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극장 (문단 편집) == 생애 == 사명주(思明洲)[* 현 [[푸젠성]] [[샤먼(도시)|샤먼]]시 스밍(思明)현. 대만 섬에서의 정씨 동녕 왕국 수립 이전에는 가화(嘉禾)라고 불렸으나 [[명나라]] 때 하문도(廈門島)로 명칭이 바뀌었다.]에서 태어났으며, 비록 서출이었지만 할아버지 [[정성공]](鄭成功)과 같은 호방함을 지녔었다. 동녕 왕국에서 국정을 책임지고 있었던 동녕총제(東寧總制) [[진영화(동녕 왕국)|진영화(陳永華)]]의 딸과 결혼하여, 장인의 도움으로 정경의 승인을 받아 [[1679년]] 감국(監國)이 되었다. 당시 정경은 [[삼번의 난]]에 가담하여 삼번을 지원하느라고 정치에 손 쓸 틈이 없었고, 때문에 이때부터 [[1681년]]까지 정극장은 아버지 정경의 대리청정을 맡아 진영화와 함께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1680년]] 장인인 진영화가 죽고, 1681년 3월 17일, 정경이 승하하자 이복동생 [[정극상]](鄭克塽)의 장인이었던 풍석범(馮錫範)을 중심으로 한 정극장 반대 세력이 그를 제거할 음모를 꾸며, 정성공의 아내이자 정극장, 정극상의 할머니였던 왕대비 동씨(董氏) 앞에서 정극장을 모함하여 그를 죽여도 좋다는 승인을 받아낸 뒤 동씨가 부르는 것처럼 꾸며 정극장을 불러내어 동녕 승천부(東寧 承天府)에서 죽였다.[* 이를 '''동녕의 변'''(東寧之變)이라고 부른다. ] 또한, 당시 임신중이었던 정극장의 아내 진씨 부인도 [[순장]]이라는 명분으로 남편의 무덤에 생매장을 시켜버렸다. 이로써 풍석범은 왕대비 동씨와 함께, 허수아비 왕 정극상을 내세워 정권을 획득했다. 하지만 폭정을 일삼으며 백성들의 원성을 샀고, 정성공의 옛 부하였던 청나라의 수사제독 [[시랑(청나라)|시랑]](施琅)의 공격을 버티지 못해 결국 [[1683년]] [[펑후해전]]에서 패배하여 청 성조 [[강희제]]에게 항복함으로써 동녕 왕국을 멸망의 길로 이끌었다. 하지만 정극장도 암살당할 때 17세에 불과했으니, 그가 죽지 않았어도 대세를 바꿀 순 없었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