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경필 (문단 편집) ==== 전성기 ==== [[한국프로야구/1997년/신인드래프트|1997년]] [[OB 베어스]]의 1차 지명을 받았고, 3억 5천만원의 계약금을 받고 입단한다.[* 당초 OB는 [[김형석(야구)|김형석]], [[김상호(1965)|김상호]] 등의 베테랑을 정리하고 [[심정수]], [[장원진]], [[정수근]] 같은 젊은 선수들로 외야진을 재편하는 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대학야구에서 공,수,주 모두 넘사벽이었던 외야수 [[이병규(1974)|이병규]]를 뽑고 싶어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LG와의 주사위 싸움에서 패배했고 결국 한양대 야구부의 에이스였던 이경필을 영입한다.] 데뷔 시즌이었던 1997년 29경기 등판(선발 17경기[* 완투 2번, 이 중 하나는 LG를 상대로 8이닝 2실점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1997/08/08/1997080870088.html|완투패]]였다.])하면서 126⅔이닝 동안 7승 4패 [[평균자책점]] 3.62[* ERA+는 107.7에 sWAR*은 2.42로 제법 준수했다.]를 기록했다. [[1998년]]에는 두 자릿수 승수(10승)[* 심지어 2완봉승을 기록했는데 두 번 다 [[해태 타이거즈]]를 상대로 달성하면서 한 때 '호랑이 천적'이라는 타이틀을 얻기도 했다. 참고로 1997년 데뷔 시즌 이후 어깨 부상이 오기 전이었던 2001년까지 해태-기아 타이거즈 상대로 '''7승 1패 ERA 1.71'''을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2/07/08/2002070870125.html|기록]]할 정도로 유독 타이거즈에 강했었다. 나중에 박명환의 개인방송에 출연해 회고한 바로는 타이거즈 팬들이 이경필이 선발로 나오기만 하면 "워메~ 이경필이 저거 또 나왔네잉~"이라면서 짜증을 냈다고 한다.]을 달성했으며, [[평균자책점]]도 3.12로 더 낮아졌다.[* ERA+는 123.5에 sWAR*도 3.39로 [[소포모어 징크스]] 따위 없이 탄탄대로를 걷고 있었다.] [[1999년]]은 이경필의 최전성기라고 할 만한 해였다. 28경기 등판(27경기 선발)하여 166⅔이닝 동안 13승(리그 8위)을 찍으면서[* 이 때 [[강병규]]도 똑같이 13승을 찍으며 선발진을 뒷받침했다. 다만 세부 성적은 이경필이 훨씬 앞선다.] [[평균자책점]]은 3.19를 기록했는데, 1999년은 KBO 리그 사상 극악의 '''타고투저 시대'''였던 만큼 [[평균자책점]] 리그 '''전체 3위'''에 마크했고[* ERA+도 151.3으로 리그 '''전체 4위'''에 올랐다.] sWAR* 역시 4.75로 리그 전체 투수 8위였고 팀 내 에이스의 시절을 보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