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엄 (문단 편집) === 4차 북벌과 탄핵, 이후의 삶 === 231년 4차 북벌의 노성전투에서 사마의를 격파하고 후방을 기습한 [[장합]]까지 물리친 제갈량은 높아진 기세를 이용해 위군을 무찌르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평이 자연재해로 물자수급 및 수송에 차질이 빚어지자 이를 이유로 물자를 보낼 수 없다고 통보했고, 적진에서 물자가 떨어질 것을 걱정한 제갈량은 부대를 물려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제갈량은 그야말로 눈물을 머금으며 퇴각하게 된다. 그리고 사마의는 퇴각하는 촉군의 뒤를 치려다 장합을 잃게 된다. 제갈량이 후퇴했다는 소식을 듣자 이평은 거짓으로 놀라며 "군량미는 아직 충분하거늘, 어찌하여 돌아옵니까?"라며 자기가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책임을 감추려고 했다. 또한 은폐를 위해 부하 [[잠술]]을 처형하려 했으며 유선에게는 '우리 군대가 거짓으로 퇴각한 것은 적을 유인하여 함께 싸우려고 하는 것입니다'라는 내용의 표를 올렸다. 하지만 제갈량이 이평과 주고받은 모든 편지가 공개되자, 이평이 자신의 책임을 감추기 위하여 거짓 보고를 한 것이 드러나게 되었고, 결국 유선 앞에서 엎드려 사죄할 수밖에 없었다. 제갈량을 비롯한 촉한의 신하들은 전부 이평의 막장짓에 분개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제갈량 주도하에 촉한의 신하들 대부분이 지위고하, 출신을 가리지 않고 단체로 군부의 실력자이기도 한 이평을 연명으로 탄핵하게 된다. 이에 결국 후주 유선은 이엄을 폐서인하고 재동에 유폐하며 그는 모든 관직과 명예를 잃고 서인으로 강등당해 재동군에 연금되는 비참한 처지가 되었다. 이 때 제갈량이 유선에게 올린 표문을 보면, 제갈량이 이평에게 느낀 배신감이 절절하게 묻어난다. 제갈량이 올린 상소문을 쉽게 풀이하자면, "한중지키라고 하니까 군 떼서 파주자사를 시켜달라고 떼쓰지 않나, 전쟁나니까 사마의처럼 개부시켜 달라고 하질 않나, 기회타서 지 잇속 챙기려는 거 내가 부하들한테 불만 들으면서도 감싸주었는데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혔다'''"고 한다. >선제께서 붕어하신 뒤로 (표기장군) 이평은 자기 집안만 생각하며 작은 은혜를 베풀기를 즐겨했고 자신의 명예와 안일만을 추구하였으며 나라의 일은 근심하지 않았습니다. > >신이 북벌할때 그의 군사가 한중을 지켜주기를 바랐건만 그는 온갖 어려움을 들어 한중으로 오지 않고 외려 다섯개 군을 차지하는 파주자사를 시켜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작년에 신이 서정할 때 이평에게 한중의 사무를 맡게 했으나 이평은 사마의 등은 관부를 설치하여 관리를 임명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 >이평은 천성이 비열하여 신이 출정할 때마다 신을 다그쳐 이득을 보려 했습니다. 그리하여 신은 이평의 아들 풍이 강주를 주관하도록 천거했고 그를 후하게 대우하여 군무를 완수토록 했습니다. 이평이 한중에 온 날에 신이 모든 사무를 그에게 위임하자 상하 군신들이 모두 이평을 너무 우대한다고 질책했습니다. > >바야흐로 큰 일의 성공과 실패가 결정되지 않았고, 한실이 쇠미해진 형편에서 이평을 질책하기보다는 그를 칭찬하는 것이 차라리 나은 줄로만 알았습니다. 이같이 신은 이평의 속셈이 다만 명예와 이득을 추구할 따름인 줄로 여겼사온데, 이평이 이처럼 본말을 전도할 줄은 진정 생각 밖이었습니다. 만약 이 일을 제때에 처리하지 않고 내버려둔다면 화를 빚어낼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가 신이 불민한 탓이오니 더 말씀을 올린다면 신의 잘못만 더 많아질 것입니다. >이평은 대신이 되어 과분한 총애를 받으면서도 충성을 다하여 보답할 생각을 하지 않고 근거도 없는 낭설을 지어내고 방자하게 굴었으며 본인에게 불리한 일은 하지 않고 상하를 미망에 빠지게 했습니다. 재판을 함에 있어 법조를 버리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간사한 일을 하도록 이끌었으며 감정은 저열하고 뜻은 광망해 마치 천지가 없는 듯 했습니다. 스스로가 계획했던 간사한 일이 드러나자 의심이 마침내 생겨 대군이 장차 올것이라는 것을 듣고서 병을 핑계대고 저현과 장현으로 돌아갔으며 군대가 다시 저현에 당도하니 돌연 강양으로 돌아가려 하였는데 이평의 참군인 호충이 간언하자 마침내 그만 두었습니다. 지금 찬탈한 도적들이 소멸되지 않았고 사직에 어려움이 많은데 국가의 대사는 오직 모두가 화합해야 이겨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포용하여 국가의 대사를 망쳐서는 안됩니다.(중략)...등과 더불어 의논하였는데 막바로 이평을 해임하고 그의 관록, 절전(節傳,한조 관리의 신분증), 인수, 부책(符策, 군주의 관리 임명 조서)을 없애며 작위와 봉지를 박탈해야 합니다." 이때 제갈량이 이엄을 해임하고 그의 관록, 절전, 인수, 부책 등을 없애 작위, 봉지 등을 박탈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상서대에 올린 공문에 적힌 이엄 탄핵에 참여한 인물들은 순서대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대략적인 당시 촉한군 내 서열 순위를 알 수 있다. 이엄전 주석에 언급된 관직 예들을 꼼꼼히 살펴보면 휘하에 별개 군을 통솔하는 XX장군(+XX중랑장)들만이 각종 군직(감군 이하 군직)을 行(대행,임시)의 형식으로 겸하고 그 이상(전군사, 사방장군)등의 각종 군직이나 관직에는 행직을 붙이지 않으며[* 예외가 유염인데 유염은 실질적인 권력이 없었음을 감안해야 한다.] 행(行)자가 붙는 관직과 같은 서열의 기본관직인 승상부 속관은 이를테면 위연이 북벌 초기에 받았던 승상사마-같은 범주라 원칙적으로 양자는 병렬 불가능-같이 다른 관직과 겸하는 예외적인 경우에 겸직을 표시하는 영(領)직의 형식으로 겸했음을 알 수 있다.(영 장사 수군장군 양의, 영 종사중랑 무략중랑장 번기) 참고로 오의가 맡았던 관중도독이나 위연이 맡았던 한중독 등의 한 지방을 도독하는 도독직은 적히지 않았다. * 행중군사 거기장군 도향후 신 [[유염]] * 사지절 전군사 정서대장군 령양주자사 남정후 신 [[위연]][* 여담으로 여기에 서명했다는 이유만으로 위연이 제갈량에게 협조적이었다는 헛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애당초 4차 북벌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장수 중 하나가 위연이라는 점을 감안했을때, 이엄이 이렇게 통수를 치지 않았다면 단지 위연이 사지절에서 끝날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은 위연 스스로가 잘 알았을 것이다. 위연의 불 같은 성격과 제갈량도 거리낌 없이 욕하는 인격 상 이미 이엄의 정치생명이 끝장난 상황에서 그걸 알고도 위연이 이엄에게 자비를 보여 줄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 * 전장군 도정후 신 [[원침]] * 좌장군 령형주자사 고양향후 신 [[오의(삼국지)|오의]] * 독전부 우장군 현향후 신 [[고상]] * 독후부 후장군 안락정후 신 [[오반(삼국지)|오반]] * 령장사 수군장군 신 [[양의]] * 독좌부 행중감군 양무장군 신 [[등지]] * 행전감군 정남장군 신 [[유파#s-2|유파]] * 행중호군 편장군 신 [[비의]] * 행전호군 편장군 한성정후 신 [[허윤]] * 행좌호군 독신중랑장 신 [[정함]] * 행우호군 편장군 신 [[유민(삼국지)|유민]] * 행(후)호군 정남장군(정서장군) 당양정후 신 [[강유]] * 행중전군 토로장군 신 [[상관옹]] * 행중참군 소무중랑장 신 [[호제]] * 행참군 건의장군 신 [[염안]] * 행참군 편장군 신 [[찬습]] * 행참군 비장군 신 [[두의]] * 행참군 무략중랑장 신 [[두기#s-3|두기]] * 행참군 수융도위 신 [[성발]] * 령종사중랑 무략중랑장 신 [[번기]] 실제 여름부터 가을까지 계속 장마비가 쏟아졌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자연재해가 없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실제 이평은 그 이전에 일보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에 급급했던 모습을 보였던 게 사실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삼국지연의]]에서 더 극대화되어 이평의 수하인 [[구안#s-2|구안]]이란 인물이 물자수송에 태만했다가 제갈량에게 곤장맞고 [[위(삼국시대)|위나라]]로 귀순해서 제갈량을 모함하는 가상의 장면의 빌미가 되었다. 이 당시 제갈량은 드물게 분노를 폭발시켰다. 이때 이루어진 4차 북벌은 상규에서 곽회와 비요, 노성에서 사마의와 장합을 격파하는 등, 전술적으로 촉군의 연전연승이었으며 이로 인해 기근으로 고생하던 옹주 현지의 인심이 크게 뒤흔들리는 등 촉의 우세가 점쳐지는 상황이었기에, 어이없는 이유로 퇴각한 데 대한 분노가 그만큼 컸던 것이리라. 여기에, 제갈량이 북벌하기에 앞서 이엄으로 하여금 군량 수송임무를 맡기자, 한중의 일을 총괄하게 하였는데 사실상 제갈량이 한중에 있던 자신의 부를 이엄에게 양도한다는 뜻과 같았다. 이것은 제갈량이 자신의 권력까지 포기한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는 일이어서, 당시 제갈량 휘하의 막료들은 모두 한결같이 이엄에게 너무 후하게 대한다며 이를 반대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갈량은 굳이 이엄에게 후방을 맡겼다. 자신과 함께 선제 유비의 탁고유신이었으니 믿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을 터. 이엄은 그러나 세상의 도리마저도 그렇게 어그러뜨려 버린다. 이때 제갈량이 받은 충격은 꽤 컸던 듯 하다. 촉은 전통적으로 인화(人和)를 가장 중시하는 나라였거늘, 군량과 병력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선전하여 성취의 직전까지 간 상태에서 바로 그 '인화'가 붕괴된 것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을 터. 그는 가장 아끼는 막료들인 승상장사 [[장완]]과 시중 [[동윤]]에게 편지를 써서 이러한 심기를 간접적으로 드러내보인다. >[[진진(삼국지)|진효기]]가 이전에 오나라로 갔을 때, 나에게 정방(이엄)은 뱃속에 비늘 갑옷이 있어 마을 사람들 모두 접근할 수 없는 사람으로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나는 비늘 갑옷이 있는 사람은 단지 그것에 부딪치지 않으면 될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의도치 않았음에도 다시 소진과 장의처럼 궤변을 늘어놓는 일이 또 돌연 뜻하지 않게 나타났으니, 효기에게 이것을 알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화양국지]]에 따르면 본시, 요립과 이평은 제갈량이 폐하였는데, 세월이 지나는 것을 즐거워하고 있었으니, 이는 제갈량이 복권시켜줄 것으로 늘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단순히 자신감 문제만은 아니고 촉의 인재 부족이 심각해서 그 [[양의]]조차 재기용할 정도로 인재를 끌어다 쓴 것이 제갈량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엄의 병크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 역시 제갈량이고, 그가 촉에서 지닌 권위를 생각해보면 일단 제갈량이 용서하겠다고 하면 복직에는 별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죽으면서 용서받을 기회는 사라져 버렸고, 제갈량의 후임인 장완, 비의, 동윤 등도 제갈량이 끝까지 용서하지 않은 그를 재기용하는 것은 제갈량의 의지를 거스르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본인도 잘못했다고 느낀 게 있었는지 이후 이평은 반성하면서 제갈량이 다시 자신을 쓸 날을 기다렸지만, 제갈량은 이평을 다시 부르기 전에 [[오장원]]에서 숨을 거두었고 이러한 소식을 들은 이평은 결국 분노하다가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엄의 후사는 그의 아들 [[이풍#s-4|이풍]]이 이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이엄이 잘리고 그의 아들 이풍이 아버지의 직위를 물려받아 그 역할을 계속하게 했다는 언급이 있지만, 실제 기록으로 보면 이풍은 강주도독으로 있다가 병권을 박탈당하고 종사중랑으로 임명되었다. 어쨌든 그 동안 부여되었던 실질적인 권한을 빼앗긴 쪽에 가깝다. 이풍의 관직은 주제태수에까지 이르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