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원로원 (문단 편집) ==== 11~12세기 ==== 바실리오스 2세의 사망으로 제위계승이 혼란해지자 황권 아래에서 잠재되어 있었던 수도 관료귀족과 지방 군사귀족의 갈등이 다시 시작되었고 11세기 중반 내내 동로마의 정치구도는 수도 관료귀족 vs 지방 군사귀족이었다. 엎치락뒤치락하다가 후자를 대변하던 알렉시오스 1세의 쿠데타의 성공으로, 전자와 구성원이 거의 일치하던 원로원의 기능은 많이 퇴색되었으며 심지어 [[매관매직|원로원 의원직을 황제가 판매하게 되었다]].(...)[* [[https://larsbrownworth.com/blog/2010/11/03/what-was-the-point-of-the-byzantine-senate/|위의 'Lars Brownworth'의 블로그에]] 'The Senate itself retained considerable prestige, especially in the 11th century when the "court party" came to power following the death of Basil II. With the final triumph of the military faction on the accession of Alexios I Komnenos the Senate began to fade into irrelevance and the title of senator could be bought from the emperor.'라는 대목이 있다.] 그러나 알렉시오스 1세가 본인의 입지를 굳혀 콤니노스 왕조가 안정화된 [[12세기]]에도 원로원의 역할은 지속되었다. [[요안니스 2세]]는 [[1137년]] [[안티오키아 공국]]이 평화조약을 제안했을 때 이 안건을 원로원으로 회부하였다. [[1147년]], 시칠리아-아풀리아 공국이 침략을 개시하자 [[마누일 1세]]는 원로원의 연설을 통해 침략자들을 규탄하였으며 이후 황실과 지휘관, 전략가들로 구성된 상원을 소집하여 대응을 논의하였다. 다만 11세기 중후반과 비교하여 달라진 점은, 정국운영의 안정성과 일치된 이해관계에 의한 조직을 구성하기 위해 콤니노스 황실이 대대적으로 정부기구와 상원의 참여자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지간한 정부기구 수장, 특히 상원은 황족들이 대거 기용되었다. 이것을 이른바 '족벌체제'의 저열한 독점현상으로 보고 저평가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 체제는 대체적으로 잘 운영되었다. 실무는 수장급 이하의 실무관료들이 맡고 전체적인 총괄, 책임이나 상부기구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황제와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하여 황족들이 배치된다는 조직원리에 의해[* 오늘날의 대한민국으로 따지면 차관까지는 직업공무원(늘공), 장관직에 정치인(어공)을 앉히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구성된 체제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히려 이런 정교한 체계를 무턱대고 무너뜨린 [[안드로니코스 1세]] 이후 오히려 제국의 복잡한 사회는 방향을 잃고 표류하기 시작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