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저우산시 (문단 편집) == 역사 == [[파일:보계사 중국 1.png|width=500]] 916년에 창건된 관음 사찰 보제사 (普济禅寺) 고대에는 닝보 (영파)에서 바다와 합류하는 용강 (甬江) 하구 동쪽에 있다 하여 용동 (甬東), 혹은 바다 한 가운데에 있다 하여 해중주 (海中洲)라 불렸다. 진한 대에부터는 닝보에 설치된 회계군 구장현 (句章縣)에 속하였다. [[동진]] 시기 [[손은(동진)|손은]]의 반란 시에 그 거점 중 하나였다. [[당나라]] 대인 738년에 처음으로 경내 옹산에서 비롯된 '''옹산현 (翁山縣)'''을 설치하였다. 명주 (明州)에 속하였고, 5리의 성벽이 세워졌다. 다만 771년 보승 (寶勝) 연호와 함께 칭제한 원조 (袁晁)의 반란으로 폐현되었고, 다시 구장현 관할이 되었다. 당대에 주산 군도는 관음 신앙의 중심이 되었고, 출항을 앞둔 선원들이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였다. 9세기 중반 일본 임제종의 창시자인 승려 혜악 (慧鍔)이 신라초에서 배가 걸리자 관음 보살께 기도를 올려 구조되었다는 설화가 있다. [[송나라]] 시기 해상 실크로드가 활성화되며 거점으로써 그 중요성이 부각되었고, [[왕안석]]의 건의로 재차 현을 두며 '국가를 번창하게 한다'는 뜻인 '''창국현 (昌國縣)'''이라 명명하였다. 이를 기념하여 류황도 (六橫島) 태평묘에는 왕안석 조각상이 있다. 1123년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신 서긍 역시 주산 군도를 거쳐 한반도로 향하였다. 원대인 1278년에는 [[원나라의 일본 원정]]의 준비를 위해 조선소가 설치되며 창국주 (昌國州)로 승격되었다. 2년 후 현으로 돌아갔으나 1290년 재차 창국주가 되었다. 1319년 원 조정의 허가 하에 강소 지방을 유람한 고려 [[충선왕]]이 [[이제현]]을 대동하고 이곳의 보타산을 찾아 글을 지었다. 이때 중국의 화공 진감여 (陳鑑如)가 그린 이제현의 초상은 국보 110호이다. [[명나라]] 수립 후 1369년 다시 창국현으로 격하되었고 1379년 성벽을 복구하였다. 다만 1386년 [[왜구]]에 대응한 해금정책의 일환으로 현이 폐지되어 일창국향 (一昌國鄉)으로 격하되어 영파의 정해현 (定海縣)에 속했다. 1387년에는 공도정책으로 섬 주민들을 내륙으로 소개시켰다. 빈 섬은 절강 상인들과 [[포르투갈]] 인들의 상관이 세워졌다. 그러던 1548년 절강순무 주환 (朱紈)이 병력을 파견해 불도섬 (佛渡岛) 상서항 (双屿港)의 포르투갈 성채를 공격하였다. 명나라 군대가 돌과 나무로 항구를 막고 성을 불태우자 수백의 포르투갈 인들은 모두 죽거나 해상 도피하였다. 1554년 왜구가 성을 점령하고 약탈하며 재차 쇠퇴하였다. 1651년 [[청나라]] 군대가 섬을 점령, 성벽을 허물었다. [[파일:강희제 중국 글자.jpg]] [[강희제]]의 친필인 정해산 현판 청대에도 이어지던 해금 정책은 1683년 [[강희제]]가 [[동녕 왕국]]을 멸하고 [[대만]]을 정복한 후 풀렸다. 이로써 주산 군도의 인구는 증가하였고, 1687년 6월 재차 현이 설치되었다. 청조는 본래 영파에 있던 '''정해현 (定海縣)'''이라 명명하였고, 기존 정해현은 전해현으로 개칭되었다. 18세기 들어 영국이 홍모관 (紅毛館)이란 상관을 세워 무역 거점으로 삼기도 하였다. 다만 1760년 청조가 모든 대외 무역을 [[광저우]]의 공행으로 일원화시키자 철수하였고, 그후 청나라의 군사 기지가 되었다. 1793년 매카트니 사절단의 요구 사항 중 하나는 저우산의 요새화되지 않은 섬에 유럽인의 왕래와 거주, 정박, 창고 설립을 허가해달라는 것이었다. [[홍콩]]이 한적한 어촌일 무렵 저우산은 이미 16세기부터 열강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