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영력제 (문단 편집) == 생애 == 1643년, 아버지 주상영과 함께 광서(廣西)로 도망쳤다. 이 후 주상영이 사망하고 계왕(桂王) 지위를 세습한 둘째 형도 사망하자 뒤를 이어 계왕이 되었다. 1644년, [[이자성]]의 난으로 [[숭정제]]가 [[자살]]하여 명나라가 멸망했고, 뒤이어 즉위한 [[융무제]] 주율건이 청군에 생포되어 처형당하자 조경(肇慶)으로 피신하여 1646년 황제로 즉위했다. 타지에서 황제로 즉위한 [[소무제]] 주율오와는 정통성 문제로 광주 삼천에서 대립했다가 대패하고 위기에 처했으나, 편리하게도 청군이 주율오를 발라버리고 멸망시켜 줬다. 당시 명나라는 정성공의 협력 하에 한때 광동, 광서, 귀주, 운남을 지배했다. 그러나 1650년, 청군이 경동과 계림을 함락시키고 1656년에는 주산 열도를 점령했다. 이 때 주유랑은 화남 일대를 방랑하다 1659년 운남까지 잃자 [[버마]]로 도주했다. 이 때 그를 따른 가신은 불과 650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며 1662년 청나라에 투항한 [[오삼계]]가 버마까지 쳐들어왔다. 결국 청군의 위세를 무서워한 버마왕 망백(莽白)에 의해서 [[곤명]]에 있던 오삼계에게 압송되었다. 오삼계는 청나라에 대한 본인의 충성심을 직접 증명할 요량이었는지 주유랑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을 모두 직접 목졸라 죽였다.[* 황후는 그릇을 깨뜨려서 그 파편으로 목을 그어 자결했다.] 1662년 6월 1일이었다. 이렇게 영력제 일가는 곤명에서 살해되었고, 대만에서 영력제의 죽음을 전해들은 [[정성공]]도 "내 소임을 다하지 못했으니 무슨 낯으로 황천에서 황제 폐하를 뵐 수 있겠는가"라며 절규하다 한 달 뒤인 6월 23일에 죽었다.[* 물론 이 자체의 충격도 크긴 했지만, 이미 이전부터 정성공 역시 중병에 걸려서 헛것을 볼 정도로 오늘내일하던 상황이었다.] 명나라는 잔존세력 없이 완전히 멸망했다. 이후 오삼계가 [[삼번의 난]]을 일으키면서 반란의 대의명분으로 명나라의 부흥, 복수를 내걸면서 자신이 죽인 영력제의 묘를 참배하고 곡을 하기도 했으나, 애초에 산해관을 열어 청군을 맞이한 것도, 남명의 저항 세력을 모두 박살낸 것도, 남명 최후의 황제 영력제를 직접 교살한 데다 반란 직전까지 청나라의 번왕으로 부귀영화를 누리던 인간이 이제 와서 그렇게 나온다고 감동하는 옛 명나라 백성들도, 그를 지지해 반청운동에 나선 명나라의 유신 및 장수들도 없었다. 영력제는 일곱 아들들이 있었는데, 모두 [[요절]]하거나 행방불명됐거나 오삼계에게 살해되었다. [[http://m.blog.daum.net/shanghaicrab/11363489|남명 마지막 황제의 최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