 1963년, [[부산광역시|부산]] [[서구(부산)|서구]] [[동대신동]]에서 부친인 조변현(曺弁鉉)[* 조국의 모친 박정숙이 직접 글로 밝힌 바로, 조변현의 족보명--겸 사실상 본명--은 따로 있어서, '조규변(曺圭弁)'이라고 한다. 집안에서 가족 및 친척끼리 쓰던 족보명과 주민등록된 이름이 다른 듯하다. 저걸 밝혔던 것은 웅동학원 체납논란이 있었을 때 이사장인 박정숙이 해명글을 쓰면서 거기 부가해서 기록했다.]과 모친인 박정숙(朴貞淑) 사이의 장남[* 친동생 1명이 있다. 이름은 조권(曺權)(족보명 겸 사실상 본명은 조권현(曺權鉉)이다. 다음은 이하 출처 사진이다. [[파일:조국 가족 족보.png]]). 조국이 쓴 자서전에 해당하는 책에 따르면 동생도 조국 본인 못지않게 체격이 어릴 때부터 컸는데, 모범생 타입이었던 [[본인]]과 달리 성격이 괄괄하고 운동을 잘 했지만, 싸움을 많이 해서 사고도 많이 쳤다고 한다. 큰 싸움을 하다가 학교에 걸려서 모친이 학교에 불려가 용서를 구한 적도 있었을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동생이 형인 본인에게는 크게 대든 적이 없었고, 조국 본인이 모범생이자 우등생이라는 것에 동생이 자주 비교되어 비뚤어진 부분도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이해하여, 그때부터 동생과 깊은 소통이 시작되었다고 한다.]으로 태어났다. 부친 조변현은 사업가로, 부산에서 '고려종합건설'이라는 건설사를 운영하다가, 아들 조국이 대학생이던 1985년에 사학재단인 웅동학원을 인수하여 이사장이 되었다. 고려종합건설이 한창 잘나갈 때는 도급 순위 60위권의 제법 규모있는 회사였다고 한다. 2013년에 단돈 21원(그 중 조국의 몫은 6원)과 42억의 빚을 유산으로 남기고 사망하였다. 당시 조국의 아파트 가격이 10억이 조금 안되는 가격이었으나, 조국은 6원만 변제했다. 모친 박정숙은 화가로 알려져 있으나, 원래는 부산대학교 간호대학을 1회로 졸업한 후 초등학교 교사를 했다고 한다. 교육대학이나 사범대학을 나오지 않고 간호학과를 나와 초등학교 교사가 된 것은 당시로서도 이례적인 일로 여겨지고 있다. 조국의 동생을 낳은 뒤로 육아와 교직을 겸하는 것이 버거워 그만두고 20년간 주부로 살았다고 한다. 미술 쪽은 1990년부터 공부했다고 한다. 남편이 사망한 후, 그 뒤를 이어 웅동학원의 이사장을 맡고 있다.[* 조국의 부인인 [[정경심]] 교수 역시 웅동학원의 이사 중 하나다.] 조국은 부산에서 구덕초등학교, [[부산대신중학교]], [[혜광고등학교]](27회)[* [[김혁수]] [[대테러센터]]장([[대한민국 육군]] 중장 예편)과 [[서범수]] [[국민의힘]] 의원과 동기다.]를 졸업하였다. 1982년 [[서울대학교/학부/법과대학|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했다. 서울대 재학 시절 학생회장 [[백태웅]]의 권유로 [[사노맹]]에서 활동하였는데 이때 사노맹 운영을 돕고 있던 [[유시민]]과 인연이 생기게 되었다. 학부 졸업 후 석사 과정을 졸업(1989년)하였으며(지도교수는 훗날 국무총리를 역임한 [[이수성(정치인)|이수성]])[* 조국의 회고에 의하면, 이수성 교수와는 학부 때 공법학과 대표로서 인연이 있었는데, 3학년 때 "고시 볼 생각이 있냐"는 이 교수의 질문에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가 "그러면 내 밑에서 공부하라"는 권유를 받았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대학원에 진학하여 이 교수를 지도교수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졸업 후에는 [[석사장교]] 과정에 지원, [[대한민국 육군]] [[사관후보생]] 신분으로 6개월간 교육 후 1990년 육군 [[보병]] [[소위]] 임관과 동시에 전역하여 병역을 마쳤다. 석사 과정을 마친 후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 과정에 진학했다. 박사과정 때 [[안경환]] 교수 밑에서 조교 생활을 했는데,[* 이 때문인지 세간에 흔히 안경환 교수가 스승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조국 본인이 자전적 에세이인 《나는 왜 법을 공부하는가》에서 이수성 교수를 지도교수로 지칭하면서 "이수성 교수님 다음으로 내게 멘토 역할을 해 주신 분은 안경환 교수님이다."라고 하고 있다. 다만, 조국 본인의 회고를 보더라도 안 교수의 영향이 매우 컸던 것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훗날 여느 형사법 전공자들과 달리 [[독일]]이 아닌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된 것도 안경환 교수의 권유 때문이라고 한다. 이진경, [[진중권]] 등과는 대학원 시절 함께 [[카를 마르크스]]의 책을 공부하는 등의 인연이 있었다. 1991년에는 첫째인 [[조민|딸]]이 태어났다. 1992년 [[울산대학교]] 법학과 전임강사로 임용되었다. 재직 중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사건으로 구속되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처벌을 받았다. 출소 이후 [[태광그룹]] 일주장학재단에서 장학금을 받아 [[미국]] UC버클리에서 유학을 가서 단기 법학 석사, 박사 과정을 마쳤다. [[http://www.ddanzi.com/ddanziNews/576272681|전공은 형법]]이다. 박사 유학 시절인 1995년에는 아들을 얻어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귀국 후 1999년 3월부터 2000년 2월까지 [[울산대학교]] [[법학과]] 조교수로 재직했고, 2000년 3월에서 2001년 11월까지 [[동국대학교]] [[법과대학]] 조교수로 근무했다. 동국대로 이직한 후에 한동안 울산대와 동국대 두 대학교에서 월급을 이중으로 수령한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2001년 12월 [[서울대학교/학부/법과대학|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조교수로 임용되었다.[* 2001년도부터 [[서울대 법대]]로 부임하여 형법총론 강의를 맡았는데, 그 때문에 당시 서울대 01학번들은 동국대에 "혹시 족보 갖고 있는 사람 있느냐"며 수소문을 했다고도 한다.] 당시 법대 학장은 [[안경환]] 교수였다. 이후 부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정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제자로, 정도희 경상대학교 법학과 교수, 박형관 가천대학교 경찰안보학과 교수(전 검사), 김한균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 등이 있다. [[최강욱]] 변호사도 조국 교수의 지도로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