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의자왕 (문단 편집) ==== 정치 세력의 변화와 친위 세력 ==== 의자왕이 일으킨 친위 쿠데타는 이후 백제 정치 세력의 변화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쿠데타가 일어난 655년 즈음에 백제 최고위직에 있었던 좌평들의 신변에 이상이 생기는 등 정치적 변고가 일어났던 것으로, 이를 알 수 있다. 사택지적비에 따르면 당시 백제의 대좌평이었던 [[사택지적]]은 654년에 은퇴하여 낙향했으며, 《삼국사기》의 <김유신 열전>에 따르면 655년에 좌평 [[임자(백제)|임자]]가 김유신과 내통을 시도했다. 656년 3월에는 좌평 [[성충(백제)|성충]]이 의자왕에게 간언을 했다가 옥에 갇혀 죽었으며, 좌평 [[흥수]]는 죄를 지었다하여 고마미지현으로 귀양을 가야 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의자왕이 친위 쿠데타를 통해 정적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집권 세력들과 마찰을 빚었음을 시사한다. 이처럼 백제의 정국이 급변하는 가운데 정치 세력의 주류는 기존의 고위 귀족들로부터 친위 쿠데타에 동조한 왕의 친위 세력들에게로 옮겨갔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의자왕의 친위 세력 관련 기록은 일절 남아있지 않아 그들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 사학계에서는 당시 고위 귀족의 세력에 눌려 좌평직에 오르지 못하고, 한직에 머물렀던 신흥 귀족 세력들이 의자왕의 친위 쿠데타에 동조한 친위세력으로 보고 있다. 의자왕 대에 장군으로서 수차례 신라 공격을 주도하다가 훗날 벼슬이 좌평에 이른 [[의직]]이나 벼슬이 달솔에 머물렀던 [[계백]], [[흑치상지]] 등을 그런 세력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사서에 기록된 말년의 의자왕의 사치와 향락 등의 실책도 이 친위 쿠데타와 연관되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즉 단순히 의자왕이 타락한게 아니라, 친위 쿠데타 과정에서 집권 세력과 마찰이 일어나고 이로 인해 오히려 정국이 혼란스러워지고 의자왕도 이 과정에서 폭주하고 대외 상황에 방심하게 되었다는 것.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