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영력제 (문단 편집) == 일화 == 특이한 이야기가 있는데, 운남에서 밀려나면서 정성공과의 연락이 거의 단절된 상태에 이르자 명나라 왕조 재건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듯 뜬금없이 '''[[교황]]'''에게 SOS를 친 것을 들 수 있다.[* 물론 아예 뜬금없는 것은 아니고, J.M. Roberts의 「A History of Europe」에 의하면 주유랑은 중국 역사상 유일한 가톨릭 군주였던 것은 물론이고 그의 모친인 태후 마씨와 그의 후계자 모두 Andreas Xavier Koffler 신부에게 세례성사를 받았었다고 한다. 얄궂게도 영력제와 함께 교살된 아들 주자훤(朱慈煊)도 세례성사를 받았으며, 세례명은 콘스탄티노였다.] 남명 황실에 와 있던 [[예수회]] 사제가 주유랑의 태후 왕씨(세례명 안나)의 청을 받아들여 교황과의 연락을 주선한 것이다. ''''도와줘서 명나라 재건이 성공하면 황제인 내가 책임지고 솔선해서 중국에 가톨릭 신앙을 퍼뜨리겠다''''는 파격적인 조건까지 제시한 상태였으나, 당사자인 교황 [[알렉산데르 7세]]의 미온적 반응과 너무 먼 지리적 간극, 연락책을 맡은 [[https://en.wikipedia.org/wiki/Micha%C5%82_Boym|보임(Boym)]] 신부의 죽음 등으로 인해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이후 이것저것 여의치 않자 버마로 도망치듯 망명했으며 그 결과는 상술한 바와 같다. [[파일:external/b1cd84212d77f00b40d2fcb5e1f91445f31eb685cd24f6e6217699a05000c539.jpg|width=250]] 태후 왕씨가 교황에게 보낸 구조 요청 문서. [[바티칸]] 도서관 비밀문서고에 보관되어 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ircher-100-Elena-Wang-letter.png|width=300]] 라틴어 번역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