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여립 (문단 편집) == 후일담 - 남인/북인의 분열 == 실상 정여립의 난은 [[서인]]이 동인의 씨를 말리려 한 구실이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이 때 가장 앞장서서 동인을 몰아내려 했던 인물이 서인의 정철이었지만 뒤에서 조종한 것은 사실상 선조였다는 평가가 대다수. 하지만 임금을 미워할 수는 없으니 결국 타깃은 정철이 되었다.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정철이 선조의 비위를 상하게 하고 만다. 이에 대해서 정철이 선조의 총애를 받던 [[인빈 김씨]]의 아들 [[신성군]] 대신 [[광해군]]을 지지하는 발언을 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으나 정철이 투옥된 이유는 건저(建儲) 문제(왕세자 책봉을 건의하는 문제)의 총대를 매었기 때문이었다. 동인과 함께 건의하려다가 동인 측이 빠지는 바람에 결과적으로는 혼자 제기한 셈이 되어버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건저문제 당시 조정 상황은 정철이 당할 수밖에 없는 구도였다. 선조가 신성군을 마음에 두고서 건저를 의논하고자 삼 [[정승]]을 불렀는데 당시 영의정이 [[이산해]], 좌의정이 [[정철]], 우의정이 [[류성룡]]이었다. 정철 정도면 거기서 "신성군이 가한 줄로 아뢰오." 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 자리에서 꿋꿋이 광해군을 지지한 그도 책임이 없지는 않다. 그래도 정철은 류성룡 덕분에 [[사약|약 사발]] 안 먹고 살아남을 수는 있었는데 이산해는 당장 갈아버리자고 했다. 정철의 대표적인 [[작품]]인 [[사미인곡]]이 유배 [[문학]]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이 시기에 쓰인 작품은 아니다. 세자 건저 문제로 [[귀양]]간 것은 1591년 2월이고 [[관동별곡]]과 사미인곡은 1585년과 1589년 사이에 쓰여진 작품이다. 현재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서는 [[정여립의 난|정여립 모반 사건]]이 [[동인(조선)|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진 하나의 계기로 설명하고 있다. 상술하듯 정철이 세자 건저라는 트롤링을 벌여 서인을 말아먹을 시점에 동인은 이것을 서인을 몰아낼 구실로 삼았다. 이 때 정철 축출에 적극적으로 행동했던 사람(이자 동시에 옥사에서 타격을 많이 받은 쪽)들을 북인, 소극적으로 행동했던 사람(이자 동시에 옥사에서 거의 타격을 입지 않은 쪽)들을 남인으로 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