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재학 (문단 편집) == 선수 시절 == 상명국민학교[* 지금의 상명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 농구에 입문했다. 농구를 좋아하던 유재학이 매일 학교 운동장에서 공을 튀기고 노는 것을 보고 농구부에서 그를 입문시킨 것이었다. 이 때 같이 들어간 친구가 지금도 절친한 벗인 [[전창진]]. 국민학교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며, 모교의 소년체전 3연패라는 위업 달성을 이끌었다. 소년체전은 5학년부터 참가가 가능한데, 유재학의 재능이 너무 뛰어난 나머지 4학년인 그를 5학년으로 속여서 출전시켰다고 한다. || [[파일:external/www.basketkorea.com/bb.jpg]] || || 절친인 전창진과 함께 || 용산중학교에 들어갈 때, 워낙 실력이 좋았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농구를 못 하게 될 뻔했다. 결국 용산중 관계자가 아버지가 내건 조건을 수락하고 농구를 다시하게 되었는데, 그 조건은 체벌 금지, 공부 시간 보장이었다. 그래서 유재학은 맞지도 않고, 남들 훈련할 때 나가서 공부도 했다. 대개는 저러면 선배들이 싫어했겠지만, 유재학이 나가면 이기는데 싫어할 수가 없었다. 중학교 때, 전국대회 39연승을 하면서 중학농구를 씹어먹었다. 그리고 고등학교로 진학을 해야 했는데, 정상적인 경로라면 [[용산고등학교]]로 가야 했지만, 1학년 때부터 주전으로 뛰고 싶었고, 또 만난 사람들과 계속 농구를 해야 한다는 지겨움 때문에 선배들이 거의 없던 [[경복고등학교]] 진학을 우겨서 결국 진학하게 된다. 그리고 경복고에 가서는 또 다시 경복고를 이끌고 고교 대회를 모조리 제패하면서 당시 흔들렸던 경복고 농구를 완전히 재건시켰다. 이제 대학에 갈 때가 되자, 이 천재 가드의 진로는 경복고의 후원자였던 [[고려대학교]]였다. 하지만 유재학은 "난 어릴 때부터 [[연세대]]의 파란색 유니폼이 맘에 들었다." 라면서 고교 졸업과 동시에 군 입대도 불사하며 고집을 부린 끝에 [[연세대학교]] 입학을 할 수 있었고, 김동원 감독에게 농구 수업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연세대]]는 유재학의 입학과 함께 날개를 달았다. 이 때도 역시 유재학은 천재 가드의 명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파일:대통령배 1986년 농구대잔치 기아자동차 농구단 창단 후 첫 경기.jpg|width=500]] 대학도 졸업할 때가 되자 실업팀으로 가게 되었는데, 당시 막 창단한 [[기아자동차]]로 진로가 결정되었다. 농구대잔치의 끝물까지 이어진 신생팀에 대한 특혜로, 기아자동차는 그해 한 대학교의 졸업생 전부와 다른 대학의 졸업생 2명을 우선지명할 수 있었는데, 그들의 선택은 [[중앙대]]의 졸업생 전부와 연세대 졸업생 중 유재학, [[정덕화]]였다. 처음에는 호흡이 맞지 않았지만, 당시 1급 선수들을 다 모았던 기아자동차가 [[농구대잔치]]의 주역이 되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87-88 시즌 준우승을 시작으로, 1988-89 시즌 마침내 우승의 위업을 달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유재학은 이 시즌의 MVP에 올랐다. 그런데 이 거칠것 없던 천재 가드의 발목을 잡은 것은 부상이었다. 무릎을 다치면서 고생하기 시작한 것. 당시 스포츠 의학의 개념이 없던 [[대한민국]]에서는 일단 경기가 중요하다고 [[스테로이드]] 주사(일명 대포주사. 데포메드롤)를 맞춰서 임시로 뛰게 했다. 그리고 2차례 무릎 수술을 [[대한민국]]에서 받았는데, 회복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무릎의 상태는 점점 악화되었다. 결국 [[일본]]에 건너가 다시 수술을 받았는데, 이 과정에서 한국에서 받았던 두 차례 수술은 한 마디로 엉뚱한 곳을 잘라낸 오진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다시 받은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유재학을 괴롭히던 무릎 통증도 멎게 된다. 하지만 이 때 유재학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게 되는데, 일본 병원에서 짜준 재활 프로그램을 끝까지 이행하지 않고 조기에 종결시킨 것. [[정대만|통증이 사라지자 다 나았다고 생각하고 조기 복귀하면서 무릎이 다시 탈이 나 버렸다.]] 여기에 당시 기아자동차의 연세대와 중앙대 출신 선수들 간의 갈등과 그로 인한 그의 평생의 스승인 방열 감독의 퇴진, 그리고 아픈 무릎 상태와 그의 빈 자리를 차지하던 후배 [[강동희|강모 씨]]의 존재는 결국 유재학의 조기 은퇴를 가져왔다. 결국 유재학은 28세의 젊은 나이에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모교인 [[연세대학교]]의 코치로 부임했다. 이때문에 유재학은 허재,강동희,김유택,한기범등 기아자동차 실업농구 최전성기를 이끈 선수였음에도 하필 [[마지막 승부]]세대라 불리는 90년 농구대잔치 시작 직전에 은퇴했기 때문에 유독 농구팬들에게 선수로써의 이미지가 옅은 편이다. 유재학이 커리어를 조금만 연장할 수 있었다면 강동희의 실업농구 커리어가 크게 달라졌을 것이며 올드 농구팬들이 알고 있는 허동택 트리오도 그 이전에 강동희가 아니라 유재학이 들어갔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