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대종사 (문단 편집) == 줄거리 ==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1904337|링크 참조]] [[http://magazine2.movie.daum.net/movie/5639|다음 리뷰]] - 1936년 - 영화는 [[엽문]]이 비오는 [[포산시]]의 한 거리에서 떼거리로 몰려오는 한 패와 싸우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어지는 금루 내부의 대화장면에서 엽문은 쿵푸에는 오직 가로(패배자), 세로(승리자)만이 존재할 뿐이며 세로(승리자)만이 말할 수 있는 자격을 갖는다고 설명한다. 빗속에서 엽문은 십수명에 달하는 상대를 영춘권으로 물리치고 모두가 바닥에 쓰러진 가운데(가로=패배자) 홀로 서있는(세로=승리자) 모습을 보여준다. (삭제분) 사실 이 무리들은 궁우전의 사람들이었다. 궁우전이 엽문의 실력을 알아보기 위해 꾸민 일이었던 것. 마삼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돌리고 궁우전은 엽문이 진화순의 내제자라는 사실을 듣게 된다. 때는 1936년, 엽문은 40대에 접어들고 있었고, 일본의 [[중일전쟁|중국침략]]은 노골화되고 있었다. 광주(廣州)의 금루(金樓)는 표면적으로는 기루에 속하지만 무술의 고수들이 모이는 곳이기도 했다. 북권에 속하는 팔괘장의 종사인 궁우전은 중화무술협회를 구성했고 곧 은퇴하려고 한다. 그는 자신의 뒤를 이어 북파의 대표자로 자신이 거두어 키운 마삼을 지명했다. 마삼은 금루의 실내를 박살내며 남파의 고수 4명을 한꺼번에 제압하는 등 범상치 않은 실력을 갖췄음을 보여준다. 체면을 구긴 남파의 무술인들은 엽문에게 남파를 대표하여 줄 것을 요청하고 뒤이어 일종의 테스트 형식으로 남파의 팔괘장, 형의권, 홍가권 고수들은 엽문에게 도전하지만 엽문은 이들을 모두 이기고 엽문은 남파의 대표자가 된다. 각 고수들은 대결과 함께 자신의 무술의 특징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주는데 이는 후에 엽문이 해당 무술들의 영향을 받아 실전에서 활용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마지막 절차로 궁우전은 엽문에게 자신의 손에 든 전병을 부숴보라며 일종의 테스트를 하고, 엽문은 궁우전을 직접 타격은 하지 않고 투로를 바꿔가면서 결국 궁우전의 손에 든 전병을 부순다. 이를 통해 엽문의 실력을 인정하게 된 궁우전은 엽문을 남파의 대표자로 인정하고 자신의 모든 명성을 물려준 뒤 고향으로 떠난다. 궁우전은 고향으로 떠나기 전 딸 궁이에게 다음날 열리는 엽문의 남파 대표자 취임을 축하하는 연회에 참석하라고 하지만 궁이는 생전에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은 아버지가 이런 대련 같지 않은 대련으로 패배했다는 사실에 수긍하지 못하고 정식으로 엽문에게 대결을 요청한다. 대결을 수락한 엽문은 대결에 앞서 자신이 금루 내의 어떠한 물건이든 손상시키게 된다면 자신의 패배임을 인정하겠다고 선언한다. 대결도중 엽문과 궁이는 똑같이 영춘권 방수(幇手)의 자세를 취하게 되는데 이는 궁이가 영춘권에 대한 사전지식이 있음을 암시한다. 이를 본 엽문은 팔괘장의 자세를 취함으로써 본인 또한 팔괘장에 대한 존중과 이에 대한 대비가 되어 있음을 드러낸다. 대결은 엽문의 우위로 흘러가는 듯 했으나 계단 아래로 추락하는 궁이를 끌어 올리는 과정에서 엽문은 금루의 계단을 미세하게나마 갈라지게 만들고 결국 이 대결은 엽문의 패배로 끝난다. 대결 후 궁이는 엽문에게 64수를 보여준 것은 엽문으로 하여금 언제나 더 뛰어난 실력자가 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으며, 그가 북방으로 찾아오길 기다리겠다고 말하며 헤어진다. 궁이와의 대결 후 엽문은 궁이와 서신을 주고 받는다. 서신의 내용은 일견 풍경을 묘사하는 것 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상대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낸다. (삭제분) 엽문은 결국 궁이를 만나기 위해 북방으로 향한다. 짧은 만남은 간단한 무술 대련으로 끝나버리고 엽문 vs 마삼의 기차역 결투는 통으로 편집되어버렸다. (영화판) 집으로 돌아오면서 아내 장영성에게 모피 코트를 선물한다. 장영성은 남편의 심경 변화를 눈치채고 모피 코트를 받으며 '불산이 추운 곳인가요?'라고 반문(불산은 중국 남방도시로 겨울에도 눈이 내리지 않는 사실상 아열대에 가까운 따뜻한 기후를 보이는 지역이다)하지만 엽문은 대답대신 가족사진을 촬영하자고 한다. 가족사진을 촬영하는 장면에서 빈 의자가 하나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촬영된 사진에서 빈 의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궁이를 마음 한켠에 두고 있는 엽문의 심리를 드러내는 장면. -1937년- 한편 중국을 야금야금 침략하던 일본은 본격적으로 마각을 드러내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했고, 불산은 일본군에 점령되었다. 일본은 엽문을 회유하지만 엽문은 일본과의 협력을 거부하고, 모든 재산을 일본에게 몰수당한다. 엽문은 가난 속에서 두 딸을 잃어버린다. 극심한 생활고에 엽문은 목인장마저 땔감으로 처분해버리고 전쟁의 여파로 동북지역에 갈 수 없게 된 엽문은 아내에게 선물했던 모피 코트도 팔아버린다. 모피 코트의 단추를 하나 떼어 간직함으로써 엽문은 단추를 궁이와의 추억을 기억하는 매개체로 삼게 된다. -1938년- 엽문의 대저택은 일제에게 징발당하고 엽문과 가족은 거리로 나앉게 된다. 금루(金樓) 또한 일제에게 넘어가버리고 대기근으로 엽문의 두 딸은 사망한다. 남방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일선천이 피를 흘리며 앉아있다. 기차내에서 일본군의 검문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일선천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반대편에 앉아있던 궁이에게 면도칼을 보인다. 즉 일본군에게 자신을 드러내면 죽이겠다는 것. 그러나 궁이는 놀랍게도 일선천의 옆자리로 이동하여 자신의 코트로 상처부위를 가려주며 연인 행세를 한다. 일본군은 그 둘에게 신분증을 제시하라고 요구하나 다른 사람의 소동으로 인해 신분증 검사를 하지 못한다. 기차가 도착하고 일선천은 코트를 다시 그녀에게 덮어주고 떠난다. -1940년- 전쟁은 끝났지만 가난해진 엽문은 1949년 홍콩으로 와서 영춘권 도장을 연다. 당시 홍콩은 여러 무술을 배운 권법가들이 망명해 오고 있었고 엽문은 이들과의 대결에서 계속 승리하면서 명성을 얻어간다. 하지만 1951년 중공정부는 홍콩-광동성 국경을 폐쇄하여 엽문은 더이상 고향으로 가지 못하고, 아내와 아들과도 헤어져 이산가족이 되었다. 한편 엽문은 궁이가 홍콩에서 개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궁이를 찾아가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를 알게 된다. 10년전 일본의 괴뢰정부 [[만주국]] 정부는 궁우전에게 협력을 요구하지만 궁우전은 거부한다. 하지만 북파의 대표인으로 삼은 궁우전의 제자 마삼은 일본에 부역한다. 궁우전은 마삼의 이런 매국노짓에 분노하여 찾아온 마삼과 대결을 하다 사망하게 된다. 궁이는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 아미타불에 앞으로 절대 결혼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고, [[심양|봉천]]의 기차역에서 마삼과 대결하게 된다. 결국 궁이는 마삼과의 무술 대결에서 이기지만, 그 결과로 큰 내상을 입게 되었다. 일본이 물러나자 궁이도 북중국을 떠나 홍콩으로 내려와 개업한다. 홍콩에서 재회한 엽문과 궁이는 애뜻한 감정을 느끼지만 궁이는 이미 부처님께 평생 독신하겠다고 서약을 한 과거가 있어 엽문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게다가 마삼과의 대결에서 입은 내상 때문에 [[아편]]을 남용하다가 의사일도 그만두고 아편중독자가 되었다. 궁이는 결국 1953년 아편중독으로 인해 사망한다. 한편 엽문은 영춘권을 적극적으로 대중화시켰다. 영춘권은 이제 소수의 무술가 사이에서 전해지는 비전이 아니라 대중적인 무술로 승화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