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영친왕 (문단 편집) === 조선 이왕(李王)직 승계와 일제시대의 행적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pds/200903/07/25/a0116025_49b241028f7ec.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pds.joinsmsn.com/htm_2006111006241240004010-001.jpg|width=100%]]}}} || || {{{#gold '''영친왕에게 경례하는 2대 조선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gold '''하세가와 요시미치'''}}}]]'''}}} || {{{#gold '''[[1928년|{{{#gold '''1928년'''}}}]] [[프랑스|{{{#gold '''프랑스'''}}}]] 여행[* 사진은 [[모나코 공국]]의 궁전.]에서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 || 1926년 4월 26일 [[순종황제]] [[붕어]](崩御) 후 하루 뒤, 순종이 [[일제강점기]] 때 가졌던 '창덕궁 이왕(昌德宮 李王)' 지위를 계승한다. 이왕직 내부에서는 '사왕 전하(嗣王殿下/しおうでんか)'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가 한국에 올 수 있었던 것은 1년 중에 [[종묘]]의 제사가 있던 며칠 간 뿐이었고 거의 대부분을 [[도쿄]]에서 머물렀기 때문에 '[[도쿄|동경(東京)]] 이왕'으로 부르기도 했다. [[다이쇼 덴노]]와는 어린 시절에 만난 이후부터[* 1907년 [[대한제국]] [[대한제국/황사|황태자]]였던 당시에 [[다이쇼 덴노|요시히토 친왕]]이 [[황태자]] 신분으로 방한해서 대면한 적이 있다.] 나름의 친분이 있었는지 그가 지방에서 요양하다 죽기 직전에 그를 찾아와서 만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요시히토]]는 영친왕과 [[한국어]]로 대화하고 싶어서 황태자 시절부터 꾸준히 한국어를 배웠지만 당시 그는 [[뇌일혈]]로 말이 어눌해서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고 한다.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方子)와 혼인시킬 당시 요시히토도 마사코 여왕의 아버지인 나시모토노미야 노리마사 왕을 불러서 명령하는 등 관여한 사람이었지만 말이다. 일본에서 지내던 이복 여동생인 [[덕혜옹주]]가 [[조현병]]으로 의사표현을 못하자 이복오빠로서 후견인이 되어 소 다케유키와의 이혼을 허락했지만 자신의 생계가 어렵던 시절에도 정신병원에 돈을 대주는 등 그래도 오빠로서 나름대로 동생을 열심히 보살폈다고 한다. 그는 [[일본 제국|일제]]의 눈밖에 나지 않기 위해 많은 사람들과 두루 친분을 맺었다. [[관동 대학살]] 당시 영친왕도 조선인이기 때문에 혹시 모를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집을 버리고 궁내성 제 2대기실 앞에 쳐진 [[텐트]] 속에서 1주일 동안 피신해있었다는 일화가 있다. [[이방자]] 여사의 말에 의하면 조선인 학살 소식을 들은 영친왕은 슬픔과 분노로 목소리를 떨고 있었으며 1주일 내내 눈물을 글썽이며 괴로워했다고 한다. 이왕가의 대표적 인물로서 [[일본 육군]]의 엘리트 코스를 제대로 밟은 사람이기도 하다. 1917년에 [[일본육군사관학교]]를 29기로 졸업하고 [[소위]]로 군생활을 시작, 1923년엔 일본 육군대학을 35기로 졸업하고[* 이 당시 육군대학 제35기 동기가 [[홍사익]]이다. 영친왕과 홍사익을 포함하여 일제시대 일본 육군대학을 졸업한 조선인은 총 4명에 불과하며, 홍사익을 제외한 영친왕, 이건, [[이우]] 등 3명은 [[왕공족]]이다.] [[일본군]]의 육군참모본부에 배속된다. 1935년에는 [[대좌]]로 무난히 진급했으며, 이후 1938년 육군 소장, 1940년에는 육군 중장에까지 올랐다. 1928년 근위보병 제2연대 휘하의 [[대대장]], 1935년 우쓰노미야 보병 제59연대 [[연대장]]과[* 1935년 연대장을 맡았던 우쓰노미야 보병 제 59연대는 1936년 [[2.26 사건]] 당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예하 연대 병력을 이끌고 [[도쿄]]에 진주했다. 그러나 도착한 당일 이미 사건이 정리되어 이후 교전은 없었다. 이후 해당 연대는 [[만주]]를 거쳐 [[태평양 전쟁]]에서 [[팔라우]]에 배속된다. 제59연대 휘하의 1대대는 1944년 [[앙가우르 전투]]에서 [[옥쇄]]한다. 자세한 내용은 [[앙가우르 전투]] 참조.] 1941년 제 51사단 [[사단장]]을 역임한 뒤[* 1941년 7월 1일부터 같은 해 11월 16일까지 역임. 4개월도 채 안됐다. 앞선 59연대와 마찬가지로 우쓰노미야를 소재로 하던 부대로, 영친왕이 [[사단장]]으로 배속된 7월에 [[만주]]에서 일본 관동군특종연습에 동원되고 9월엔 제23군에 편입돼서 중국 [[화남#s-2|화남]] 방면으로 간다. 영친왕도 이때 화남에 있는 [[광둥성|광동]]으로 갔다가 교육총감부로 인사 이동되면서 [[일본제국|일본]]으로 귀환. 영친왕이 떠난 후 제51사단은 17군을 거쳐 18군으로 배속된 뒤 라바울에서 [[파푸아뉴기니]]의 라에-살라모아 지역의 방어를 위해 이동하던 중 [[미군]]의 공습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게된다. 이것이 바로 [[비스마르크해 해전]]에서 언급되는 댐피어 해협의 비극. 이후 보급 부족에 시달리다가 전체 인원의 8분의 1밖에 안남은 상태에서 종전을 맞이한다.], [[태평양 전쟁]] 말기에는 [[육군]] [[중장]]으로서 [[https://ja.wikipedia.org/wiki/%E7%AC%AC1%E8%88%AA%E7%A9%BA%E8%BB%8D_(%E6%97%A5%E6%9C%AC%E8%BB%8D)|육군 제1항공군]] 사령관을 역임했다. 일본 육군 제1항공군은 1942년 4월 13일 창설된 부대로서 주로 본토방공(미국의 일본 본토 폭격에 대응하기 위한 임무)을 책임지는 아주 중요한 부대였다. 사령관은 일본육군 중장, 사령관을 보좌하는 참모장은 일본육군 소장이 보임되었다. 부대 창설 이후 1945년 종전시까지 총 4명의 사령관이 있었는데, 다른 3명은 재임 기간이 길어봤자 1년도 안될 정도로 짧았지만 제3대 사령관인 영친왕은 거의 2년 가까이 사령관 자리에 있으면서 재임기간이 가장 길었다.[* 일각에서는 영친왕은 제1항공군에서의 실권이 없었고 내선일체의 상징 정도의 역할에 머물렀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영친왕이 제1항공군 사령관으로 재임했던 시기는 [[B-29]]를 앞세운 미국의 일본 본토폭격이 본격화되는 시기였으며, 이 중차대한 시기에 사령관이 허수아비에 그쳤다고 보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이며, 대전 중후반기 일본의 전쟁 수행에 중차대한 역할을 했다고 보는 것이 진실에 가깝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Image-Crown_Prince_Euimin.jpg|width=100%]]}}} || || {{{#gold '''일본군 예복을 입은 영친왕'''}}}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