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연 (문단 편집) ==== 긍정 ==== 위연은 부곡의 낮은 신분에서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워 입지전적한 인물이고, 사졸을 잘 길렀다는 평을 보아 군대 양성에도 능하였다.[* 위연의 사졸들은 왕평의 꾸짖음으로 흩어진 일, 그리고 전술했듯 여예전에서 제갈량이 죽고 난 뒤 군이 달아난 일에서 2번 언급되는데, 따로 언급될 정도면 규모도 상당하고 꽤 정예 부대였던 것 같다.] 또 230년에 오의와 함께 양계에서 곽회, 비요를 격파하고 231년에 고상, 오반과 사마의를 대파하였는데, 이 두 전투는 만만치 않은 적장임에도 거둔 제갈량 생전 최대의 전공이었다. [[중국]]의 근대 사학자 [[여사면]]은 "위연의 북벌 의지는 비교적 굳건한 것이었다. 오로지 제갈량이 죽을 날만 바라보며, 전군을 철수시키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만약 제갈량이 죽고 위연이 병권을 장악했다면, 장완이나 비의 같은 사람은 따르지 않았을 것이나, 그 성패는 알 수가 없다. 따라서 위연의 죽음은 촉한의 일대 손실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높게 평가하였다. 정사의 저자 진수는 위연이 위나라에 투항하지 않고 한중으로 달아난 행보가 그가 반역자는 아니라고 여겼는지 유팽요이위양유전에서 아래와 같이 변호해줬다. > 原延意不北降魏而南還者,但欲除殺儀等。平日諸將素不同,冀時論必當以代亮。本指如此。不便背叛。 > 원래 위연의 뜻은 북쪽 위나라에 투항하는 것이 아니고, 남쪽으로 돌아오되 다만 양의 무리를 죽이고자 할 뿐이었다. 평시 제장들의 뜻이 서로 같지 않았으므로, 시론[* 時論, 한 시대의 여론. [[https://ko.dict.naver.com/#/entry/koko/1646d38178f147cf8c57e26527e12c2c|#]]]이 반드시 (자기가) 제갈량을 대신하여야 하길 바란 것이다. '''본뜻이 이와 같았으니 배반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 >[[진수(역사가)|진수]], 『[[정사 삼국지]]』, 유팽요이위양유전(劉彭廖李劉魏楊傳) >제갈량이 병들자 위연 등에게 말했다, “내가 죽은 뒤에 다만 삼가며 스스로 지킬 뿐 다시 (공격하러) 오지 말라.” 위연에게 자신의 사무를 섭행(攝行-대행)하도록 명하고 은밀히 상여를 지니고 떠나게 했다. 마침내 위연이 이를 숨겨 포구(褒口)에 도착하고 이내 발상했다. 제갈량의 장사 양의는 예전부터 위연과 불화했는데, 위연이 군사를 섭행(攝行)하게 되자 해를 입을까 두려워했다. 이에 부풀려서 말하길 위연이 군사를 들어 북쪽에 귀부하려 한다고 하고 마침내 자신의 군사를 이끌고 위연을 공격했다. 위연은 '''본래 이런 마음이 없었으니''' 싸우지 않고 군이 패주했는데 이를 추격하여 위연을 죽였다. >---- >『[[위략]]』[* [[http://rexhistoria.net/index.php?_filter=search&mid=history_sam&search_target=title_content&search_keyword=%EC%9C%84%EC%97%B0%EC%A0%84&document_srl=1421|출처: 파성넷]]] 『[[정사 삼국지]]』와 『[[위략]]』 모두가 일관되게 위연의 뜻이 반란이 아니며 위국에 귀부할 생각도 없었다고 옹호해주고 있다. 더불어 『[[위략]]』에도 나와있듯 동정적인 여론이 셌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배송지]]가 말했듯 어느 것이 사실인진 알 수 없다. 그러나 적국인 위나라에서는 이렇게 알려져 있었다는 말이다.] 군부 최고참이던 인물이 하루아침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며 몰락했다는 겉으로만 드러난 정보만으로는 적국에서 보아도 동정 여론이 생길 여지는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