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여립 (문단 편집) === 초기 이력 === 본관은 [[부산광역시|동래]]이고 [[전주시|전주]]에서 태어났다. 오늘날 [[전라북도]] 전주시의 도로명 중에도 정여립로가 있고 [[완주군]] 상관면에 정여립 생가터가 있다. 태어난 곳은 전주인데 생가터의 지명이 완주군 상관면인 이유는 과거 전주시와 완주군은 원래 같은 전주군이었다가 [[일제강점기]] 때 도농 분리 정책으로 인해 [[도시]] 지역인 전주부와 [[농촌]] 지역인 완주군으로 행정 구역이 분리되어 현재까지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태어난 곳을 <[[연려실기술]]>에는 전주성 남문 밖이라고 하고 <[[조선왕조실록]]>에는 전주성 동문 밖이라고 하였다. 태생 설화에서는 [[고려]] 중반 [[무신정변]]을 일으킨 주역 중 하나인 [[정중부]]가 [[태몽]]에 나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는데 1570년(선조 3년) 과거에 급제하여 1584년 수찬의 [[벼슬]]에 이르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정여립이 어린 시절부터 흉포하고 잔인한 인물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어린 시절 새를 잡아다가 찢어 죽인 것을 여종이 정여립의 아버지에게 알렸고 이후 아버지에게 혼난 정여립이 앙심을 품고 여종이 자는 틈을 타 배를 갈라 죽인 다음 다음날 "이 아이가 나의 잘못을 일러바쳤기에 내가 죽였다."고 태연하게 말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방약무인한 성격은 성인이 된 후에도 그대로여서 어전에서도 눈을 부릅뜨고 왕을 노려보았다는 [[야사(역사)|야사]]도 있다. 당연하지만 왕이 '고개를 들라'거나 '내 얼굴을 보라'는 말이 있기 전까지는 납작 엎드린 채 고개를 들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이런 미친 짓을 했다면 [[카더라]]식 야사가 돌게 아니라 <조선왕조실록>에 정여립의 목이 날아간 자초지종이 쓰여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록은 반체제적 성향을 가지고 있던 정여립의 [[이미지]]를 훼손하기 위해 꾸며냈을 가능성이 크다. 오히려 [[인조]] 대에 조선 전기의 야사들을 모아서 편찬된 <대동야승>에서는 “정여립은 넓게 보고 잘 기억했으며 논의가 격렬하여 마치 거센 바람이 부는 듯했다.”라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는데 당대 [[지식인]]들 사이에서 총명하고 박학다식했다는 평가 역시 전해진다. 한마디로 정여립을 부정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잔인한 살인자, 무례한 반역자라는 프레임을 씌운 확률이 높다는 것.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