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육영수 (문단 편집) === [[박정희]]와의 만남과 결혼 === 1950년 8월 이종사촌인 송재천[* 송재천은 [[박정희]]의 [[경북대학교 사범대학|대구사범학교]] 후배이기도 했다.]의 소개로 당시 [[소령]]이었던 [[박정희]]를 만났다. 박정희는 집안 어른들이 정해주는 대로 1936년 [[김호남]]과 결혼하여 이듬해 [[박재옥]]이라는 딸을 낳았다. 본래 [[박정희]]는 좀 더 나이를 먹은 후 자신이 좋아하는 여성을 만나 결혼하길 원했으나, 집안 어른들, 특히 아버지인 [[박성빈]]이 죽기전에 막내아들이 결혼하는 것을 봐야한다며 강권하여 당시 16세의 처녀였던 [[김호남]]과 억지로 결혼시켰다. 본인이 원하지도 않았던 결혼생활인지라 김호남에게는 그다지 정이 없었다. 박정희는 김호남을 두고 [[이현란]]이라는 여대생과 1948년부터 1950년까지 동거하였으나, 박정희가 [[남로당]] 소속인 것에 실망한 이현란이 떠나버려 한동안 큰 충격을 받아 방황을 하였다. 시간이 흘러 6.25 전쟁이 터져 [[군대]]에 복귀한 이후 육군본부를 따라 [[대구광역시|대구]]와 부산을 왔다 갔다 하며 근무하고 있던 짝 없는 33살 박정희를 보고 후배들은 "이현란을 잊으라"고 성화를 하였는데, 휘하 장교들 중 하나가 대구사범 1기 후배인 송재천이다. 옥천 출신이던 그가 퍼뜩 떠올린 것은 자기 고향의 큰 부자인 육종관의 딸이었다. 마침 그 영감이 아내와 딸을 거느리고 [[부산광역시|부산]] [[영도구|영도]]로 피난차 내려와 있다는 소식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육영수와 박정희는 짬을 내 만났다. 정식 맞선은 아니었으나 본인의 표현대로 ‘목이 길고 고상하게 생긴 처녀’에게 박정희는 대번 호감을 느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ojsfile.ohmynews.com/IE001306499_STD.jpg|width=100%]]}}} || || {{{#ffc224 '''육영수와 박정희의 결혼식 사진'''}}} || 1950년 12월 12일, [[천주교 대구대교구]] [[주교좌]] [[계산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나이는 박정희가 33세, 육영수가 25세. 결혼 사진을 보면 육영수의 얼굴이 부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전날 육영수가 [[위경련]]을 겪어서 생긴 일시적인 후유증이라고 한다. 결혼식 때 주례를 섰던 허억 초대 대구시장이 두 사람의 이름 때문에 '''"신랑 육영수 군과 신부 박정희 양"'''이라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일화가 있다. 실제로 '정희'는 여자 이름, '영수'는 남자 이름에 쓰이다보니 일어난 웃지 못 할 해프닝이었다.[* 재밌는 점은 주례인 허억의 이름도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허억--] 비슷한 예로 방송에서 "육영수 여사"라고 해야 할 것을 '''"육영사 여수"'''라고 방송사고를 낸 일도 있었다고 한다. 참고로 이 방송사고가 난 건, 방송에서 원체 수없이 육영수 여사, 육영수 여사 하다 보니 순간 실수한 거라고 하는데 방송에서 수없이 육영수 여사라는 단어를 부를 시기, 바로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이 일어나고 난 뒤에 벌어진 방송사고였다.[* 출처는 [[이계진]]의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419366|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딸꾹]].] 또 결혼식에 쓸 예물 반지를 가지고 있던 육영수의 사촌오빠가 결혼식 날 [[반지]]를 잃어버려 부랴부랴 반지를 사 왔다. 아버지 육종관은 당시 [[군인]]이었던 [[박정희]]가 육영수와 결혼하는 것을 “[[6.25 전쟁|이 난리판]]에 군인에게 시집간다는 게 될 법한 소리야?” 하며 결사반대하였는데, 반대의 근거는 다음과 같았다. >1. 일단 둘의 교제 시기가 1950년 8월이었는데, 당시엔 [[인민군]]이 [[경상도]]를 제외한 한반도를 석권하고 있었고 [[낙동강]]에서 결사항전 중이었는데 국군이 승리한다는 것은 당시 상황으로는 요행에 가까웠을 것이다. [[낙동강]] 방어선이 뚫려 [[적화통일]]이 달성되면 국군은 제거대상 1호인데, 내 딸이 [[과부]]가 될지도 모르는 군인이랑 사귀냐는 점. > >2. 신식 교육을 받은 부잣집 아가씨가 [[박재옥|자식]]도 있고 [[김호남|첫 아내]]와 이혼까지 한[* [[1990년대]]만 해도 [[이혼]]은 결격사유로 여겨졌으며, 현재도 [[정치인]]들에게도 해당이 된다. 하물며 이때는 산업화가 이루어지기도 이전인 [[1950년대]]였다.] [[박정희|8살 연상의 남자]]에게 [[시집]]을 간다는 점. > >3. 육종관이 사윗감으로 미리 점 찍어둔 조건 좋은 남자가 있었고 혼담까지 오고 갔는데, 자신이 정한 남자를 엎어버리고 생판 모르는 남자에게 시집 간다는 점. 육종관은 자기 자신과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해서, [[박정희]]가 정권을 잡고 나서도 [[사위]]로 인정하지 않았다. 박정희가 집권한 뒤에도 [[청와대]]에 그림자도 드리우지 않았다. 일설에는 '''"박정희랑 결혼하면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육영수가 비명횡사한다]]"'''는 예언을 들었다고 한다. 하여튼 이렇게 친정에서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어머니 이경령과 육영수 자신의 고집 덕분에 결혼을 밀어붙였다. 이경령이 육영수의 사주를 무속인들에게 보이니, 다들 '''"재취(후처) 자리로 시집가야 잘 산다"'''고 풀이했다고도 한다. 육종관이 들었던 예언은 저기서 더 살이 붙는다. 바로 "재취(후처) 자리로 시집가야 잘 살기는 하지만 마지막에는 두 사람 다 비극적인 결말을 맞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경우는 [[김종필]]의 회고록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1961년 어느 날, 식당에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 당락과 장차관 하마평을 잘 맞히는 것으로 유명했던 [[박유붕|백운학]]이라 불리는 역술인을 초청하였다. 백운학은 "각하, [[유신정권|한 20년 가겠습니다.]] 소신껏 하십시오."라는 말을 하고, 자리가 파하는 자리에 "이상한 점괘인데요. [[10.26 사태|끝에 험하게 돌아가실 것 같아요.]]"라며 말했다고. 그런데 이것이 그대로 실현되어 놀랐다고 한다. 결국 육종관은 육영수의 결혼식에도 찾아오지 않고, 이경령·육영수 모녀와도 완전히 갈라섰으며, 경제적 지원도 일절 해주지 않았다. 육종관이 사위에게 사과한 건 죽음이 임박할 때였다. 죽기 직전 병문안을 온 박정희에게 "내가 부덕하여 [[대한민국 대통령|큰 인물]]을 못 알아봤다."라고 사과했다. 그리고 육종관은 1965년 12월 26일 아들 [[육인수]] 의원의 [[창성동(종로구)]] 자택에서 숨졌다.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그러나 아버지가 들었던 예언은 끝내 현실이 되고 말았다.]]''' 딸은 물론 [[10.26 사태|사위마저 정말로 비극적인 결말]]을 맞아버렸기 때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