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원로원 (문단 편집) === 공화정 말기: 내전기 ===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군제개혁으로 기존의 로마 시민병 체계는 무너지고, 로마의 정치는 여러 군벌들에게 휘둘리게 된다. [[술라]]는 일시적으로 원로원의 권위를 강화하고자 했으나, 그의 부하였던 [[폼페이우스]], [[크라수스]]가 민중파를 자처하며 민중파였던 [[카이사르]]와 협력하면서 오히려 원로원이 약화된다.[*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로마 내전|내전]] 당시 술라 밑에서 마리우스파의 재산을 빼앗아 한몫 단단히 챙겨간 이력이 있다. 그런 그들이 민중파를 자처한 것만으로도 술라의 개혁이 명분도 실리도 없었다는 의미가 된다.] [[카이사르의 내전]]은 원로원의 권위에 치명타를 가했다. [[갈리아 전쟁]]이 종결된 후 인기가 높아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진짜배기 민중파였고 그가 갈리아 원정을 성공리에 마치고 로마에 돌아오면 그 다음 수순은 집정관이 되어(이미 카이사르는 안토니우스를 보내 호민관에 당선시켜 놓은 상태였다. 이유는 카이사르의 집정관 선거 사전작업을 위한 것) 농지법을 개량할 거라고 생각해 불만을 품은 원로원에서[* 원로원이 원로원 최종권고를 카이사르에게 한 이유는 어디까지나 카이사르가 집정관 선거에 나서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서였지 그가 갈리아 총독직을 오래 차지하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애시당초 카이사르가 갈리아 총독을 오랫동안(약 10년) 맡고 있었지만 그 동안 단 한 번도 원로원이 문제삼은 적이 없었다.][* 사실 당시 총독직따윈 신참 원로원 의원이 돈을 벌려고 가는 곳이나 마찬가지였다. 대표적으로 당시 가세가 기울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가 총독을 하면서 어마어마한 고리대금업을 통해 돈을 긁어모은 전력이 있었다.] 자신들과 성향이 가까운 폼페이우스를 같은 편으로 끌여들어 카이사르에게 원로원 최종 권고를 발동시키는데, 문제는 이 시점에서 폼페이우스와 원로원파는 전쟁을 치를 준비가 전혀 안 되었고 예상과 달리 이탈리아 도시들이 빠르게 카이사르 측으로 가담해버리면서 제대로 된 전투 하나 없이 이탈리아 본토를 그대로 카이사르에게 내주게 됐다. 히스피니아 지방의 폼페이우스 세력이 일소되고 그리스로 도해한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를 상대로 벌인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폼페이우스는 몰락했고, 망명 의도를 의심한 이집트 조정의 권신들에 의해 암살당하면서 내전은 사실상 종결된다. 남은 반 카이사르파 의원들이 아프리카에서 재기를 꾀했지만 [[탑수스 전투]]에서 집정관 경험이 있는 반 카이사르파 의원들 대다수가 전사하거나 항복하고 은퇴하여 원로원은 과거의 권력을 상실했다. [* 고대 로마에서 집정관 재직 여부는 군권의 순서를 가르는 매우 중요한 기준이었다. 카이사르 암살자들이 밀린 이유도 집정관을 역임한 무게감 있는 인사가 [[키케로]]를 빼면 한 명도 없었고([[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가 집정관 경험이 있긴 했지만 전임자가 사망하자 임명된 보결 집정관이라 그 권위는 낮을 수 밖에 없었다), 재력도 힘도 없었기 때문.] 카이사르 암살 이후에 원로원은 키케로를 중심으로 다시 주도권을 찾으려고 했지만 그 뒤를 이어서 [[안토니우스]]가 최고 권력자의 자리를 꿰어차면서 정국을 주도했기 때문에 [[키케로]]가 총대를 메고 '애송이' 옥타비아누스를 밀어줘서 안토니우스를 몰아내려고 했다. 하지만 키케로 자신의 생각과는 달리 젊은 옥타비아누스는 정치적인 능력은 이미 만렙을 찍은 인물이었고 군대 지휘권(당시 로마군은 거진 다 카이사르파였기 때문에 이들을 지휘하려면 그와 관계가 있는 인물이 필요했다.)을 무기로 삼아 역으로 원로원을 압박해 [[집정관]] 자리를 얻어낸다. 이후 [[무티나 내전]]에서 안토니우스가 패배하면서 키케로와 원로원은 쓸모가 없어진 옥타비아누스를 팽하려고 했으나, 이미 그 속셈을 다 꿰뚫고 있던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 파로서의 자신의 입지를 다진다는 목적을 달성하자 힘과 세력이 남아있던 안토니우스와 화해하는 것으로 뒤통수를 거하게 갈긴다. [* 눈엣가시같은 자신을 원로원이 봐주는 이유가 군대 지휘권 때문이라는 건 명백했고, 만약 자기 휘하의 군대가 해산된다면 옥타비아누스는 정말로 위험해지기 때문이었다. 카이사르가 루비콘을 넘은 것도 군대 해산 논란 때문이었다.] 여기에 카이사르파인 [[레피두스]]가 합류하면서 제2차 [[삼두정치]]가 결성되고 원로원 의원 130명을 추방에 처하는 것으로 정리했다. (카이사르파 공통의 적이었던 키케로는 예외. 신랄한 인신공격에 시달려 분노한 안토니우스가 꼭 죽여야 한다고 의견을 내자 레피두스는 거기에 동의하고 옥타비아누스는 2일간 안 된다고 버티다가 3일째에 양보하여 유일하게 죽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