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원로원 (문단 편집) ==== 시작 ==== [[330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완공된 이후 로마 정부는 여러 혜택을 보장하면서 기존 로마시의 원로들을 유인하면서 [[신도시]]의 원로원을 빠르게 구축해갔다. 이때 콘스탄티누스 1세는 자신을 따라 함께 노바 로마로 떠나는 모든 의원들에게 땅과 재산을 나누어 주겠다고 당근책을 제시했는데, 황제가 유인책까지 사용해 사실상 이주를 권장한 까닭과 상당수의 로마 원로원 인사들이 대개 지중해 동부에 터를 둔 이들이 많아, 상당수의 로마 원로원 의원들은 각자의 이유로 동쪽의 노바 로마로 거주지를 옮겼다. 그러나 이때 노바 로마에서 처음 개회된 새로운 원로원은 로마 원로원 본원을 그대로 옮겼거나 아예 없애고 대체했던 것이 아니라 일종의 '동방 담당 분원'이었고, 실제 위세 역시 이름만 남은 로마 원로원과 비교해도 초라했다. 그래서 이 일대 근처에서 열리는 지방의회 중 가장 큰 규모였던 시리아 속주의 안티오키아 지방의회와 비슷한 수준인데다, 새 수도 천도로 세워진 원로원임에도 실질적 권력이 전무했다. 359년 [[콘스탄티우스 2세]]가, '새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원로원을 로마 원로원과 동급으로 격상시키면서[* 여담으로, 로마 시에만 두던 로마 특별시장(Praefectus Urbi)도 이때 콘스탄티노폴리스에도 같이 두기 시작했다.] 정원도 2000명으로 늘렸다. 초기의 원로원은 여타 제정시기와 마찬가지로 과거 시대의 여러 형식적 내지 의식적(ceremonial)인 기능들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그 참여층은 로마 제국의 주요 정치참여 계층으로서의 입지를 점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테오도시우스 법전이나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비준하기 위해 원로원에 안건으로 회부하거나 원로원의 [[만장일치]]를 거치는 방식을 갖추었던 것은 그러한 요인이다. 형식성이 실질성과 분리되어 인식되는 근현대의 인식과 달리 과거에는 그러한 형식은 상당한 정도의 실질을 '담보'하는 요건으로서 인식되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스티니아누스]] 시절에 이르러 제국은 법률입법, 행정권의 최종적인 대권이 [[국가]]를 표상하는 1인의 황제의 권한으로 집중시키는 [[작업]]에 들어간다. 이것은 이후 1천 년간에 걸쳐서 꾸준하게 진행되는 하나의 경향으로서 [[지방(지리)|지방]] 위에 군림하는 [[정부]], [[계급]]을 초월하여 모두를 종속시키는 강력한 국가권력을 창출하는 일련의 과정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541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지명하는 집정관직이 철폐된다. 다만 그 권한을 명시한 법령 자체는 [[9세기]] 말이나 [[10세기]] 초, [[레온 6세]]가 신법령(Novellae)[*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의 [[그리스어]] 편집. 왜 이때까지 안 되어 있었어? 라는 의문을 제기할 법 하지만, 법전의 양이 워낙 많은 데다가, 7~9세기를 지배했던 외침, [[내전]], [[성상파괴운동]] 등보다는 우선순위가 밀릴 수밖에 없는 일이기 때문에 미루어져 있었다.]으로 폐지를 천명할 때까지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원로원의 중요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중심지인 콘스탄티노스 광장의 한쪽에 있는 원형의 건물이 의사당으로 이용되었으며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부터는 아예 궁궐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거대한 건물로 의사당이 옮겨졌다. 이 건물은 마그나브라(Magnaura: 라틴어의 Magna Aula에서 옴)[* Aula는 영어로 옮기면 court, 즉 궁정이란 뜻이 된다. 마냐(Magna)는 '대'라는 뜻이니 Magna Aula 는 즉 대법정, 대궁정 정도의 뜻이 된다. 누군가 이것을 aura 로 착각했는지 산들바람이라고 잘못 옮기기도 했다.(...) [[https://en.wikipedia.org/wiki/Magnaura|영어 위키백과]]에서는 'possibly from Latin: Magna Aula, "Great Hall"'이라고 나와 있다.]라는 이름을 부여받았으며, 황제가 사절단을 접견하는 중요한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레온 6세]]는 죽기 전 원로원 회기에 나가 전통적으로 황제들이 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963년]]에는 원로원 의장(Proedros)이라는 상당한 고위직 품계도 신설된다. 원로원의 여전히 남아있는 중요한 정치적 기능은 정치적 공백 시기에 부여받는 전권이었다. 당연히 원로원 내 상당한 숫자의 의원들은 하나같이 제국의 유력한 실력자들이었고 사회 주도층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결격사유를 가졌던 [[아스파르]]를 황제로 옹립하려는 시도를 했었으며, [[유스티니아누스]] 시대 [[니카 반란]]을 뒤에서 조장하고 의원들 사이에서 새 황제를 옹립하고자 하기도 했다.[* [[https://en.wikipedia.org/wiki/Lars_Brownworth|'Lars Brownworth'라는 미국의 교사 출신 역사 저술가의]] [[https://larsbrownworth.com/blog/2010/11/03/what-was-the-point-of-the-byzantine-senate/|블로그에는]] 'In 532 they participated in the Nika Riots hoping to replace Justinian with one of their own members.'라는 대목이 있다. 실패 후 보복으로 원로원 회당이 황궁의 접견 홀로 용도변경되었다. 마찬가지로 [[https://larsbrownworth.com/blog/2010/11/03/what-was-the-point-of-the-byzantine-senate/|바로 앞의 블로그에]] 'Justinian repaid them by confiscating the Senate House and turning it into a reception hall for the Great Palace.'라는 대목이 있다.] 인기가 없었던 [[이라클로나스]] 모녀를 폐위시키고 [[콘스탄스 2세|콘스탄스]]를 세운 후 아직 어렸던 그로부터 섭정을 부탁받았던 것도 원로원이었다. [[유스티누스 2세]]나 [[티베리우스 2세]] 등의 즉위를 결정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또한 [[콘스탄티노스 7세]]를 보호하는 데도 일조하였다. [[바실리오스 2세]] 사후 콘스탄티노스 8세도 몇 년 재위 못하고 딸들만 남긴 채 세상을 떠나 왕조의 단절이 시간문제일 뿐 가시화되자, 주요 관료들로 구성된 원로원은 이제 공식적으로 국정운영의 중심으로 도약하였다. [[로마노스 3세]][* 아르기(이)로스. Argyros]나 [[콘스탄티노스 9세]][* 모노마호(코)스. Monomachos]가 배출된 가문들이 바로 원로원에서 두각을 드러낸 이들이었다. 하지만 원로원의 문민통치는 결국 [[미하일 6세]] 시대에 이르러 권력중추에서 배제된 [[군부]]의 반발에 부딪혔고 결국 점차 무너지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