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력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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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 계왕(桂王)
초대 단왕 주상영

2대 주유랑

폐지





남명 제19대 황제
소종 광황제 | 昭宗 匡皇帝

묘호
소종(昭宗)
시호
응천추도민의공검경문위무예인극효광황제
(應天推道敏毅恭檢經文緯武禮仁克孝匡皇帝)
연호
영력(永曆)
성씨
주(朱)

유랑(由榔)
부황
예종(禮宗)
모후
소성태후(昭聖太后) 마씨(馬氏)[1]
황후
효강광황후(孝剛匡皇后) 왕씨(王氏)[2]
생몰
1623년 ~ 1662년
재위
1646년 ~ 1662년

1. 개요
2. 생애
3. 일화
4. 사후 추서
5. 기타



1. 개요[편집]


남명의 마지막 황제. 명나라 전체로는 19대이며 재위 기간은 1646년 ~ 1662년이다.

묘호는 소종(昭宗), 시호는 광황제(匡皇帝), 정식 시호는 응천추도민의공검경문위무예인극효광황제(應天推道敏毅恭檢經文緯武禮仁克孝匡皇帝)이며 이는 뒤에 정성공이 묘호와 함께 추서한 시호이다. 연호가 영력(永曆)이라 영력제(永曆帝)라고 부른다.

만력제의 손자로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사촌에 해당하며 황제에 즉위하기 전에는 영명왕(永明王)의 지위에 있었다. 만력제의 7남 계단왕(桂端王) 주상영(朱常瀛)[3]의 4남이었다.[4]


2. 생애[편집]


1643년, 아버지 주상영과 함께 광서(廣西)로 도망쳤다. 이 후 주상영이 사망하고 계왕(桂王) 지위를 세습한 둘째 형도 사망하자 뒤를 이어 계왕이 되었다.

1644년, 이자성의 난으로 숭정제자살하여 명나라가 멸망했고, 뒤이어 즉위한 융무제 주율건이 청군에 생포되어 처형당하자 조경(肇慶)으로 피신하여 1646년 황제로 즉위했다. 타지에서 황제로 즉위한 소무제 주율오와는 정통성 문제로 광주 삼천에서 대립했다가 대패하고 위기에 처했으나, 편리하게도 청군이 주율오를 발라버리고 멸망시켜 줬다.

당시 명나라는 정성공의 협력 하에 한때 광동, 광서, 귀주, 운남을 지배했다. 그러나 1650년, 청군이 경동과 계림을 함락시키고 1656년에는 주산 열도를 점령했다. 이 때 주유랑은 화남 일대를 방랑하다 1659년 운남까지 잃자 버마로 도주했다. 이 때 그를 따른 가신은 불과 650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며 1662년 청나라에 투항한 오삼계가 버마까지 쳐들어왔다. 결국 청군의 위세를 무서워한 버마왕 망백(莽白)에 의해서 곤명에 있던 오삼계에게 압송되었다.

오삼계는 청나라에 대한 본인의 충성심을 직접 증명할 요량이었는지 주유랑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을 모두 직접 목졸라 죽였다.[5] 1662년 6월 1일이었다. 이렇게 영력제 일가는 곤명에서 살해되었고, 대만에서 영력제의 죽음을 전해들은 정성공도 "내 소임을 다하지 못했으니 무슨 낯으로 황천에서 황제 폐하를 뵐 수 있겠는가"라며 절규하다 한 달 뒤인 6월 23일에 죽었다.[6] 명나라는 잔존세력 없이 완전히 멸망했다.

이후 오삼계가 삼번의 난을 일으키면서 반란의 대의명분으로 명나라의 부흥, 복수를 내걸면서 자신이 죽인 영력제의 묘를 참배하고 곡을 하기도 했으나, 애초에 산해관을 열어 청군을 맞이한 것도, 남명의 저항 세력을 모두 박살낸 것도, 남명 최후의 황제 영력제를 직접 교살한 데다 반란 직전까지 청나라의 번왕으로 부귀영화를 누리던 인간이 이제 와서 그렇게 나온다고 감동하는 옛 명나라 백성들도, 그를 지지해 반청운동에 나선 명나라의 유신 및 장수들도 없었다.

영력제는 일곱 아들들이 있었는데, 모두 요절하거나 행방불명됐거나 오삼계에게 살해되었다. 남명 마지막 황제의 최후


3. 일화[편집]


특이한 이야기가 있는데, 운남에서 밀려나면서 정성공과의 연락이 거의 단절된 상태에 이르자 명나라 왕조 재건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듯 뜬금없이 교황에게 SOS를 친 것을 들 수 있다.[7] 남명 황실에 와 있던 예수회 사제가 주유랑의 태후 왕씨(세례명 안나)의 청을 받아들여 교황과의 연락을 주선한 것이다. '도와줘서 명나라 재건이 성공하면 황제인 내가 책임지고 솔선해서 중국에 가톨릭 신앙을 퍼뜨리겠다'는 파격적인 조건까지 제시한 상태였으나, 당사자인 교황 알렉산데르 7세의 미온적 반응과 너무 먼 지리적 간극, 연락책을 맡은 보임(Boym) 신부의 죽음 등으로 인해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이후 이것저것 여의치 않자 버마로 도망치듯 망명했으며 그 결과는 상술한 바와 같다.

파일:external/b1cd84212d77f00b40d2fcb5e1f91445f31eb685cd24f6e6217699a05000c539.jpg
태후 왕씨가 교황에게 보낸 구조 요청 문서. 바티칸 도서관 비밀문서고에 보관되어 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ircher-100-Elena-Wang-letter.png
라틴어 번역본.


4. 사후 추서[편집]


정성공은 주유랑이 죽자 국상을 선포하고 애도 기간을 가진 뒤 소종(昭宗) 응천추도민의공검경문위무예인극효광황제(應天推道敏毅恭檢經文緯武禮仁克孝匡皇帝)라는 묘호와 시호를 추서했다.


5. 기타[편집]


조선에서는 명나라 멸망 이후 조선중화주의에 입각하여 사대부들이 조선이야말로 명나라의 진정한 후계라고 생각하고 선대 왕조인 명나라의 역사를 정리하면서 이른바 남명 3황제[8]를 정통으로 인정하는가 여부를 두고 의견 차이가 생겼다. 1644년 북경이 함락되고 숭정제가 자살함으로써 명나라는 멸망하였고 조선은 남명과 직접적 외교 관계를 수립한 일이 없으므로 우리가 알던 명나라는 숭정제까지라고 보는 입장과 남명 3황제가 어쨌든 명나라 황실의 혈통을 이어서 즉위하였고 영력제의 연호를 사용한 책력(달력)을 소지한 남명 사람들이 1667년 제주도에 표류함으로써[9] 영력제의 책력이 조선에 전달되었으니 외교 관계가 수립된 것과 같으므로 명나라는 영력제까지라고 보는 입장으로 나뉘었다. 후대에도 반(反清) 사상을 유지하던 사대부들은 각각 의견에 따라 숭정 연호 또는 영력 연호를 각종 비공식 기록물에서 청나라 연호 대신 오랫동안 사용하였는데, 영력보다는 숭정 쪽이 주로 많이 쓰였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숭정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한편 동녕 왕국에서는 영력제가 사망한 후에도 1683년까지 영력 연호를 계속 사용하였다. 이 때문에 위에서 서술한 남명 사람들이 제주도에 표착한 사건에서 이들이 지닌 책력에는 영력제 사후의 연도인 영력 21년(1667)이 적혀 있었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09 21:01:43에 나무위키 영력제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세례명은 마리아.[2] 세례명은 안나.[3] 아들에 의해 예종(禮宗) 체천창도장의온홍흥문선무인지성효단황제(體天昌道莊毅溫弘興文宣武仁智誠孝端皇帝)로 추존되었다.[4] 주상영은 여덟 아들들이 있었는데 주유랑을 제외하면 모두 요절했다.[5] 황후는 그릇을 깨뜨려서 그 파편으로 목을 그어 자결했다.[6] 물론 이 자체의 충격도 크긴 했지만, 이미 이전부터 정성공 역시 중병에 걸려서 헛것을 볼 정도로 오늘내일하던 상황이었다.[7] 물론 아예 뜬금없는 것은 아니고, J.M. Roberts의 「A History of Europe」에 의하면 주유랑은 중국 역사상 유일한 가톨릭 군주였던 것은 물론이고 그의 모친인 태후 마씨와 그의 후계자 모두 Andreas Xavier Koffler 신부에게 세례성사를 받았었다고 한다. 얄궂게도 영력제와 함께 교살된 아들 주자훤(朱慈煊)도 세례성사를 받았으며, 세례명은 콘스탄티노였다.[8] 홍광제, 융무제, 영력제[9] 정확히는 영력제가 사망한 1662년 이후에도 영력 연호를 유지하던 동녕 왕국 사람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