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여립 (문단 편집) === 정여립의 난? === 1589년 10월 2일 [[황해도]] 관찰사 [[한준]] 등이 연명으로 [[상소]]를 올려 정여립이 [[한강]]이 얼 때를 기다려 [[서울특별시|한양]]으로 진격해 모반을 꾀한다는 고변을 하였다. 이에 선조는 [[의금부]] 도사를 보내 정여립을 체포하도록 지시했고 정여립은 아들 [[정옥남]]과 함께 죽도로 도망쳤다가 관군이 포위하자 [[자살]]했다는 것이 역사의 기록이다. 그러나 [[정여립의 난|정여립 모반 사건]]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것들 투성이다. 먼저 정여립이 도망친 곳이 죽도인데 정여립은 이미 죽도에서 대동계를 이끌고 있었고 이는 조정을 비롯한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죽도가 아니라 다른 곳으로 도망쳤을 것이다. 그런데도 죽도로 도망쳐서 관군에게 포위되어 자결했다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가 어려운 일이다. 정여립이 대동계를 이끌고 있던 곳은 전라도 진안인데 황해도 관찰사인 한준이 상소를 올렸다는 점, 당시 조선에서는 모반 사건에 대해 [[암행어사]]나 승지 등을 파견해 해당 사건을 면밀히 조사한 후 한양으로 압송해 국문을 통해 역모 여부를 판단하는 등 엄밀한 조사 과정을 거쳤는데 아무런 조사 과정도 거치지 않고 [[군대]]가 먼저 갔다는 점도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다만 당시 기록들을 보면 처음에는 무고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고변한 사람들까지 체포해서 조사하려고 금부도사를 파견했는데, 금구에서 일하는 저리가 정여립 집 여자 노비의 남편이었고, 그가 정여립에게 정보를 흘린 탓에 정여립 일당이 미리 도주한 것이었다. 정여립이 과연 모반을 꾀했는가 하는 것도 의문이다. 물론 그의 대동계가 무력을 갖춘 것은 사실이지만 불과 2년 전에 관에서 왜구를 [[토벌]]하는데 동참해 달라고 의뢰할 정도라면 이미 [[관아]]에서도 용인한 집단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지방 관청의 시선과 중앙 정부의 시선은 다를 수도 있다. 정여립의 행동은 모반을 꾀한 사람이라고 보기에는 이상한데 만약 정여립이 진정 모반을 꾀했다면 자신의 계원들을 이끌고 싸워보기라도 했을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의문들로 인해 정여립의 난은 [[조작]]된 모반 사건이라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동인에서는 정여립이 죽도에서 대동계원들과 잔치를 벌이다가 관군의 기습을 받아 죽었다고 기록된 문서가 발견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건 사실과 다른데, 실제로는 도주하다가 관군의 추격을 더 이상 뿌리칠 수 없는 상황에 몰린 정여립이 같이 도주하던 동료들을 죽이고 자신도 칼에 목을 박아서 자살한 것이었다. 이때 전부 다 죽은 건 아니었는데, 정여립의 아들은 살아있었고, 관군에게 체포되었을 때, 처음에는 다른 사람인 척 하다가 들통나고 말았다. 이런 조작설은 어디까지나 정황이 앞뒤가 안 맞아서 제기되는 가설일 뿐, 확실한 증거도 없고, 근거로 제시된 것들 또한 어느정도는 신빙성이 부족한 것들도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애초에 이 조작설을 처음 제기한 건 당시 기축옥사로 큰 피해를 본 동인 측인데, 잘 보면 이들의 주장은 자신들의 당파적 입장과 서인에 대한 적대감이 상당히 반영된 주장이다. 객관성도 부족하고, 증거와 근거로 제시된 설들 또한 교차검증해보면 사실과 다른 점들이 많았다. 현대에는 서인 배후설이 아닌, 선조 배후설을 제기하며 선조가 조작의 배후일 가능성을 제기하지만, 이는 당시 상황이 너무 커진 동인 세력을 견제하고자 했던 선조에게 유리했다는 점을 근거로 하고 있다. 하지만 선조가 조작의 배후라기보다는 그냥 주어진 상황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악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정여립의 형 정여복과 정여립의 사위인 김경일이 정여립의 행동을 수상하게 생각했고 정여립과 친하게 지내던 승려인 도잠과 설청 등은 정여립이 반역을 한다고 생각해 도망치기도 했으며 이발의 동생인 이길이 정여립과 만난 후에 이발에게 정여립이 역모를 했다고 편지를 쓰기도 한걸 보면 정여립의 행동이 수상쩍기는 했던 모양이다. 정여립의 난에 대한 해석과 판단이 어려운 이유는, 해당 사건에 대한 기록들 중에 사실과 다른 내용을 기록하거나, 저술가의 주관적 관점이 강하게 반영되어서 서로 모순되고 충돌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임진왜란의 영향도 있는데, 전란으로 상당히 많은 사초가 소실되었고 ,이중에는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에 대한 공식 기록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중에 기록을 다시 복원할 때, 당시 사정에 잘 아는 사람을 찾아서 그 사람의 기억에 의존해야 했기도 했다. 이후 선조 수정 실록 또한 작성자의 당파적 입장이 어느 정도는 반영되어서 해당 사건에 대해 기술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 사건에 대한 해석과 판단은 다양한 사료에 대한 철저한 교차검증을 통해 어디까지가 실제 사실과 부합한지, 어떤 사람의 어떤 입장과 관점이 반영된 정보인지, 조심스럽게 고려하면서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