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이라트 (문단 편집) === 오이라트 연맹 === 오이라트가 역사에 등장한 시기는 몽골보다 늦지만, 하필이면 몽골의 4칸국의 경계선에 진출했었기에 [[몽골 제국]] 시대에 중요한 변수로 떠올랐고, 주로 원나라의 반대편에 서서 싸웠으며, 태조 [[홍무제]]가 [[명나라]]를 세우고 북진하면서 북원, 즉 몽골의 세력이 약해지자 몽골에 대항해 싸웠다. 성조 [[영락제]]의 5차에 걸친 북벌이 있었으나 오이라트는 도망쳐서 무사할 수 있었고, 영락제 사후 [[몽골 고원]]을 제패했다. [[1449년]] 오이라트의 군주였던 [[에센 타이시]]는 [[토목의 변]]을 일으켜 영종 [[정통제]]를 부획하면서 악명을 떨쳤다. 자세한 점은 [[토목의 변]] 항목 참조. 이렇게 몽골과 맞서 싸우면서 오이라트는 몽골 고원 서쪽의 유목민족들을 흡수했다. [[케레이트]], [[나이만]], [[메르키트]]를 위시해 칭기즈 칸의 몽골 통일 전쟁 당시 가장 거세게 [[카마그 몽골]]에 대항했던 부족들로, 이들은 워낙 덩치가 큰지라 말이 오이라트지, 실제로는 흡수된 부족 출신들이 원 오이라트계보다 훨신 많아졌다. 즉 이즈음에는 오이라트를 중심으로 서몽골의 유목부족들이 뭉쳤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후 오이라트의 최대 부족 순위는 준가르와 토르구트부터 나이만, 케레이트 계열이 되었다. 오늘날 [[알타이인]]의 기원이 되는 원 오이라트계 부족은 쩌리로 전락했다. 이렇게 세력을 키우고 있었던 에센 타이시는 당시 몽골의 카안(대칸)이자 매부였던 타이슨 카안에게 누이의 아들, 즉 외조카를 후계자로 정할 것을 요구했지만 당시 에센의 오이라트 세력을 두려워한 타이슨 카안은 에센의 요구를 거절했다. 분노한 에센은 타이슨 카안과 싸워 그를 패사시키고, 오이라트 여자와 혼인한 자를 제외한 칭기즈 칸의 [[황금씨족]] 전부를 학살했다. 당장, 훗날 [[다얀 칸]]이 되는 보르지긴 바트뭉흐가 살아남은 이유가 오이라트의 혈통을 가지고 있어서였다. 이때 칭기즈 칸 후손들이 가지고 있었던 기록과 문서 및 족보까지 소실되고 말았다. 그 다음 [[1453년]], 에센은 직접 대칸(카안)의 지위에 올라 연호를 '첨원'이라고 선포했다. 하지만 칭기즈 칸의 후손인 황금씨족만이 카안이 될 수 있다는 정통성을 깬 무리수를 둔 데다가 몽골 출신의 보르지긴 오복 키야트 황족들을 학살한 것 때문에 몽골인들이 좋게 볼 리가 없는지라 카안에 오른 지 2년 만인 [[1455년]]에 그의 자리를 노리던 부하 족장인 지원(知院) 알라크(Alag, 阿剌)에게 살해당했다. 오이라트 역시 에센의 시해 이후 혼란에 빠지고 약화되어 몽골 부족들의 공격을 받아 서쪽 자신들의 본거지로 후퇴했다. 이 후유증으로 몽골 고원은 동쪽의 몽골과 서쪽의 오이라트로 분열했다. 몽골도 이후 [[차하르]]와 [[할하]]로 분열했다. 그 할하도 할하 좌익, 할하 우익으로 나누어졌다. 현재 외몽골은 할하부 중심이고, 중화인민공화국령 내몽골은 차하르부 거주지이다. 몽골과 중국의 기록에서는 몽골에게 수시로 털린다고 나와 있으나 오이라트는 16세기 초반 [[알탄 칸]][* 알탄 칸은 몽골의 영웅 다얀 칸의 손자였지만 몽골의 대칸은 아니었다. 알탄 칸은 몽골 6부 중 투메드부의 칸일 뿐이었다. 하지만 여러 차례 명나라를 침공하고('''북로남왜''' 중의 '''북로'''), [[1550년]]에는 북경을 포위 공격하는 '''[[경술의 변]]'''을 일으키는 등 그 명성과 영향력이 몽골 전 부족에 퍼졌다. 그래서 당시 몽골의 대칸이었던 다라이손 구덴 칸은 알탄 칸에게 '게게엔 칸'이라는 직위를 주어 타협할 수 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다라이손 구덴 칸은 차하르로 근거지를 옮길 수밖에 없었으며, 대칸의 권력은 점차 쇠락하기 시작했다.]의 시대까지 몽골 제국의 수도였던 카라코룸을 유지했고, 이슬람측 기록에서는 [[모굴리스탄 칸국]]과 카자흐족을 수시로 털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 탓에 모굴리스탄 칸국은 북쪽의 준가르 분지를 상실했고, 준가르 분지는 오이라트족의 새로운 본거지가 되었지만, 알탄 칸의 등장으로 오이라트는 몽골 고원을 결국 상실하고 몽골에 복속되었다. 알탄 칸의 시대에는 [[티베트 불교]]가 오이라트를 포함한 전 몽골에 퍼져 오이라트도 티베트 불교를 받아들였고, 이것은 몽골 고원 유목민들이 티베트의 내정에 개입하는 시초가 되었다. 오이라트나 몽골 양자에게 티베트 불교가 중요해져 [[달라이 라마]]의 상징성이 높아졌다. 오이라트는 그전에는 이슬람의 영향권에 있었다고 추정된다. 실제로 14세기 말 오이라트 수령의 이름부터 마흐무드였다. 알탄 칸의 치세 이후 몽골이 티베트 불교를 밀자 오이라트계 준가르부도 이에 영향을 받아 결국 티베트를 드나들게 되었고, 티베트 불교로 집단 개종했다. 알탄 칸 치세 이전에 이슬람화했던 오이라트 부족의 무슬림들은 대개 텡그리 신앙 전통이 강한 무늬만 무슬림이었던 관계로 티베트 불교로 배교하거나 [[튀르크]]계인 [[위구르]]나 [[카자흐]]에 섞였으리라 추정된다.[* 카자흐인들 역시 러시아 제국의 지배 이후 [[타타르인]] 상인들과 접촉하기 전에는 이슬람에 대해 매우 단편적인 지식만 가졌었으며, 제사와 결혼을 전부 토속신앙 관습대로 진행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