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미관 (문단 편집) == 역사 == 1912년 12월에 일본인 하야시다 긴지로(林田金次郞)와 시바타 미요지(紫田三代治)가 세웠다. 흔히 "처음에는 경성고등연예관(京城高等演藝館) 이름으로 개관했다가 나중에 우미관으로 이름을 바꿨다."라고 알고 있으며 대부분 자료에도 그렇게 나와있지만, 사실 저 두 곳은 별개이다.[[https://ko.wikipedia.org/wiki/%EA%B2%BD%EC%84%B1%EA%B3%A0%EB%93%B1%EC%97%B0%EC%98%88%EA%B4%80|#]] 우미관은 조선인 전용 영화관이었다. 개관 당시 영화는 [[무성영화]][* 등장인물의 대사 소리가 안나오는 영화.]라서 내용을 설명해주는 [[변사]]가 있었는데, [[조선인]]과 [[일본인]]이 함께 관람하면 조선인 변사와 일본인 변사가 번갈아 설명해야 했기 때문에 관람하기 매우 불편했다. 그래서 우미관은 처음부터 관객을 조선인만을 대상으로 했고, 변사도 조선인으로만 두었다.[[https://www.kmdb.or.kr/history/contents/2912|#]] 1916년 12월에는 무려 미국 [[유니버설 픽처스|유니버설 스튜디오]]와 특약을 체결하여 조선에서 유니버설 영화를 독점 상영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https://www.kmdb.or.kr/history/contents/2912|#]] 그러면서 우미관은 조선인들 사이에서 명소가 되었고, "우미관 구경 안하고 서울 다녀왔다는 말은 거짓말"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전국에 알려졌다. 얼마나 인기가 있었냐면, 개관 당시 극장에 비치된 나무의자는 1,000명 정도 수용이 가능했는데, 항상 2,000명이 넘는 관람객으로 들어찰 정도였다고 한다. 1924년 5월에 건물 전체가 불탔고 같은 해 12월에 재건했다. 1926년부터는 경영체제를 관원들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것으로 전환했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603120023920202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6-03-12&officeId=00023&pageNo=2&printNo=1969&publishType=00020|#]] [[찰리 채플린]]의 《[[황금광 시대(영화)|황금광 시대]]》를 비롯해서 《[[카추샤]]》, 《[[몬테크리스토 백작]]》, 《[[파우스트(희곡)|파우스트]]》, 《[[마침내 안전!]]》 등의 유명한 서양 영화들을 대거 상영하여 독보적인 위치를 확보한 우미관은 1928년 최초로 ‘소리나는 활동사진’인 유성영화를 상영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위상은 많이 떨어졌다. 단성사 · 조선극장 등 새로 생긴 영화관들과 경쟁해야했는데 시설 수준이 비교적 떨어졌기 때문이다. 대신 관람료를 대폭 낮추어 1930년대 중반에는 조선에서 가장 많은 관객이 찾는 영화관이 되었다.[[https://www.kmdb.or.kr/history/contents/2912|#]] 관람료가 낮은 건 종로 5정목[* 현재 종로 5가.]에 있던 제일극장도 마찬가지였지만, 사람들은 우미관을 많이 찾았다. 왜냐하면 우미관이 있던 관철정[* 현재 관철동.] 주변에는 영화를 보고 나온 조선인 관객들을 대상으로 한 음식점, 선술집 등이 많아 영화보고 난 뒤 가볍게 술 한 잔 하기 편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현재도 우미관 터 주변으로 오락실, 술집, 음식점들이 많이 있다. [[종각역]] 젊음의 거리가 바로 그 곳.] 1939년 9월에 한 차례 고쳐지었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9092800239104008&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39-09-28&officeId=00023&pageNo=4&printNo=6608&publishType=00010|#]] 비록 초창기보다 위상이 낮아지긴 했어도 [[일제강점기]] 내내 단성사 · 조선극장 등과 더불어 [[경성부|경성]]의 유명한 극장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김두한]]이 우미관을 중심으로 활약하면서 더욱 더 유명해지기도 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이전 후 우미관.png|width=100%]]}}} || || {{{#fff '''1959년에 옮긴 후 우미관 모습'''}}} || [[8.15 광복]] 이후에도 명성을 유지하던 우미관은 1959년에 건물 전체를 화재로 잃은 뒤, 자리를 장안빌딩 뒤편으로 옮겼다. 이 때부터 쇠퇴하기 시작해 1960년대부터는 이름값마저 잃어 2류 재개봉극장으로 겨우 버티는 신세로 전락했다. 그러다 적자운영에 시달려 결국 1982년 11월 30일에 문을 닫았다. 현재 원래 우미관 터에는 우미관호텔과 홍길동중고서점이[* 같은 건물이다.], 이전했던 우미관 터에는 파노라마 뷔페 식당이 들어서있다.[* 후자 우미관 터에서 배우 [[안재모]]의 팬클럽 창단식이 열렸다.] [[종로|종로 2가]] [[KFC]] 앞 인근에 우미관 터였음을 알리는 팻말이 작게 세워져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