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엄 (문단 편집) == 생애 == 원래 [[유표]] 밑에 있었던 [[나름]]대로 실력 있고 신임을 받던 인물로 기록상으로는 중앙의 행정직보다는 지방관으로 일한 경력이 많다. 그러다가 유표 사후에 [[형주]]가 [[조조]]의 손에 넘어가자 자귀현을 다스리고 있던 이엄은 익주의 [[유장(삼국지)|유장]]에게로 귀순하였다.[* 이상하게 삼국지 관련 매체에선 이엄을 익주 출신 호족으로 착각하고 일부러 제갈량과 대립시키는 묘사가 많은데, 실제로 정사상 촉한에 이런 대립구도나 파벌이 있지도 않았거니와 이엄은 그 주어진 권한이 결코 작은 게 아님에도 1인자 제갈량에게 항상 권력 좀 더 달라고 땡깡에 읍소하는 권력욕에 찬 2인자 처지다. 이엄은 본디 출신도 익주가 아닌 형주로서, 익주엔 그냥 굴러들어온 돌이었다. 즉, 근본적으로는 이엄은 그냥 형주 출신에 익주에서도 재간으로 인하여 칭찬받아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은 정도고 이엄 탄핵 때는 형주, 익주 출신 할 거 없이 전부 이엄을 탄핵했다.] 유장 역시 이엄의 능력을 인정하여 성도의 현령 등 여러 지방관의 직위를 부여하며 중용하였고,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유비]]가 유장을 돕기 위해 익주로 들어왔다가 서로 관계가 악화되어 대립하던 시기에는 병사를 주어 면죽을 지키도록 명령하였다. 하지만 유장의 기대와는 달리, 이엄은 유비와 싸우는 대신 그대로 '''병사들을 이끌고 항복하였다.''' 연의에서는 [[황충]]과 호각으로 겨루다가 제갈량의 함정에 빠져 항복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판본에 따라서는 후자로 묘사되는 경우도 있다. 익주에서도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인물인 만큼 유비 역시 익주를 평정한 후에 이엄을 건위태수, 흥업장군으로 임명하면서 중용하였다. 이후 조조와 한중을 놓고 대립하고 있던 유비를 대신하여 익주 내에서 도적이 준동하거나, 이민족과 결탁한 지방 반란이 있을 때 진압하는 역할을 주로 수행하였다. 대신에 전선에 출전한 경력은 적은데 그렇다고 해서 그 능력이 낮다고 보기는 어렵다. 후에 제갈량과 [[강유]]의 북벌에서 활약하는 [[장억]] 등의 명장들도 초기에는 이민족의 반란 진압 등의 일들을 많이 맡았다. 법률인 [[촉과]] 제정에는 그의 역할도 있었다. 계한보신찬에 따르면 이엄은 천성이 자존심이 강해 호군 [[보광]](輔匡)과 나이와 지위가 서로 비슷했지만, 이엄은 그들과 교류하지 않았다. 오로지 형주 강하군 맹현 출신인 [[비관]]만이 이엄과 마치 동년배인 양 친밀하게 왕래했다고 한다. 이를 보면 어지간히 사교성이 없었던 듯 하다. 매체에서 익주파의 중심인물로 나오는 것에 비해 실제로는 [[그런거 없다]] 인 셈. 이엄은 본디 형주 사람이고 적벽대전을 계기로 익주에 들어선 것이라 정확하게 무슨 파벌로 구분 짓기도 애매하다. 그나마 친하게 지냈다는 비관은 형주사람으로 유장의 친인척으로 익주에 들어 온 거라서 익주 토박이도 아니었다. 애당초 촉한의 지역감정, 갈등 운운은 사서에서 구체적인 증거를 찾을 수가 없다. 통치 체제가 미비하던 유장 시절까지 익주가 분열되어 있었던 것은 맞지만 유비와 제갈량이 국가를 정비한 이후 반란은 있었을지언정 신하들이 파벌로 갈라져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어쨌거나 한중전 당시 도적 마진, 고승 등이 수만 명을 모아 자중현을 넘어 성도로 진격하려했는데, 그 당시 유비는 한중에 있었고, 따라서 모든 정규군들이 한중으로 가 있었다. 정규군을 징발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엄이 지키던 군의 '''병사 5천명 만으로 반란군 수 만명을 정벌했다.''' 정벌한 도적과 반란군들이 흩어졌는데, 이 것으로도 부족했는지 흩어져 다시 모여 세력이 거대해진 도적들을 다시 정벌하는데 성공했다. 동시에 월수 만족이 병사를 일으켜 신도현을 포위, 공격했는데 마진을 토벌함과 동시에 기병들을 '''직접''' 인솔해서 모두 정벌하고 성을 구원했다. 이릉전 이후 유비가 백제성에 머무르던 시절 이엄을 불러 상서령으로 임명하였고, 유비가 숨을 거두던 시기에는 제갈량을 도와 함께 어린 [[유선(삼국지)#s-1|유선]]을 잘 보좌하라는 탁고를 주었다. 이엄은 중도호가 되었고 통내외군사로서 영안에 남아 주둔했다. 내외가 동시에 들어갔으니 이 경우는 유비 사후를 대비해서 영안으로 집결된 내군과 외군 모두를 통솔케 했다라고 봐야한다고 한다. 이엄은 유비에게 항복한 세력의 상징적 존재였고 군사적 재능도 뛰어나 제갈량을 보좌할 수 있었으며 행정능력에도 재능이 있었다. 그렇기에 그가 제갈량을 보좌하는 탁고대신으로 선택된 것으로 보인다. 이때부터 촉한 세력의 '''2인자'''로서의 권위를 가졌고, 226년에는 가절, 광록훈으로서 직함을 받았다. 거기에 전장군으로 승진하였는데, 전장군은 다름아닌 그 '[[관우]]'가 가졌던 직함이다. 그 중호군 조운마저도 사망 전까지 사방장군이 절대 되지 못했을 정도였기에 이엄이 전장군이 된 것은 촉한에서는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후 이엄은 계속 영안에서 머무르면서 오나라 방면의 경비를 책임지고 있었다. 그리고 북벌을 앞두고는 가장 믿을 수 있는 인물이라면서 후방을 맡기기 위해 강주로 이동시켰을 정도로 제갈량의 신임을 받았다. 강주는 동쪽으로 영안, 북쪽으로는 성도, 한수(가맹), 부, 한중까지 이를수 있는 중요 지점이다. 유비는 자신의 병사들을 [[조운]]에게 맡긴 상황에서, 죽으면서 이엄에게 전체 군권을 맡겼다. 이는 오정벌에 나선 군대, 유비가 거느린 촉의 총 병권 중 온전한 후방 병력은 조운이 온전히 가지고 있었다는 것으로 이엄이 중호군/통내외군사로 조운보다 위에 있으나, 영안은 유비의 패잔병과 조운의 강주에 남은 병사들이 주둔하고 있었던 걸 의미한다. 제갈량은 남중 정벌을 위해, 조운을 중호군으로 임명하여 군권을 분배했고 정남장군으로 임명했다. 또 북벌할때 제갈량은 조운을 데려가고 이엄은 강주로 옮기고 이엄이 있던 영안에는 호군 [[진도(삼국지)|진도]]를 남겨서 이엄에게 통솔하도록 했다. 조운이 이동하고 이엄에게 중요한 요충지인 강주를 맡겼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이엄의 경우엔 제갈량과 같이 탁고를 받았고 그 권한 역시 만만치 않았지만 기본적으로는 제갈량과 동등한 탁고를 받은 것이 아니라 제갈량을 보조하여 유선을 보필하라는 탁고를 받은 것이었다. 따라서 제갈량도 불순한 행동을 하는 이엄을 함부로 쳐내긴 어려웠으나 그렇다고 이엄이 감히 제갈량의 용인없이 그의 권한을 침범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같은 탁고대신이라도 격에서 이미 제갈량이 한참 앞서 있었던 것이다. 제갈량이 4차북벌에서 자신의 부를 이엄에게 맡긴적이 있었을때 제갈량 휘하 관료들이 반발한것도 여기서 기인하는 것이다. [[맹달]]을 회유할 때도 제갈량과 같이 참여했는데 이엄이 "나는 공명(제갈량)과 함께 선제 유비의 부탁을 받아 걱정이 깊고 책임도 막중합니다. 좋은 동반자를 얻고 싶습니다."라고 맹달에게 편지를 보내자 제갈량이 "일을 처리하는 것이 마치 물 흐르듯 하며, 취해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결정할 때 주저함이 없는 것이 정방(이엄의 자)의 성격입니다." 라고 그를 칭찬하는 편지를 보낼 정도로 제갈량은 이엄을 신뢰하였다. 그리고 위나라의 [[조진#s-1]]이 공세를 펼쳤을 때는, 한중으로 이동하여 이를 격퇴하는 역을 맡기도 하였다. 이후 230년, 대장군과 동급인 표기장군으로 승진하여 황제 유선과 승상 제갈량을 제외하면 촉한 내에서 최고의 권위를 가졌고, 아들 이풍은 강주 도독이 되어 강주의 군대를 통솔하는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제갈량은 북벌을 앞두고 이평[* 이 시점부터 이엄이 이평으로 개명했다.]에게 중도호의 신분으로 승상부의 일을 맡도록 하였고, 동시에 북벌 부대에 물자를 보급해주는 임무를 부여했다. 하지만 이 사이에 이평은 몇 차례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이엄은 강주에서 아들 [[이풍#s-4]]과 함께 수만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조진이 한중을 침공할 당시 제갈량이 2만 병력을 이끌고 증원군으로 오라는 명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밍기적거리다가, 제갈량이 경험없고 미숙한 이풍을 강주도독으로 임명하자 그때서야 한중으로 진발, 한중에 도착할 당시 조진은 이미 퇴각한 상태였다. 또한 파, 파동, 파서, 탕거, 부릉, 다섯개 군을 따로 떼어 파주라는 이름의 주를 창설하고 [* 후에 이는 촉이 망하고 [[서진]] 때 촉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이루어졌긴 했다. '양주(梁州)'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그 자사로 삼아달라는 요구를 하거나[* 북벌에 요구되는 군정의 일원화에 어긋나는 처사였기에 제갈량은 이를 거부했다.] 제갈량에게 [[구석#s-3]]을 받고 왕(王)이 되라는 권유 즉, 찬탈을 권하는가 하면[* 이에 제갈량은 '나(吾)와 족하는 서로 안지 오래 되었는데, 어찌 서로 더는 이해하지 못하단 말이오! 족하는 신하의 길을 고집할 필요 없이 나라의 영광을 위해 마땅히 아무것도 하지않는 것은 안된다고 나한테 가르치려 들고 있소. 나(吾)는 본래 동쪽의 낮은 선비로, 선제께서 틀리게 쓰셔서 이미 신하로서 높은 지위에 있고 많은 녹을 받고 있음에도 지금 적을 토벌하는데 효력이 없어 자신을 알아주심에 보답하지 못했는데 제, 진(주나라를 도운 제후인 옛 제나라, 진나라)과 같이 귀하고 큰 자리에 앉는 것은 의가 아니오. 위를 토벌하여 조예를 처단해 황제께서 옛 도읍으로 돌아가시면 더불어 여러분(諸子) 모두가 높아지고(與諸子並升) 비록 십명(十命)이라도 받을 수 있데(雖十命可受) 하물며 아홉이랴(況於九邪)!'라고 말했다.][* 이는 북벌이 성공하면 참여한 제군 모두가 높아진다고 역설함과 동시에 십명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고로, 큰 공로로 받는 상에 대한 비유인 것이니 이엄에게 분명히 한실부흥의 의지를 보이고 왕위에 대한 거절을 위해서 이런 말을 한 것이다. 제갈량의 논지는 이미 시작할 때 다 나왔다. 어디 칭왕 및 구석이란 단어를 꺼내냐는 꾸짖음인 것이다. 십명을 논하는 것도 다른 신하 제군 모두가 더불어 높아져 십명(큰상)을 받는 것이라고 단정한다. 그가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구석에 대한 무시 내지는 멸시에 가까운 것이다. 애당초 제갈량은 유비로부터 왕이 아니라 황제가 되어도 좋다고 유명을 받기까지 했고 그것을 거부하고 고굉지력을 다한 사람이다. 그걸 눈앞에서 보고 유비로부터 '내가 이 사람에게 이런 권한을 부여한 것을 기억해라'는 메시지를 받은 사람이 그 권한을 부여받은 사람더러 구석과 왕을 받으라고 논하는것은 교묘한 말로 제갈량을 떠본 것이며, 아마도 제갈량을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기 위한 권모술수 인 것으로 보인다.] 제갈량이 이엄에게 한중의 사무를 맡기려하자 (자신과 같은 표기장군이었던) [[사마의]] 등은 관부를 설치하여 관리를 임명하고 있다고 하며 은근슬쩍 부(府)의 설치를 요구하는 등, 계속 자신의 검은 잇속을 채우려고 했다. 이는 같은 고명대신이지만 점차 권위와 권력에서 차이가 벌어지는 제갈량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고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릉대전 이후 유비는 탁고하면서 패잔병과 조운이 거느리고 있었던 후방 병력들을 아울러 이엄에게도 군권을 줬지만, 남만정벌 때 같은 공신인 [[조운]]을 중호군으로 임명하고 제갈량이 군권을 통수하게 되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일 수 있다. 물론 제갈량 입장에서야 남정북벌은 선제 유비가 그에게 맡긴 국가의 대업이였기에 그가 군권을 통수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같은 탁고대신인데 그 군권에서 제갈량에게 밀리게 된 이엄 입장에서는 이런 욕구가 생길 만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엄이 군량 태클질 하기 전까지는 제갈량이 군 편성 과정에서 이엄에게 허락을 구한다거나, 견제를 받는다거나 하는 대목이 전혀 없기에, 명백한 제갈량 우위에 후방 안정 및 서포트 포지션으로 이엄을 붙여주었는데 이엄이 욕심을 부렸다는 게 타당할 것이다.] 어쨌거나 그럼에도 제갈량은 이엄의 요구를 자신이 들어줄 수 있는 선에서 들어주면서 그를 다독였다. 실질적으로 제갈량이 견제 못할 권신이었으면 이엄은 제갈량이 진작에 처리했겠지만 이엄이 이런 소리를 하는데도 제갈량이 참고 다독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엄의 권위나 권력도 만만치 않았음을 시사한다. 제갈량이 이엄을 처리하는 것도 이엄의 중대한 실책+그로 인한 전 조정의 신하들을 다 동원해야만 가능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