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을미의병 (문단 편집) == 상세 == [[1895년]] [[10월 8일]] 일본의 만행으로 인해 [[청일전쟁]] 이후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려던 [[명성황후]]가 시해되었다. 유생들은 일제에 격분하여 친일 역적을 처단하자는 내용을 담은 상소를 올리고(10월 8일, 음력 8월 20일), [[명성황후]]의 복수를 위해 의병들을 규합했다(10월 10일, 음력 8월 22일). 마침 [[고종(대한제국)|고종]]이 각지의 유명 유림들에게 의병 궐기를 촉구하는 밀서들을 보내면서, 같은 해 10월 18일, 충청도의 의병장 문석봉이 유성 장터에서 맨 처음 유성 의병을 일으키면서 마침내 근왕창의(勤王倡義)의 기치를 걸고 의병 활동이 시작되었다. 12월 30일(음력 11월 15일) [[을미개혁]]의 정책 중 하나로 [[단발령]]까지 시행되자[* [[고종(대한제국)|고종]]도 머리를 잘랐고, [[유길준]]이 [[순종(대한제국)|세자]]의 머리를 직접 잘랐다. 사람들은 거리에서 무차별적으로 상투를 잘렸다.] 1896년 1월[* 고종 33년 1월, 음력으로는 아직 을미년이다.]에 민중들까지 호응하면서 본격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먼저 일어난 곳은 [[충청도]] [[유성구|유성]]이며, 이후 전국에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이는 단발령에 의해 더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효경(孝經)》에 나오는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신체와 머리카락, 피부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이것을 지키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라는 구절 때문이다.] [[강원도]]에서는 [[이소응(조선)|이소응]](李昭應), [[충청도]]에서는 [[유인석]](柳麟錫), [[전라도]]에서는 기우만, [[경상도]]에서는 [[허위(독립운동가)|허위]](許蔿)가 일어났다. 이때 가장 큰 호응을 얻은 인물들이 바로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꼽히는 [[유인석]]과 이소응이다. 교과서나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등에서 동학농민군 출신들을 축출하여 전투력이 급감했다고 설명하나 실상과는 상반되는데, 해산된 지방 구식군인들[* 후술되겠지만 말만 지방군이지 근대 군사훈련의 이수와 함께 근대무기를 장비한 부대들도 있었다.]과 동학 진압으로 실전경험을 쌓은 민보군, 포군으로 구성되어 중앙의 친위대도 상대하기 쉽지 않았다. 지방의 주요 도시를 공략하여 관리와 일본인을 살해하였다. 또, 지방 관아를 점령하고, 단발령에 앞장선 수령이나 스스로 단발을 한 인물들을 보기만 하면 붙잡아 목을 베었다. 이들 대다수는 [[아관파천]] 이후 [[고종(대한제국)|고종]]이 [[단발령]]을 취소하고 [[의병]] 해산 권고 조칙[* [[http://sillok.history.go.kr/id/kza_13302018_001|1896년 2월 18일 고종의 1차 해산 조령]], [[http://sillok.history.go.kr/id/kza_13302018_002|1896년 2월 18일 내부 대신의 훈시]], [[http://sillok.history.go.kr/id/kza_13302027_001|1896년 2월 27일 고종의 2차 해산 조령]]]을 내리자 어느 정도 목적이 달성된 것으로 보고 대부분 자진 해산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