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영친왕 (문단 편집) == 여담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영친왕.jpg|width=100%]]}}} || || {{{#gold '''권오창 화백이 그린 영친왕 초상화'''}}} || 동강 권오창 화백이 그의 영정을 그렸다.[[http://www.sdnn.co.kr/article/13225|#]] 권오창 화백은 이외에도 [[고종(대한제국)|고종]], [[명성황후]], [[순종(대한제국)|순종]]의 초상화도 직접 그린 바 있다. * 생전에는 구 [[황실]]에 대한 일말의 예우심과 맞물려 동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한국 [[왕공족]]과 일본 [[황족]]을 상징적으로 묶어놓은 [[이방자]] 여사와의 결혼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비롯하여 [[독립운동가]]들은 영친왕을 [[매국노]]로 여겼으며 이는 공화정에 반대하던 복벽파의 몰락을 야기한 큰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특히 [[독립신문]]은 [[경술국치|국권을 빼앗고]] [[고종(대한제국)|자기 아버지]]를 살해한 [[일본제국|원수의 나라]]에 장가를 들었다고 하여 정면으로 '금수(禽獸)'라는 멸칭을 붙였으며 독립운동가 서상한은 영친왕 부부를 폭사시키고자 사제 폭탄을 준비하다가 발각되어 미수로 그쳤다. 이들 부부의 큰아들 이진의 독살설을 뜬소문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다. * [[8.15 광복]]을 거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일본군]] [[중장]]을 지낸 것을 비롯해 [[일본 정부]]로부터 매달 돈을 받고 지냈다는 점, 나아가서 [[중일전쟁]] 시기에는 중국의 화북지역 등 주요 전선에서 선전 활동을 주 임무로 복무한 것이나 일본 본토 후방 방위를 담당하던 제1 육군 항공군 사령관 등의 지휘를 맡았다는 점,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일본 제국|일제]]의 선전 활동에 이용되었다는 점을 들어 [[친일파]]로 기록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었다. 영친왕만이 아니라 여러 왕공족이 비슷한 활동을 했고 군인으로서의 계급도 높았기 때문에[* 일제는 왕공족 출신만이 아니라 일본 황족 출신 군인들도 전선에 배치시켰는데 이는 전투에 참전시키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다. 일본은 이들을 위험한 전투가 일어나는 최전선 지역이 아니라 주로 일제가 점령한 거의 후방지역에 배치했다. [[치안]]을 확보하기 위해서 점령 지역에 가서 주로 높으신 분으로서 그 쪽 지역을 순찰, 순시하고 거기에 주둔하는 [[일본군]] 부대를 방문해 격려하는 전쟁 수행에 있어서 이들을 격려하고 응원하는 역할 정도만 했다.] 왕공족을 친일파로 분류해야 할지 논의가 있었는데 '''왕공족에게 친일보다는 망국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 타당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왕공족은 적극적으로 [[친일]] 활동을 했는지 유무로 친일파인지를 판단했는데 영친왕과 [[이우]]는 어린 나이에 사실상 일본의 인질로 끌려간 처지를 감안해 제외되었다. 왕공족들 대부분이 일본군 [[장교]]로 복무했고 그도 역시 일본에 온 뒤 일본 황족급에 해당하는 교육을 받았는데, 당시 일본에서는 황족 남성이라면 누구나 군사교육을 받았다.[* 사실 왕족이 군사교육을 받고 장교가 되는 일 자체는 당대 기준으로도 매우 흔한 일이었고, 일본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유럽에서도 계승 서열에서 밀린 차남 이하의 왕족/귀족 장정들은 군인이나 성직자로 빠지는 게 일상이었고, 차기 왕위 계승자들조차 20대에 위관급 장교인 시절에는 현장에서 뛰어야 했다.] 이에 따라 육군유년학교 예과에 진학하고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으니 사실상 다른 학교로 가는 것 자체가 어려웠으며 일본군으로서 [[한반도]]에서 [[조선인]]을 탄압하거나 중국에서 [[중국인]]들을 학살한 일선 지휘관도 아닌 후방 부대의 [[얼굴마담]]에 불과했다는 이유를 들어 일제에 적극 가담한 [[역적]] 타이틀을 씌우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주장이 있다. * [[유럽]] 순방을 했을 때 여러 인물을 만났는데, [[2차 세계 대전]] 이전의 유럽 정세와 인물관, 유럽 왕족들의 독특한 면모를 엿볼 수 있어 흥미롭다. [[보불전쟁]] 전공이던 영친왕은 매우 억센 인상을 주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와 1차 세계 대전에서의 전략전술에 대해 논한 후 연합군이 배상금으로 독일의 혼을 꺾으려고 하는 데 독일 국민이 절대 굴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하자 감동해 '''"그분은 독일의 혼과 힘이 들어 있는 분"'''이라고 누차 강조했으며 역사와 문화를 매우 좋아해 조선에 직접 방문했고 조선의 문화에 조예가 깊기도 했던[* 후술하겠지만 조선뿐만 아니라 고려와 통일신라 시대를 거쳐 삼국시대까지 이르는 역사와 문화까지 줄줄이 꿰고 있었다.] [[구스타프 6세 아돌프]]가 자신의 콜렉션인 고려자기를 보여주며 특히 신라 문화가 조선에서는 제일이라고 칭찬한 뒤 '''"동양 하면 사람들은 인도와 중국만을 떠올리지만 코리아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 이런 문화를 창조할 수 있는 정신적인 힘은 무엇으로도 멸망시킬 수 없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하자 깊이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 생전에 영친왕은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1111500329114007&edi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1-11-15&officeId=00032&pageNo=14&printNo=14229&publishType=00010|그림 그리기]]를 좋아해 당대 일본 최고의 [[화가]]로 유명한 후지시마 다케지(藤島武二)에게 사사(賜寫, 그림을 베껴서 주다)하기도 했다. * 패전 후 [[프리메이슨]]에 가입하였다. 일본 진입을 위해 사회 저명인사와 귀족계급을 우대하던 당시 일본 프리메이슨의 정책에 따라 전전일본의 지배층 다수가 프리메이슨에 가입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영친왕은 [[관동]]로지의 초대 워십풀마스터를 역임하는 등 뚜렷한 활동을 보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