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영친왕 (문단 편집) === 고통 어린 망국의 황태자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pds.exblog.jp/e0171614_1111167.jpg |width=100%]]}}} || || {{{#gold '''[[이토 히로부미|{{{#gold '''이토 히로부미'''}}}]]와 영친왕'''[* 옛 영상에는 [[이토 히로부미]] 앞에서 박수를 치며 뛰어 놀거나 그네를 타는 영친왕이 나온다. 이를 가지고 망해가는 [[대한제국]]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암군]]의 모습이라고 평하는 이들도 있지만 당시 그는 초등학교 고학년 나이(9~11세) 밖에 안 되었고 그런 현실을 알았더라도 어떻게 할 힘도 없던 어린 소년이었을 뿐임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사실 해당 사진 자체만으로도 [[조선왕조]] 전체의 입장에선 치욕적인 사진이다. 그러나 당시 이토 히로부미는 영친왕 앞에서는 친절을 베풀었다고 한다. 또래 아이들을 초대하여 같이 뛰어놀게 하면서, 영친왕이 일제에 대한 반항심 또는 적개심조차 가질 수 없을 정도로 만들었다. 여담으로 역사의 아이러니인지 1945년에는 맥아더가 히로히토를 찾아가서 의도적으로 비슷한 구도로 사진을 찍어서 일본 민중을 정신적으로 굴복시켰다.]}}} || 그가 [[대한제국/황사|황태자]]로 책봉된 건 전혀 행운이 아니었다. 그저 이름(허울)뿐인 황태자이고 '''어린 나이에 일본에 인질격으로 끌려가 몸이 만신창이가 된 뒤에야 겨우 고국에 돌아오는 고통뿐인 인생의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영친왕의 일본 생활은 앞서 말했듯이 경제적으로 문제는 없었다. [[이왕]]직을 승계한데다[* 이 때문에 명목상이나마 일제 치하 조선의 교과서 등에 [[천황]] 바로 뒤, [[총독]]보다 앞 자리를 차지해서 나와있다. 그리고 이왕가는 대다수의 일본 화족들이 부러워할만큼 막대한 유산을 갖고 있었다.], 현역 [[일본 육군|일본제국 육군]] [[중장]]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어쨌거나 이용가치가 있었고, 공식적인 특권 계층인 왕공족이었기 때문에 전시에도 안전한 후방 보직에 있었다. 그가 실제로 가장 고통스러워한 것은 육체적 고통이 아닌 고향에 대한 동경, 그리고 향수와 지독한 고독이었다고 한다. 이런 일화도 있다. 어느 날 [[이방자]] 여사가 공기에나 쓸 새하얀 조약돌을 발견했다고 한다. 다 큰 어른 방에 있을 듯한 물건이 아니라서 물어보니 그가 머뭇거리다 답하길 "어릴 적 고향이 너무 그리워 한국으로 [[창덕궁]] 낙선재에 있는 조약돌을 보내달라고 편지를 보냈고, 마침 황실에서 일본으로 가는 사람이 있어 조약돌을 전해줬다"는 것이었다. 그 뒤로 그리움이 사무칠 때면 조약돌을 계속 바라보고 만졌다고 했다고 한다. 자신의 아버지 [[고종(대한제국)|고종]]은 물론 어머니 [[순헌황귀비]]의 임종도 지켜보지 못했으며[* 다만 엄귀비의 경우 [[장티푸스]]라는 무서운 전염병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애당초 임종을 직접 지켜보기 힘들었으며, 어렵게 환국하긴 했으나 역시 전염의 우려(당시 전염병은 한명이 걸리면 열에 일곱이 걸려 손써보지 않고 죽게 되는 불치병일 정도로 당시 수준으로는 전염병을 치료는 커녕 방치만 한다.)로 생모의 시신을 보여주진 않았다. 아니, 보여줄 수 없었다.] 그나마 [[순종(대한제국)|순종]] 사후에 이왕직을 승계하고 나서야 [[종묘]]에 들르는 것이 가능했다. 그나마도 짧은 기간 내에 다시 돌아와야 했기 때문에 제사는 지낼 수가 없었고 그는 그 때문에 자신의 집에 위패를 세워 간이 종묘(개인 사당)를 만들었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제약이 심한 생활 속에서 몇십 년을 [[일본]]에서 살았으나 고국으로 돌아가겠단 희망과 의지는 놓지 않았는지 '''유창하게 한국어를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것도 억양, 문법 모두 틀리지 않고 말이다. 1950년에는 "A First Book of Korean"이라는 제목의 한국어 교본을 레지널드 호러스 블라이스(Reginald Horace Blyth)와 함께 [[영어]]로 직접 집필하기도 했다.[* 이 책에서 나온 대부분의 예문은 [[하오체]]로 써 있으며, 모두 영친왕이 직접 손글씨로 쓴 것이다. 삽화도 영친왕이 손수 그렸다. 책의 첫 예문은 인상적이게도 '''나는 고기를 머그오(I eat meat)'''였다고 하는데, 보기에 따라서는 그의 유복했던 유년기가 엿보이는 대목으로 볼 수도 있겠다.] [[이형근]] 장군의 회고에 의하면, [[일본육군사관학교]] 재학 시절 조선인 동기생 생도들과 함께 영친왕을 찾아갔다고 한다. 앞선 주석에서 설명했듯 영친왕은 허울 뿐이긴 하지만 명목상으론 조선 총독보다 높은, 조선의 대표자격인 상징 그 자체였다. 식민지 출신으로서 심정적으로 기댈 만한 어르신(당시, 고종과 순종은 세상을 뜨고 없었기에 실질적으로나 명목상으로 '조선' 자체의 '''상징''')이었던 셈. 영친왕은 조선인 생도들을 반갑게 맞아주었으나, 실내에 조선인밖에 없는데도 [[일본어]]로 격려를 해주어 조금은 서글픈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옥음방송|천황의 항복 선언]] 다음 날, 다시금 영친왕을 찾아갔을 때 굉장히 유창한 [[한국어]]를 쓰는 것을 보고 정말 놀랐다고 한다. 주변에 한국어를 유창하게 사용할 수 있는 화자가 없었단 걸 생각하면, 한국어를 전혀 잊지 않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조선에서 살았던 시간보다 일본에서 살았던 시간이 더 길었기 때문인지, 조선인이라기보다는 [[일본인]]에 더 가까운 태도를 보였다는 일부 평도 있다. 물론 워낙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끌려가 일본에서 성장한 탓에 아무리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손 치더라도 그 한계가 뚜렷했기 때문일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