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용일 (문단 편집) == 생애 == 1931년 4월 17일 [[경기도]] [[경성부]](現 [[서울특별시]])에서 [[경성고무]] 창업주였던 이만수(李晩秀)의 넷째로 태어나 [[금수저|꽤나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후일 매부가 되는 전 야구 국가대표 선수였던 유복룡(劉福龍)[* [[선린인터넷고등학교 야구부|선린상업학교]]-[[경성고등상업학교]] 출신으로 발이 빨라 야구 대표팀에서 주로 중견수 겸 1,2번타자를 도맡았다.]이 바로 아래집에 살아서 매일 캐치볼 하며 야구를 접했다고 한다. 이후 [[군산고등학교|군산중학교]]를 다니다가 2학년 때 [[경동고등학교|서울 경동중학교]]에 전학을 갔는데, 그 해에 해방이 되었고, 그때 유복룡이 학교에 제안하여 [[경동고등학교 야구부|경동중학교 야구부]]를 창설하고 초대 감독에 오른다. 당연히 이용일도 경동중학교 야구부의 일원으로 활약했고 졸업 후인 1950년에는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영학과|상학과]](50학번)에 진학해 상과대학 야구부에 가입하여 야구선수 이력을 이어 나갔다고 한다. 1950년 6월 개최된 전국학도호국단 체육대회에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야구부 소속으로 출전하였다. 그러다가 1950년 6월 25일 치러질 예정이었던 전국학도호국단 체육대회 준결승전을 앞두고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대회가 중지되었고, 이용일은 1950년 10월에 군에 입대, 특과장교로 6년간 군복무를 했고, 1956년 3월에 [[제1야전군사령부]]에서 육군 [[소령]]으로 예편했다. 6.25 전쟁 말기인 1953년 창단된 [[상무 야구단|육군 야구단]]의 창단 멤버가 되었고, 한국전쟁이 끝난 후 육군 야구단 감독으로 재임하기도 했는데 이때 항상 공군에게 깨져서 당시 정훈감이었던 김창정 장군과 [[양국진]] 육군참모차장에게 엄청 깨졌다고 한다.[* 당시 육군과 공군 간에 라이벌 의식이 있었던데다, 공군은 육군보다 규모가 작았다는 게 문제였다. 이용일이 말하길 당시 육군은 순수하게 사병들 중에서 야구 좀 한다는 사람들만 모아서 꾸린 반면, 공군은 입대부터 선수출신 등 야구 잘하는 사람들만 별도로 스카웃하여 만든 팀이어서 상대가 안 되었다고. 다만, 당시 육군에도 [[박현식]], [[장태영]], [[김양중(야구)|김양중]] 같은 당대의 실업야구 슈퍼스타들이 소속되어 있었다.] 군문을 나온 후 가업인 경성고무의 전무로 재직하던 이용일은 전역 6개월 만에 살이 89kg까지 불어나자 이러면 안되겠다 싶어서 사내 야구 동아리를 만들어 군산중학교, 군산고등학교의 운동장에서 야구를 시작했는데 당시 군산에 불량 청소년들이 많아서 '이들을 교화시키는 데 야구를 활용하면 어떨까?' 라는 아이디어로 야구부 창단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1962년 2월에 군산국민학교, 중앙국민학교, 남국민학교, 금광국민학교등 4개 국민학교 야구부가 창단했고 이들이 졸업한 후 지역 야구팀이 없어 [[휘문고등학교 야구부]]나 [[서울 청원고등학교 야구부|동대문상업고등학교 야구부]]로 진학하는 모습을 보고 군산에도 고교야구부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 1968년에 [[군산상일고등학교 야구부|군산상업고등학교 야구부]]를 창단하게 된다. || [[파일:external/www.jjan.kr/347522_77211_1406.jpg|width=100%]] || || {{{#fff ▲ 맨 뒷줄 오른쪽 네번째가 이용일}}} || 1978년에 경성고무를 [[SK그룹|선경그룹]]에 매각한후, [[대한야구협회]] 회장이었던 [[김종락]][* 정치인 [[김종필]]의 친형]의 부탁으로 대한야구협회, 한국실업연맹, 한국대학연맹, 한국고교연맹의 통합을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1979년 2월에 현재의 [[대한야구협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후 대한야구협회 전무이사로 재직하면서 유소년 야구 지원, 유망주 미국 유학[* 이 때 혜택을 받은 이가 바로 [[김응용]]. 1978년 이탈리아 세계선수권 대회 때 선수와 단장으로 만났는데 김응용이 선수단 경비를 낭비하지 않고 남은 금액은 돌려주는 모습에 선택했다고. 다만, 모종의 이유로 시기가 늦어져서 김응용은 1981년에 연수를 떠났고, 이후 대한야구협회에서 "더 이상 지원은 어렵다"라고 밝혀서 1년 만에 귀국하게 되었다.] 등 유망주 양성에 힘썼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