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여립 (문단 편집) === 대동계의 조직 === 인망이 높았던 정여립에게 계속해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고 정여립은 [[전라도]] 진안의 죽도(竹島)에 서실을 차린다. 이곳의 이름 때문에 [[바다]] 위에 있는 [[섬]]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으나 진안의 [[금강]] 상류에서 구량천과의 합류 지점에 위치한 섬 모양의 지형이다. [[하중도]]까지는 아니고 금강과 구량천이 아슬아슬하게 잘록목을 이룬 호리병 모양이다. [[https://map.naver.com/v5/search/%EC%A3%BD%EB%8F%84/place/36773948?c=14196190.6412360,4274967.7292762,14,0,0,0,dh|네이버 지도]] 정여립은 죽도에서 활쏘기 모임을 하는 등으로 사람들을 규합하여 '대동계(大同契)'(유학의 이상사회가 '대동(大同)')를 만들었다. 대동계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한 모임이었고 이는 정여립의 성향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었다. 뛰어난 학식과 통솔력, 활 솜씨를 겸비한 정여립을 추종하는 동인의 무리가 많았다. 특히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에서 그의 명망이 높았다. 후일 [[정여립의 난]] 당시 연루되어 죽거나 귀양간 [[선비]]가 [[호남]]에는 1,000명, [[영남]]에도 수백 명이 있었다고 할 정도였다. 실제로 이 옥사를 기점으로 하여 영호남, 특히 호남 출신의 [[과거 제도|과거]] 급제자 수는 크게 줄어든다. 물론 호남 사림이 완전히 [[씨]]가 마른 것은 아니었다. 주로 피해를 입은 호남 사림은 전주 일대의 동인 계열 사림들이었고 무엇보다 옥사를 확대시킨 세력 중에는 서인 계열 호남 사림도 있었다. 훗날 선조가 "과인이 간악한 정철에게 속아 호남의 어진 선비들이 고초를 겪었다"며 화해의 손짓을 내밀기도 하였으니, 호남이 [[정치]] 아니면 먹고 살 길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이후에도 [[광산 김씨]]처럼 정치적으로 노론에 속한 가문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옥사를 기점으로 호남 민심이 정치에 환멸을 느꼈을 것이란 추측도 가능하다. 1587년 전주부윤 남언경(南彦經, 1528 ~ 1594)[*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는 정여립의 난 파트에서 엑스트라 1 같은 인물처럼 나오는데 사실은 거물이다. 서경덕의 제자로 이황과도 토론할 정도로 학문이 높았다. 조선 최초의 양명학자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으며 정제두의 스승이기도 하다.]의 요청으로 정여립은 대동계원들을 이끌고 손죽도에 쳐들어온 [[왜구]]를 격파했다. 이를 볼 때 대동계는 관군에 버금가는 [[무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남언경은 이 때 정여립의 손을 빌렸다는 이유로 한패로 몰려 모반 사건 이후 [[탄핵]]당한다. 그럼에도 그는 정여립이 무고하다고 생전에 항변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