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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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鄭克𡒉[1] 혹은 鄭克藏, 1664년~1681년 3월 20일
대만 동녕 왕국(명정시기)의 제2대 국왕인 정경(鄭經)의 맏아들이었으며, 정경의 후궁 소랑(昭嫏)이 낳은 서자였다.
2. 생애[편집]
사명주(思明洲)[2] 에서 태어났으며, 비록 서출이었지만 할아버지 정성공(鄭成功)과 같은 호방함을 지녔었다. 동녕 왕국에서 국정을 책임지고 있었던 동녕총제(東寧總制) 진영화(陳永華)의 딸과 결혼하여, 장인의 도움으로 정경의 승인을 받아 1679년 감국(監國)이 되었다. 당시 정경은 삼번의 난에 가담하여 삼번을 지원하느라고 정치에 손 쓸 틈이 없었고, 때문에 이때부터 1681년까지 정극장은 아버지 정경의 대리청정을 맡아 진영화와 함께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1680년 장인인 진영화가 죽고, 1681년 3월 17일, 정경이 승하하자 이복동생 정극상(鄭克塽)의 장인이었던 풍석범(馮錫範)을 중심으로 한 정극장 반대 세력이 그를 제거할 음모를 꾸며, 정성공의 아내이자 정극장, 정극상의 할머니였던 왕대비 동씨(董氏) 앞에서 정극장을 모함하여 그를 죽여도 좋다는 승인을 받아낸 뒤 동씨가 부르는 것처럼 꾸며 정극장을 불러내어 동녕 승천부(東寧 承天府)에서 죽였다.[3] 또한, 당시 임신중이었던 정극장의 아내 진씨 부인도 순장이라는 명분으로 남편의 무덤에 생매장을 시켜버렸다.
이로써 풍석범은 왕대비 동씨와 함께, 허수아비 왕 정극상을 내세워 정권을 획득했다. 하지만 폭정을 일삼으며 백성들의 원성을 샀고, 정성공의 옛 부하였던 청나라의 수사제독 시랑(施琅)의 공격을 버티지 못해 결국 1683년 펑후해전에서 패배하여 청 성조 강희제에게 항복함으로써 동녕 왕국을 멸망의 길로 이끌었다. 하지만 정극장도 암살당할 때 17세에 불과했으니, 그가 죽지 않았어도 대세를 바꿀 순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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