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연총 (문단 편집) === 전후 === 여러 대신들이 전쟁에서 진 오연총과 윤관을 탄핵했다. 아직 두 원수가 돌아오기도 전인 6월 평장사 최홍사와 [[김경용(고려)|김경용]], 참지정사 [[임의(고려)|임의]]와 추밀원사 [[이위(고려)|이위]]가 오연총과 윤관에게 죄를 물을 것을 청하니 예종은 사람을 보내 두 사람의 부절과 부월을 미리 걷어버린다. 7월에 돌아온 오연총과 윤관은 부절과 부월이 없으니 복명할 수 없어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11월에는 간의대부 이재와 김연, 어사대부 최계방 등 간관들이 패전의 죄를 물으라고 간언하는데, 예종이 듣지 않자 각문 밖에서 강하게 간쟁한다. 이듬해 예종 5년(1110) 5월에는 최홍사와 김경용이 대간들과 함께 휴직해가며 처벌을 촉구한다. 그러나 대신들이 아무리 처벌을 요구해도 예종은 공신호를 박탈하는 것 이상의 죄는 묻지 않았다. 이 해 12월 수사도 [[중서시랑평장사]] [[판삼사사]]에 임명되면서 오연총은 복직한다. 오연총은 표문을 올리며 사양했으나 예종은 오연총이 '처음에는 의심하고 주저하며 망설였지만 나중에는 능히 적을 토벌하고 평정했으니, 목을 벤 것과 포로 잡은 것이 많고, 영토를 개척해 성과 해자를 열었다'( 初若遲疑而猶豫, 後能征討以蕩平, 斬馘旣多, 俘虜亦夥, 拓開封境, 築設城池.)고 하여 지위를 복구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복직할 것을 요구한다. 예종 7년(1112) 3월 시랑 임언과 함께 진사시를 감독해 정지원 등 28명을 선발한다. 오연총은 이후 수사도 판상서병부사(1112),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1112), 수태위 판예·병부사(1113), 판이부사(1114) 등을 역임한다. 예종 9년(1114) 12월에는 다시 추충공신(推忠功臣)호를 받는다. 예종 10년(1115) 병으로 관직에서 물러날 것을 청해도 예종은 끝까지 사직서를 수리하지 않는다. 예종 11년(1116) 3월 수태위에 임명되는데, 이 해 5월 10일에 62세의 나이로 죽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