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타쿠/옹호 (문단 편집) === 오타쿠는 정체성인가? === 우리 누구나 [[소수자]]적 특성을 하나씩 보유하고 있다.[* 단점, 약점이 하나라도 없는 사람은 사실 거의 보기 드물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걸 최소한 앞에서는 숨기려고 노력한다.] 누가 소수자인가의 기준은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 불안정하고 변화 가능한 것이다. 소수자 집단을 따질 땐 특정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서 존재할 뿐 상황이 바뀌기만 해도 소수자로서의 성격이 사라지는 경우가 허다할 정도이다.[* 이주 노동자가 자국으로 돌아갔을 때, 남성 비정규직 가장이 가부장적 분위기의 가정을 가졌을 때, 여성 우대 정책으로 남성이 피해를 볼 때 등등 사회 속 인간은 주변 상황이 바뀌면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도 변동이 생긴다. 한명의 인간이라 해도 여러 특성을 보유하기 때문이다. 또한 다수자의 지위를 가지고 태어났지만 후천적인 이유로 소수자가 되기도 한다. 교통사고로 장애인이 되는 예가 그렇다.] 우리가 특정 집단을 소수자로 분류하는 이유는 단지 그 집단이 집단 내의 공통적 특성으로 차별을 받아 [[기본권]]을 침해받기 때문이며 이를 개선하고자 저항성을 띄거나 정책적으로 우대 혹은 차별 폐지를 시행하여 [[평등권]]을 보장하기 위한 것뿐만이 아니라[* 이러한 관점은 소위 '시혜적 관점'이라고 하여 소수자들 사이에서도 부정적이다. 예를 들어 유엔의 [[세계인권선언]]에는 '장애'가 명시되지 않았는데, 당시에는 장애를 인권의 개념으로 접근한 것이 아니라 그저 '복지와 시혜'의 대상으로 접근하였기 때문이다. (장애를 '인권'의 관점으로 보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부터이다) 마찬가지로 동성애도 1980년까지는 그저 '정신병'이었을 뿐이며 WHO가 ICD에서 동성애를 삭제한 지는 2020년 기준으로 고작 30년에 불과하다. 비유하자면 기존의 소수자 정책이 '우리'와 '그들'을 나누는 '벽' 너머로 먹을 것을 던져 주는 것이었다면, 현재의 소수자 운동은 아예 그 '벽'을 허물자는 운동에 가깝다.] 그 대상을 차별받고 억압받는 객체의 지위에 머물게 하지 않고, 적극적인 주체의 지위로 복원하려는 의도이다. 소수자의 개념은 말 그대로 수적 열세도 포함하고 있지만 [[사회적 소수자]]를 정의할 땐 이런 순수한 뜻으로만 사용하진 않는다. Deleuze와 Guattari(1980: 133-134)는 소수자가 다수자와 단지 양적으로만 대립되는 것이 아니며 수와 상관없이 하위체계 또는 체계를 벗어난 것을 가리키는 복잡한 개념임을 강조하고 그 대표적 예로 여성을 들었다. Anthony Dworkin과 Rosalind Dworkin(1999)도 소수자의 엄밀한 정의를 위해 신체적ㆍ문화적 식별가능성, 경제ㆍ사회ㆍ정치적 권력의 열세, 사회적 차별 대우, 소수자 성원으로서의 집단의식 등을 그 조건으로 제시하고 있다. 장미경(2005:161)은 특히 소수자를 ‘표준적인 인간과는 거리가 먼 주변인’으로 규정하고 주변성과 타자성, 일탈이 극대화되면 범법자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며 단순히 숫자가 아닌 다수자의 지배에 대립하는 개념으로서, 수적으로는 다수자보다 더 많을 수도 있음을 지적하였다.[* 여성뿐만 아니라 소수 백인이 국가의 모든 인프라를 손에 쥐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흑인들도 다수면서 소수자인 아주 대표적인 예이다. 전근대 계급사회에선 소수자란 개념이 희미했으나 권리를 주장하는 [[시민사회]] 도래 이후 소수자는 계속 '발명'되고 있다.] 이렇듯 소수자의 키워드는 대립 차별 복종이다. 만민의 평등을 외치는 [[민주주의]]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이들 소수자 문제는 합리성과 이성의 위기 속에 더 드러나 보일 수 있었고 이들은 표면으로 ‘가시화’하기 시작했다. 몇몇 학자들은 [[다수결]]의 원칙에 기반한 민주주의 체제는 단지 형식적 기회의 평등만 보장할 뿐 실직적 다수 지배집단의 입장에서 소수자들의 권리와 고유 정체성을 부정하고 배제하는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다수결의 원칙이 소수자를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있음을 무시해서도 안 된다. 다수결의 원칙이란 '집단의 의사를 다수 의견에 의하여 결정하는 원칙'으로 정의된다. '대의 민주주의'를 소수자의 권리를 억압하는 동일성의 지배, 다수의 지배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고 이성적 담론과 합의를 강조하는 '토의 민주주의'를 대안으로 제시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러한 개념 속에서 오타쿠는 과연 어느 지점에 존재하는 집단일 것인가? 우린 위 단락에서 성소수자와 오타쿠를 비교한 내용에 다른 집단들을 무작위로 넣어도 어느 정도 비슷한 말을 써낼 수 있을 것이다. 낚시꾼, 흡연자, 비만, 작은 키, 노인, 학벌, 양심적 병역 거부자 등등 이들 집단 중 일부는 정말 사화적 소수자나 그에 준한 지위를 가지고 있지만 그 공감의 차이는 천차만별이다.[* 사실 성소수자와 유사한 오타쿠의 특성은 보편적인 4가지 특성이 아니라 '''음성적'''이라는 것에 있다(낚시꾼, 흡연자, 비만, 작은 키, 노인, 학벌, 양심적 병역 거부자를 음성적 - 떳떳하게 드러내지 않고 은밀하게 감추는 것 - 이라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는 수동적으로 식별되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오타쿠를 받아들이지 않으니 이들은 점점 음성화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점점 주류 사회에서 고립되어 '게토화'되어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타쿠는 어떤가? 성소수자에 비견될 만큼 기본권의 침해가 심각한가? 역사적ㆍ사회적 맥락에서 따질 수 있는가?[* 이 부분에서는 어느 정도 그러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한국에서 오타쿠 또는 오덕이란 근래 들어서야 대중 사이에서 인식이 개선되고 범주가 확장해가는 과정에 놓여 있는 부류이며, 그 자체가 전체 대중 사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계층은 아니다. (중략) 게다가 대상이 (역사적으로 앙금이 있는) 일본이다 보니 자연히 인식 선에 변수가 많이 발생했다. 이를테면 '[[일빠]](일본 빠돌이/빠순이. 즉 일본 문물을 맹목적으로 추종한다는 뜻)' 논란이 그러하다.(서찬휘, 「키워드 오덕학」, 생각비행. 267-268p.)] 다수자들에 대립하는 존재들인가?[* 한 인간이 여러 특성을 가질 수 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 이주노동자 출신으로서 비만에 장애 있고 키 작고 흡연자에 나이는 먹어가면서 저학력에 여호와의 증인 신도이면서 알 수 없는 성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오타쿠도 있을 수 있다. 이렇게 여러 소수자적 특성을 보유한 사람의 경우 자신이 차별 받는 요인 중 오타쿠적인 취향, 취미를 가졌다는 것의 비중이 적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ceteris paribus|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면]] 하나의 소수자적 요소도 차별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예를 들어 일반적으로 여성은 남성에 비해 권력의 열세를 가지나 상대 남성이 동성애자라면 '이성애자'인 여성은 '동성애자' 남성에 대해서 우세를 가질 수 있다. 전술하였듯이 소수자란 개념은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소수와 다수의 관계는 '대립'이라기보다는 '일방적 억압'에 가깝다. 예를 들어 주류 사회는 성소수자들을 억압하지만 성소수자들이 자신의 성적 지향이 더 '우수'하다고 말하기 위해 다른 성적 지향을 가진 '성다수자'들을 비난하는 일은 드물다. 오히려 '외로운 늑대'로 변하는 서유럽 무슬림이나 '채식주의자가 아닌 사람(채식주의자가 아닌 사람이라고 고기만 먹는 것은 아니므로 '육식주의자'는 적확한 표현은 아니다)이 야채가게를 습격하지는 않지만 채식주의자는 정육점을 습격한다'와 같이 다수에 저항하는 쪽이 예외에 속한다.] 이러한 점에선 의문이 남는 것이 사실인 듯하다. 그러나 [[피에르 부르디외]]가 지적했듯이 취향은 계급이건만, 우리는 계급 비판은 금기시해도 취향 비판은 비교적 자유롭게 하는 경향이 있다. 부르디외는 미적으로 편협하다는 것은 가공할 폭력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기호(嗜好)는 혐오와 분리시킬 수 없다'''고 단언한다. '다른 삶의 양식에 대한 혐오'는 계급 사이의 가장 두꺼운 장벽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Pierre Bourdieu, 「The Aristocracy of Culture」, 「Media, Culture and Society」, 2(1980), p.63.] 그리고 대중문화란 개인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자신의 취향은 어떤 것인지, 이것은 자신의 정체성에서 상당히 큰 부분을 차지한다. [[전국노래자랑]]을 좋아하는 집단과 [[뮤직뱅크]]를 좋아하는 집단의 정체성을 같다고 할 수 있을까?[* 김창남, 『인문학이 인권에 답하다』, 「드라마 주인공은 왜 사투리를 쓰지 않을까?」 . 철수와 영희. 73-74p. 이하 이 책을 ''인.인.답.''이라 표기함.] 또한 팬덤은 하나의 동질적인 문화가 아니라 수많은 차이와 다양성을 담고 있는 일종의 하위문화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선호하는 스타에 따라, 혹은 특정한 대중 미디어의 장르에 따라, 심지어 콘텐츠 플랫폼이나 특정한 테크놀로지와 기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양태로 구성된다. 이에 따라 팬덤은 개인의 자아 정체성, 그리고 집단 정체성의 구현과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된다. 팬덤 활동은 정체성을 구성하는 활동이자 정체성을 드러내는 활동이며, 이를 통해 팬덤 고유의 문화 자본을 형성한다.[* 홍종윤, [[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2275817&cid=42219&categoryId=51199|<팬덤 문화>]]] 무엇보다, [[헌법재판소]]는 헌법 11조에서 말하는 '사회적 신분'이란 '''사회에서 장기간 점하는 지위로서 일정한 사회적 평가를 수반'''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는 바[* 헌법재판소, 93헌바43], 위와 같은 점에 비추어 볼 때, 오타쿠는 '덕질을 하루 이틀 하고 말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장기간 점하는 지위'라 볼 수 있고[* 참고로 원하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는 직업도 그 직업이 사회적 평가를 수반한다면 사회적 신분에 해당한다.], '온갖 부정적인 사회적 평가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사회적 평가'를 수반한다고 볼 수 있는 바, '사회적 신분'으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