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영친왕 (문단 편집) ==== 사후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kocis.go.kr/king-150429-2.jpg|width=100%]]}}} || || {{{#gold '''영친왕 부부의 합장묘 영원(英園)'''}}} || 장례는 '''9일장'''이었다. [[5월 9일]] [[창덕궁 희정당]] 앞에서 영결식을 거행한 후 영친왕의 시신을 모신 재궁을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위치한 [[고종(대한제국)|아버지]]와 [[순종(대한제국)|형]]이 안장된 [[홍유릉]] 능역으로 운구하여 '영원(英園)'이란 이름이 붙은 조선/대한제국 왕릉 최후의 능원에 안장했다. 신위는 '''의민황태자 영왕'''(懿愍皇太子 英王)으로서 [[종묘]]에 모셨다. 그는 [[대한제국]]의 [[대한제국/황사|황태자]]로 있다가 나라가 망한 이후 이왕에 올랐다. 생전에 황제였던 적은 없으므로 그의 무덤을 [[홍유릉]]과 달리 황제릉으로 조성하지는 않았다. 대한제국 시대 황태자의 무덤을 만든 전례가 없었으므로 영친왕의 무덤을 조영(造營, 무덤의 양식을 구성하는 일)할 때 어떤 무덤을 전례로 따를 것인지 논의한 결과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에 있는 [[효명세자|문조]]의 [[수릉]]을 전거로 삼았다. 조선시대 왕세자의 원(園) 중 가장 나중에 조영되어 시기상 가장 가까웠으며, 뒷날 '''왕(익종)'''과 '''황제(문조)'''로 각각 추존받았기 때문이다. 황제릉과 왕릉은 석물의 배치방법, 참도(포장된 길) 배치, 정자각 건물의 양식 등이 서로 다르다. 실제로 [[홍유릉]]과 다른 조선왕릉을 비교해보면 고종과 순종의 능은 황제릉으로 조선왕릉 중에서도 따로 돋보이는 구조를 하고 있다. 반면 영친왕의 무덤은 시기적으로는 더 나중에 만든 곳임에도 고종 이전 다른 조선 왕릉들과 기본적으로 같은 제후왕릉 양식임을 찾아볼 수 있다. 이후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에서 그를 '의민황태자 영왕(懿愍皇太子 英王)'이라는 [[사시]](私諡)로 [[추존]]했다.[* [[대한제국]] 황족들을 다룬 책인 《제국의 후예들》에 의하면 '의민(懿愍)'의 뜻은 '평생 동안 고난의 길을 걷다'라고 한다. 시호가 원래 고인의 생전 행적을 평가하는 것이긴 하지만, 영친왕의 경우에는 그의 인생 자체가 그대로 투영된 것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당시 그의 [[대한제국/황사|황태자]] 책봉은 태황제로 물러난 [[고종황제]]의 의지로 진행되었기에 [[전주 이씨]] 대동 종약원에서는 '의민황태자 영왕'이란 이름으로 조선 왕실/대한제국 황실의 구성원 중 생전에 왕이나 황제는 아니었지만 정말로 딱 한 자리 남은 종묘 영녕전에 마지막으로 배향했다. '민(愍)'은 그 시법상, 불행한 삶을 살거나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인물에게 위로의 의미를 담아 올리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고려의 [[공민왕]]이나, [[유비]]가 후한의 마지막 황제 [[헌제|유협]]에게 올린 시호인 효민황제(孝愍皇帝)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영친왕과 이후 사망한 이방자 여사의 신위를 마지막으로 종묘의 정전 및 영녕전의 제실(祭室)이 정확하게 채워져서 남지도 부족하지도 않고 딱 맞았다.[* 여담으로 [[구한말]]에 조선 왕실 종묘의 정문인 창엽문(蒼葉門)이 조선 왕조의 운수를 알린다는 '''도참설(圖讖說)'''이 돌았다. 창(蒼)을 [[파자]]하면 十十, 八, 君(28임금)을 말하고 엽(葉)은 二,十, 世, 木(20세)가 된다. 당시 26대 임금인 [[고종(대한제국)|고종]]은 이 도참설을 듣고, 자신의 2대 후에 조선이 망하는 것인지에 대해 불안하게 여겨 역술가를 불러 자문을 구할 정도였다. 그런데 조선왕조 왕계도를 보면 대수(代數)가 20대이고, 영친왕을 포함하면 28왕이 되니, 도참설이 예언에 딱 맞아 떨어진 셈이다.] 영친왕의 장례식 때 [[일본]] 황족들이 비공식적으로 한국을 방문해 조문을 왔다.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의 부인이자 [[이방자]] 여사의 이종 사촌 여동생인 세쓰코(勢津子) 비,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 부부 등이 빈소에 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