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필

덤프버전 :

이경필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이경필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 펼치기 · 접기 ]



파일:external/s20.postimg.org/doosan2001.pn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2001

OB
/
두산 베어스 등번호 30번

윤준호
(1996~1997)

이경필
(1998~2004)


랜들
(2005~2008)
두산 베어스 등번호 23번
용덕한
(2004~2006)

이경필
(2007)


최승환
(2008.6.3.~2011)




파일:external/ss.textcube.com/XPJ2adkdvr.jpg

이경필
李慶弼 | Lee Kyeong-pil

출생
1974년 5월 21일 (49세)
서울특별시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중대초 - 배명중 - 배명고 - 한양대[1]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7년 1차 지명 (OB)
소속팀
OB-두산 베어스 (1997~2007)
지도자
천하무적 야구단 감독
실버 연예인 야구단 코치 (2022~)
해설위원
IPSN 야구 해설위원 (2011~2013)
IB SPORTS 야구 해설위원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해설위원 (JTBC)
병역
공익근무요원 (2004~2006)
SNS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1. 개요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2.2. 프로 경력
2.2.1. 전성기
2.2.2. 부상
2.2.3. 몰락
3. 은퇴 이후
4. 연도별 주요 성적
5. 기타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OB-두산 베어스 투수이자 前 천하무적 야구단 감독.


2. 선수 경력[편집]



2.1. 아마추어 시절[편집]


배명고 재학 시절 동기 포수인 장성국, 1년 후배인 유격수 김동주와 함께 전국대회(봉황대기, 전국체육대회, 황금사자기) 우승에 크게 공헌한 인물 중 한 명. 청소년 국가 대표로도 여러 번 뛴 적이 있는 그야말로 A급 유망주. 원래는 사이드암 투수였으나, 자라면서 힘이 붙자 사이드암 투수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서 한양대학교 야구부 시절부터[2][3] 오버핸드로 전환했다.[4]


2.2. 프로 경력[편집]



2.2.1. 전성기[편집]


1997년 OB 베어스의 1차 지명을 받았고, 3억 5천만원의 계약금을 받고 입단한다.[5]

데뷔 시즌이었던 1997년 29경기 등판(선발 17경기[6])하면서 126⅔이닝 동안 7승 4패 평균자책점 3.62[7]를 기록했다. 1998년에는 두 자릿수 승수(10승)[8]을 달성했으며, 평균자책점도 3.12로 더 낮아졌다.[9]

1999년은 이경필의 최전성기라고 할 만한 해였다. 28경기 등판(27경기 선발)하여 166⅔이닝 동안 13승(리그 8위)을 찍으면서[10] 평균자책점은 3.19를 기록했는데, 1999년은 KBO 리그 사상 극악의 타고투저 시대였던 만큼 평균자책점 리그 전체 3위에 마크했고[11] sWAR* 역시 4.75로 리그 전체 투수 8위였고 팀 내 에이스의 시절을 보냈었다.


2.2.2. 부상[편집]


그렇게 전성기를 달리던 중 1999년 여름에 팔꿈치 통증을 느껴 진단을 받은 결과, 토미 존 서저리가 필요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두산 마운드가 그를 중심으로 돌았기 때문에 김인식 감독은 이경필을 전력에서 제외하기 어려웠고, 팀 사정상 계속해서 진통제를 맞으며 뛰어야 했던 그는 결국 시즌이 끝난 후 2000년 2월에 수술대에 오르게 된다. 그렇게 2000년을 날렸지만 원래 2년은 재활해야 고칠 정도의 팔꿈치 상태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재활을 받지도 못한 상태에서 2001년 9월, 빠르게 복귀하여 공을 던지게 되었고[12], 이것이 몰락의 시발점이 되고 말았다. 그나마 2001년 한국시리즈 우승이라도 했으니 다행. 이 해 포스트시즌에서 현대와의 PO에서 3차전 중간계투로 나와 2⅔이닝 무실점 호투 후 타선이 5회 말 대폭발하면서 역전함에 따라 처음이자 마지막 가을야구 승리투수 기록을 올리기도 했다. 다만 2001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4:4로 팽팽히 맞서던 8회 말 3점을 내주며 경기를 내줌과 동시에 패전투수를 올린 것은 아쉬웠다.


2.2.3. 몰락[편집]


2001년의 마지막 불꽃 이후 성급한 복귀 후유증이 제대로 나타나며 구위가 급격히 하락, 성적은 매우 저조했다. 소화 이닝도 감소한데다가 평균자책점 역시 치솟았다. 그 이후 2004년까지 그가 거둔 성적은 도합 12승 27패. 평균자책점도 4점 ~ 5점대를 찍는 등 그야말로 몰락을 보여 주었다.[13] 그 와중에 병역비리에 연루되어 버린 데다가,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하기 전에는 아예 두산에서 방출 통보까지 받았다. 이후 방출 통보는 취소되었지만, 이 때 이경필의 마음고생은 장난이 아니었던 모양.

어쨋든 2007년에 복귀했지만 1승 2패에 5점대 평균자책점을 찍는 처참한 성적을 거두었고, 두산은 시즌 후 결국 이경필을 방출하고 말았다.


3. 은퇴 이후[편집]


방출된 후 김인식 감독과 김성근 감독의 콜을 받기도 했으나, 몸 상태도 안 좋고 두산 유니폼을 벗게 된 것에 큰 상심을 받아 현역 은퇴를 선언하고 야구판을 아예 떠나 버렸다. 당시 나이 34세로 은퇴하기는 아직 젊은 편이었고, 이후 관련 인터뷰를 보면 이 때 받은 충격이 장난이 아니었던 듯. 그래서 그 동안에 무속인을 따라다녔다고는 하는데, 정작 그들의 모습에 실망해서 1년만에 빠져나왔다고 한다.

그런 그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생겼는데, 그 전환점은 바로 DJ DOC김창열이었다.[14] 김창열은 이경필에게 김창열이 속한 야구 동호인 '만신창이'의 감독직을 부탁했고, 이경필이 이를 수락하면서 비록 사회인야구팀이긴 하지만 그는 극적으로 야구판에 복귀하게 된다.

또 잠실과 성남시 정자동에 야구 아카데미를 차려 운영하기도 했는데, 이경필 본인의 말로는 수입은 굉장히 좋았지만 본인이 원하던 방향인 체인화가 안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3년 동안 운영하다가 정리했다고 한다.

그 후 김창열천하무적 야구단을 기획하면서 이경필은 코치로 초청되었다. 처음에는 피칭머신을 대신해 배팅볼을 던져주는 이른바 피칭머슴으로 시작했으나 이후 정식 코치로 임명되었고, 올드선수 올스타와의 이벤트전에서는 직접 등판하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프로 출신인 이경필은 아마추어인 천무단을 가르치면서 더 즐겁다는 말을 하고 있다. 아무래도 부담감을 내려놓아서 그런 듯. 이것으로 보아서는 천무단이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보아도 될 듯하다. 천하무적 야구단이 종영된 이후 천하무적 어린이 야구단 창단을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15]

현재는 IPTV 스포츠 채널인 IPSN에 해설위원으로 들어가 있다. 같은 방송사에서 해설하는 마해영, 김용달, 구경백, 최익성 등과는 달리 목소리가 하이 톤이라 그냥 들어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당시에는 단독중계하는 JTBC 중계진에 투입되었다.

해설 일을 하면서 대리운전 사업도 겸하고 있는데, 처형이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어서 장애인들의 폐쇄적인 생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장애인을 위한 대리운전 봉사 활동을 시작했다. 다음 스토리펀딩 참조(링크 잘림). 이후 개신교에 입교해[16] 최근에는 몽골에서 야구 보급과 선교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관련 기사

박명환야구TV 오상민 편에서 잠깐 언급됐는데,[17] 껌을 씹는 속도의 차이를 보고 타자들이 이경필의 구질을 간파했다고 한다. 이후 직접 박명환야구TV에 게스트로 출연했다.

이후 2023년 10월 24일 유튜브 채널을 개설하고 예고편을 올리면서 본격적인 SNS 소통 행보에 들어갔다.#


4. 연도별 주요 성적[편집]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WHIP
1997
OB
29
126⅔
7
9
4
0
3.62
126
8
56
10
75
1.44
1998
27
150
10
9
0
0
3.12
137
8
42
6
94
1.19
1999
두산
28
166⅔
13
7
0
0
3.19
151
12
55
10
91
1.24
2000
1군 기록 없음
2001
5
6⅓
0
0
0
0
1.42
3
0
3
2
6
0.95
2002
10
24⅔
1
2
0
0
5.47
30
3
20
2
13
2.03
2003
26
106
8
13
0
1
4.50
122
4
43
12
47
1.56
2004
21
99⅔
5
12
0
0
4.70
113
4
44
11
49
1.58
2005
군복무(공익근무요원)
2006
2007
15
34⅔
1
2
0
1
5.19
43
0
16
3
14
1.70
KBO 통산
(8시즌)
161
714⅔
45
54
4
2
3.82
725
39
279
56
389
1.41


5. 기타[편집]


  • 후대에 배영수도 이경필과 비슷한 전철을 밟게 되었다. 이유 또한 비슷하다. 혹사로 인한 부상 때문에 팔꿈치 수술을 받았다는 점, 사정 때문에 예정된 재활을 줄여 복귀했다는 점, 결국 이 문제로 부상이 재발하여 복귀 후 예전의 모습을 되찾지 못했다는 점에서 둘은 비슷하다. 이 점 때문에 이경필이 배영수를 걱정하기도 했다. 다른 점이라면 구단삼성 트레이닝 센터가 없던 이경필은 선수 생활이 끝났고, 삼성 트레이닝 센터가 있는 배영수살아남았다는 것 정도. 하지만 뭐가 됐건 조기 복귀를 종용한 구단을 까야 한다는 건 변함이 없다.

  • 간혹 이경필을 천무단 감독으로 임명하자는 의견이 있으나, 이경필이 감독이 되기에는 오만가지 문제점이 있다. 자세한 사항은 여기를 참조. 다만 천하무적 야구단 자체는 방송이 끝났음에도 연예인 야구단 중 하나로 남았고 나중에는 결국 정식 감독이 되었다. 지금은 이경필 본인이 해외 선교를 하고 있어서 감독직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의문.

  • 김석류의 아이러브베이스볼(책)에서 마운드 위에서 항상 을 씹었었는데, 패스트볼을 던질 때는 몸에 힘이 들어가서 껌도 세게 씹고, 변화구를 던질 때는 잠시 동안 씹는 것을 멈추는 투구 버릇이 있었다고 말했다.[18]

  • 프로야구매니저에선 그의 전성기인 1999년도를 반영하여 99 두산덱의 1선발급 스탯과 함께 8성의 놀라운 능력치를 부여했다. 그리고 2013년에 시작된 카드 재평가에서 8성에서 10성으로 코스트가 증가함과 동시에 변화구 제구력의 스탯이 폭풍 상향되었다.

  • 현역 시절부터 성격이 좋기로 유명했고 그에 걸맞게 팬 서비스가 좋았다. 박명환야구TV에 출연해 광주구장 같은 펜스가 낮은 경기장으로 원정을 가면 경기 전에 몸을 풀고 있을 때 팬들이 사인해 달라고 하면 구운 오징어 한 마리씩 받아서 사인볼과 교환해 주었다고 직접 밝혔다.


6. 관련 문서[편집]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3 03:17:36에 나무위키 이경필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체육학과(1993학번)[2] 배명고의 최전성기를 이끈 에이스로 활약하며 청소년 대표팀에도 차출되면서 자연스레 연/고대의 러브콜이 들어왔다고 한다. 그런데 연/고대에서는 장학금을 주는 대신 이경필 혼자만 입학할 수 있었고, 한양대에서는 동기생 2명을 함께 받아주는 조건을 제시하면서 친구들과 함께 가고 싶었던 이경필이 제안을 받아들여 한양대에 간 것이라고 2021년 박명환야구TV에서 밝혔다. 본인은 굉장히 조심스레 밝혔지만 사실 이경필 정도의 실력이면 연/고대에 가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에 겸손을 발휘했다고 보면 된다. 만일 이경필이 고려대에 갔으면 김동주와는 초등학교~대학교 모두 선후배 관계가 됐을 것이다.[3] 1년 선배로 박찬호, 차명주가 있고 동기로는 강혁, 김창희가 있다.[4] 본인은 후일 이를 회고하면서 어린 시절 겁이 없었다면서 야구 후배들은 이를 따라하지 않기를 당부했다.[5] 당초 OB는 김형석, 김상호 등의 베테랑을 정리하고 심정수, 장원진, 정수근 같은 젊은 선수들로 외야진을 재편하는 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대학야구에서 공,수,주 모두 넘사벽이었던 외야수 이병규를 뽑고 싶어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LG와의 주사위 싸움에서 패배했고 결국 한양대 야구부의 에이스였던 이경필을 영입한다.[6] 완투 2번, 이 중 하나는 LG를 상대로 8이닝 2실점 완투패였다.[7] ERA+는 107.7에 sWAR*은 2.42로 제법 준수했다.[8] 심지어 2완봉승을 기록했는데 두 번 다 해태 타이거즈를 상대로 달성하면서 한 때 '호랑이 천적'이라는 타이틀을 얻기도 했다. 참고로 1997년 데뷔 시즌 이후 어깨 부상이 오기 전이었던 2001년까지 해태-기아 타이거즈 상대로 7승 1패 ERA 1.71기록할 정도로 유독 타이거즈에 강했었다. 나중에 박명환의 개인방송에 출연해 회고한 바로는 타이거즈 팬들이 이경필이 선발로 나오기만 하면 "워메~ 이경필이 저거 또 나왔네잉~"이라면서 짜증을 냈다고 한다.[9] ERA+는 123.5에 sWAR*도 3.39로 소포모어 징크스 따위 없이 탄탄대로를 걷고 있었다.[10] 이 때 강병규도 똑같이 13승을 찍으며 선발진을 뒷받침했다. 다만 세부 성적은 이경필이 훨씬 앞선다.[11] ERA+도 151.3으로 리그 전체 4위에 올랐다.[12] 당시 삼성과 현대가 일찌감치 선두와 2위를 확정지은 상황에서 두산은 유래없는 4강 싸움 때문에 급한대로 2군에서 재활하던 이경필, 박명환, 구자운 세 명을 당겨쓰게 된다.[13] 두 시즌 모두 WAR이 1을 넘기며 무난한 4선발 정도였다. 하지만 이경필이라는 이름값과 부상 전 보여준 성과에 비해서는 아쉬웠던 것도 맞다.[14] 참고로 김창열두산 베어스의 팬으로 알려져 있다. 연예계에 종사하는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되었다고 한다.[15] 이 시기에 내기골프와 도박에도 손을 댔는데, 이건 같이 있던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생각하면 답이 얼추 나온다.[16] 아내의 알콜중독과 이경필 본인의 건강 악화가 개신교 입교의 원인이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신앙을 형성하지는 못 했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다룬 영화를 보고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후문.[17] 오상민과 이경필은 74년생 동갑내기 친구다.[18] 박명환야구TV 야구썰전 오상민 편에서도 언급됐는데 오상민은 본인한테 물어보지 그랬냐~라는 농담을 했다. 이경필과 오상민이 74년생 동갑내기라서 가능한 농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