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온산병 (문단 편집) == 경과 == [[1983년]] [[농작물]]과 양식어장 피해로 시작되어 사람에게까지 발병함으로써 울산이 '''대한민국 공해병의 고향'''이라는 오명을 얻는 계기가 되었으며 '한국 공해문제의 대명사'라고도 불린 대표적인 공해병이다. [[온산국가산업단지|온산공단]]은 [[1974년]] [[구리]]·[[아연]]·[[알루미늄]] 등 비철금속공업 기지로 지정된 후 [[1980년대]] 들어 화학·제지·자동차부품 등 다양한 업종의 [[공장]]들이 입주해 종합공업단지로 탈바꿈하였다. 그러나 [[공업단지]] 개발을 위한 종합계획도 세우지 않고 개별 공장들이 공장을 세우는 바람에 전체 주민 1만 4천여 명 중 1800여 명만 이주하고 나머지 1만 2천여 명은 [[공단]]에 포위되거나 고립된 채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1983년]]부터 주민들에게서 [[허리]]와 팔다리 등 전신이 쑤시고 아픈 증세가 나타났다. [[1985년]]에는 이 지역 주민 1천여 명이 [[전신마비]] 증상을 보이자, 한국공해문제연구소가 '[[이타이이타이병]]의 초기 증세와 비슷한 병을 앓고 있다.'고 발표하여 언론의 집중적인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5031400239102023&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85-03-14&officeId=00023&pageNo=2&printNo=19673&publishType=00010|조명]]을 받고 여론을 환기시켰다. 이 증세를 두고 [[환경청]]과 학계, 주민 사이에서 [[공해병]] 논쟁이 일어났다. 처음 환경청은 1주일간에 조사 후 [[환경 문제]]가 아니라는 발표를 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온산 지역 주민들은 11개 공해배출업체를 대상으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해 인체피해 [[위자료]], 농작물 피해보상금 지급 판결을 받음으로써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공해피해에 대한 [[대한민국 법원|법원]]의 구체적인 인정을 받았다. 마침 [[19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국제 홍보에 나선 정부는 대규모로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홍보작업을 하려고 하였고 이슈가 된 사항들을 하나하나 처리하기 시작했다. 당시 [[대한민국 정부|정부]]도 공해 피해를 인정하고 주민들의 전원 집단이주를 결정해 오염원이 된 공단에 둘러싸인 주민 1만여 명을 소개하고 온산읍 덕신리와 인근 [[온양읍]] 남창리, 대안리로 분산이주시켰다. 이 때문에 과거 온산 읍내가 있었던 지역은 정주인구는 거의 없이 [[공단]]만 있고 주민들은 고개 너머에 있는 덕신리에 살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