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종만 (문단 편집) == 생애 == 1885년 1월 14일, 경상도 [[울산광역시|울산도호부]] 외현면(현 [[울산광역시]] [[남구(울산)|남구]]) 용잠동[[https://news.joins.com/article/3918187|#]]에서 7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파일:external/file1.bobaedream.co.kr/AAg58abf43ef1973.jpg|#]]] 이종만은 일제 강점기 '금광왕'으로 불렸다. 금광 개발에 성공하여 부를 축적한 뒤 일부를 처분한 돈으로 노동자들과 농민들을 위한 광산, 학교, 공동농장 등의 '대동기업체'[* 전봉관 교수의 럭키경성에서는 이를 '대동콘체른'이라고 일컫었다.]를 운영했다. 해방 이후 남한에서 조선산업건설협의회 위원장으로 일하며 독립신보를 경영했으나 강제폐간당한 후 자진 [[월북]]하여 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1937년 6월 당시 평안북도 초산군, 자성군, 태천군, 강계군, 함경남도 정평군, 영흥군, 단천군, 회령군, 무산군, 갑산군, 경상북도 의성군, 경상남도 울산군 소재 광산 등 전체 면적 760,000,000평에 달하는 750광구를 소유할 정도로 대지주였으며, [[정치가]]로서 노예도 많이 보유했다. 1937년 6월 6일 대동광업(大同鑛業)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사장으로 취임했으며 같은 날에 대동광산중앙조합(大同鑛山中央組合)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49년 6월, 조국전선 중앙위원 및 상무위원에 선출되었으며 6.25 중에는 외국으로 피난을 갔다. 종전 이후 귀국, 1954년에 과거 광산개발사업을 했던 경험으로 광업부 고문에 임명되어 자원개발사업을 했다. 1957년 9월,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이후 조국전선 의장까지 올라갔으며 1977년 1월 19일에 사망했다. 조국전선은 부고를 발표, "선생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교시와 그 구현인 조선로동당의 로선과 정책을 높이 받들고 사회주의건설을 다그치며 조국의 자주적평화통일위업을 앞당기기 위하여 자기의 모든 지혜와 정력을 다 바쳐 투쟁하였다."라고 짤막하게 추모했다. 이후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는데 거물급 자본가 중에선 유일하다. 1990년, [[조국통일상]]이 추서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