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연 (문단 편집) ==== 초기 ==== 위연은 본래 [[유비]]의 [[부곡]](部曲)이었다.[* 부곡의 뜻이 노예, 노비를 포함하기 때문에 천민에서 출세하였다고 오해할 수 있으나, 그런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남북조시대]] 이후이고 [[후한]] 시기 부곡은 [[사병]]을 뜻한다.] 일개 병졸에서 시작하여 장군의 지위까지 올랐으므로 [[자수성가]]한 인물인 것은 분명하다. 입촉 후 여러 차례 공을 세워 아문장군(牙門將軍)에 오르고, [[한중]]을 수비하는 독한중(督漢中)으로 발탁되었다. 여러 사람들이 [[장비]]가 될 것이라 보았고, 장비 또한 스스로 임명될 것이라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놀랐다. 유비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여러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위연에게 >"이제 경에게 중임을 맡기노니 어떻게 하시겠소?" >---- >[[진수(역사가)|진수]], 『[[정사 삼국지]]』, 유팽요이위양유전(劉彭廖李劉魏楊傳) 하고 물었다. 이에 위연은 >"'''[[조조]]가 천하를 들어 쳐들어온다면 편장이 십만 군사로 삼켜버리도록 청합니다.'''" >---- >[[진수(역사가)|진수]], 『[[정사 삼국지]]』, 유팽요이위양유전(劉彭廖李劉魏楊傳) 하였다. 이에 유비가 칭찬하고 사람들이 높이 여겼다. 발표 직전의 중론은 전공으로 보나 연공서열로 보나 어디로 봐도 장비가 마땅하단 것이었다. 그런데 이는 어찌보면 파격적이지만 한편으로는 납득이 가는 일인데 이미 장비는 파서태수로서 익주 후방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이는 서주와 형주 시절 관우가 맡던 역할로 유비는 서주에 있을 때 처음에는 장비에게 서주를 진수시켰으나 그가 조표와의 불화 및 여포의 배반으로 서주를 잃은 후에 다시 서주를 찾은 2차 서주 시기와, 남군 공방전 후 형남 지역을 얻고 본인이 익주 정벌 때는 후방이 된 형주를 관우에게 맡겼다. 그리고 그 관우가 익주 점령 시점 때 형주를 진수받으며 형주는 후방이 아닌 전방 교두보 지역이 됐고, 이제부터 익주가 후방이 되다보니 자연스럽게 후방 담당을 할 인물이 빠지자 익주 정벌 때부터 장합 격파 등의 굵직한 활약을 보인 장비에게 다시 후방 담당을 일임하며 그에 대한 신뢰를 다시금 재확인하게 됐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 제갈량이나 마초를 제외한 다른 1세대 장수들이 모두 고령에 가까워지고, 담당할 영역도 늘어났는데 계속해서 그들만 부담시킬 수 없으니 2세대 장수들의 기용 비중을 높여야 할 필요가 있었고, 이 점에서 바닥에서부터 올라와 눈도장을 찍은 위연을 적임자라고 판단해 파격 승진을 시킨 걸로 보인다. 조조가 한중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지만 [[한중 공방전]] 직후였던만큼 한중의 빠른 안정을 위해 유비군 본대가 주둔하고 있었으리라 짐작되기 때문에 위연이 한중을 완전히 책임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나, 독한중이 낮은 자리라고 볼 수는 없다. 이때까지 위연은 유비의 직속 부하로서 계급이 착착 올라가면서 중임을 맡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221년에는 진북장군(鎭北將軍)에 제수되었고, 223년에는 도정후(都亭侯)에 올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