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의자왕 (문단 편집) == 기타 == * 의자왕의 '의자'를 [[시호]]라 착각하기도 하는데 사실 시호가 아닌 그의 이름이다.[* 물론 백제는 이름이 시호가 되는 경우가 많기는 했다. 심지어 혜왕조차 이름은 '계' 혹은 '혜'로 추정된다.] 마지막 군주한테 "의롭고 자비롭다"라는 시호를 줄 리가 없다.[* 비단 의자왕뿐만 아니라 모든 왕조의 마지막 군주에게 주어지는 전통에 가깝다. [[보장왕]], [[우왕]], [[창왕]]도 같은 케이스. 예외로는 [[경순왕]]과 [[순종(대한제국)|순종]]이 있는데 곱게 항복하고 항복한 나라에서 군주에 버금가는 예우(상보, [[이왕]])를 받은 경우라 시호가 부여된 케이스. [[공양왕]]의 경우는 이어진 왕조인 [[조선]]의 [[태종(조선)|태종]]이 하사한 시호다.] 한국의 어린이 잡지 《위즈키즈》에서는 시호와 이름을 헷갈려서 한때 역사 코너에서 의자왕을 옹호하는 [[떡밥]]으로 쓰였다. [[EBS]] 교육방송에서 방영되는 '역사채널e'라는 프로그램에서도 '의자'를 이름이 아닌 시호로 생각해서 의자왕은 방탕한 왕이 아닌 의롭고 자애로운 왕이라고 설명했는데 '의자'는 후세 사람들이 붙여준 시호가 아니라 이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이나 SNS에서 해당 역사채널e 편이 [[짤방]]으로 제작되어 유포되고 있는 답답한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만약 그가 정상적으로 치세를 마쳤다면 시호는 '[[문왕]](文王)'이 되었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武' 시호 다음에는 '文' 시호를 받아왔기 때문이다. * 이름에 '의자'가 들어가는 탓에 그 앉는 도구 '[[의자]]'가 연상돼서인지, 이름에 대해서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어디 앉아서 노닥거리기만 해서 의자왕', '선생님이 백제의 마지막 왕을 물어봤는데 기억을 못 하는 아이에게 의자를 가리켰더니 걸상왕이라고 대답' 등의 농담도 있다.[* 우야꼬 [[만화일기]]에서도 실려 있다.] * 3,000 궁녀... 즉 (낭설이지만) '여자가 많았다.' 라는 점 때문에 국내에서는 [[하렘]]의 대명사로 통한다. 사실 역대 왕조 국가의 군주들 중에서 후궁을 두었던 군주는 여럿 있었지만[* 대표적으로 [[왕건]]이 있다.] 의자왕은 '3,000'이라는 놀라운 숫자에다 백제 왕조의 종점이라 의자왕은 '하렘의 대명사' 자리를 꿋꿋이 지킨다. 그 이유에서인지, 한국판 남자 카사노바처럼 밈이나 드립 등에 꾸준히 활용되는 중이다. 물론, 실제 역사에서 의자왕처럼 3000명 이상을 궁녀로 거느리는 것은 제아무리 왕권이 강한 황제였어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 <[[서동요]]>의 내용을 적용해 생각해보자면 그가 백제 땅 넓히기를 혈연보다 더 우위에 뒀다는 해석이 나온다. 일반적으로 서동은 무왕이고, 선화공주는 신라의 [[공주]]이자 무왕의 [[왕비]]이며, 의자왕의 모친으로 간주되는데, 그러면 그는 이모에게 계속 싸움을 걸었다는 소리가 되기 때문이다.[* 선화공주는 [[진평왕]]의 셋째 딸로 알려져 있다. 그러니까 그가 신라에 쳐들어갔을 때 당시 신라 왕이었던 선덕여왕은 그의 이모가 된다.] 한동안 [[미륵사|미륵사지 석탑]] 복원공사 중 나온 <금제사리봉영기>에서 무왕의 왕비가 선화공주가 아닌, 백제 귀족 사택씨의 딸이라고 나와 관련학설에 대해 이론(異論)이 나와 힘이 실리기도 했으나 현재는 학계에서는 귀족 사택 가문의 딸이 후처로서 의자왕의 친모가 아니라 보는 등 기존의 학설을 수정하는 쪽이 힘을 얻고 있다. 이 설은 사택씨의 딸이 정실부인이라면 본인 주도하에 세운 미륵사지의 가운데 탑 위치에서 유물이 발굴되어야 했으나 중측으로 세워지고 무너진 서탑에서 발굴되었다는 점, 해동증자로 불리던 의자왕이 장남임에도 오랫동안 태자로 책봉받지 못하고 겉돌았다는 당대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여 주장된 설이다. * 위의 설과 선화공주 설화를 엮어, 과거 [[역사스페셜]]을 비롯한 각종 역사 관련 미디어에서 [[이도학]] 교수의 설명을 참조하여 의자왕이 [[선화공주]]로 이어진 신라의 핏줄, 혹은 미천한 출신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신라를 공격하고 이를 성공해 냄으로써 자신이 진정한 백제의 왕임을 과시했다는 설을 제시하기도 했다. * 실제 동기가 어찌 되었던간에, 아버지인 [[무왕]]과 함께 신라를 거의 멸망에 이르기까지 몰아 세우고 집권 초중기에는 백성과 관료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왕이었음은 확실시 된다. 정작 그 인기절정의 순간, 신라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말년에는 당나라까지 끌려가 그 곳에서 생을 마감했으니 참 비참한 운명의 군주라 할 수 있다. * [[견훤]]이 [[후백제]]를 일으키면서 '의자왕의 원수를 갚자!'는 구호를 내걸었음을 보면, 그로부터 200년 뒤에도 옛 백제 지역 사람들은 의자왕을 동정한 모양이다. 이후 견훤은 포석정에서 [[경애왕]]을 살해하고 '의자왕의 한을 갚았다.'고 선언했다. 한편으로는 신라가 한반도를 영토적 통일은 이루었으나 정신적 통일을 이루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백제와 아무런 연고가 없고 오히려 서라벌에서 정규군으로 활동하다 반기를 든 생판 남인 견훤이 200년 전에 멸망한 나라의 마지막 왕을 위해 복수하자고 했는데 그 일대에서 호응했다는 점이 그렇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