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영국군 (문단 편집) === 근대 === 현대 영국 육군(British Army)은 1707년 연합왕국 성립시 [[잉글랜드]] 육군(English Army)과 [[스코틀랜드]] 육군(Royal Scottish Army)의 통합으로 생성되었다. 물론 잉글랜드 군은 이전부터 역사상 계속 쭈욱 있어왔다. 영국의 지리적 특성상 상비군이 잘 발달 하지 않았다지만 [[상비군]]은 계속 존재해왔고 아예 폐지한 것은 아니다. 대륙 영토의 상실/평시의 비용 문제/재원이 많이 소요되는 해군의 필요성 등으로 인해 육군력이 상대적으로 저평가/약화의 길을 걸었을 따름이지 말이다. 그렇기에 크롬웰의 군대가 영국 육군의 기원이라는 것은 엄밀히 따지면 정확한 사실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중세때 나름 전면전에서 깽판치던 나라였음을 잊어선 안된다. [[영국 내전]]시 의회와 국왕이 충돌하자 [[런던]]을 탈출한 [[찰스 1세]]는 그를 따르는 군대를 규합하여 초기에는 의회군을 압도했으나 [[올리버 크롬웰]]의 사병집단인 [[철기대|철기병대]]([[아이언사이즈|Ironsides]])가 등장하자 전세가 역전된다. 그리고 이 철기병대의 강한 군기와 훈련법을 기초로 의회파 군대 전체를 훈련시킨 것이 바로 'New Model Army' 즉, 새로운 모델의 군대다. 물론 크롬웰의 군대만이 의회파는 아니었고 크롬웰의 부대가 조직력과 전공이 가장 컸기 때문에 왕당파에 승리하고 나서도 영향력이 컸다. 그리고 크롬웰을 비롯한 의회세력이 결국 찰스 1세를 처형하면서 사실상의 '영국 육군'이 되었다. 최종적인 내전 종결 직후에 의회는 이 강력한 군 조직을 해산하려 했으나 그에 실패했고[* [[윈스턴 처칠]]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2차 영국 내전? 거 간단하지. 왕이고 귀족이고 [[지주]]고 [[상인]]이고 [[도시]]나 촌이나 [[신부]]든지 [[목사]]든지 스코틀랜드건 [[웨일스]]건 잉글랜드건 가리지 않고 한 놈 쥐어 패려고 한 전쟁이야! 근데 그 한 놈(New Model Army)이 다 때려부쉈지!'''"], 올리버 크롬웰 사후 1661년 왕정 복고가 이뤄 지면서 [[찰스 2세]]를 따르는 군대와 현존하는 군대를 긁어모아 다시 잉글랜드 군이 재건되었다. 이 와중에 신편제군 부대 상당수가 찰스 2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영국군 근위대]] 소속인 콜드스트림 근위 연대와 블루스 앤 로얄스 제 1 근위 용기병 연대가 바로 이 때 합류한 부대들이다. 블루스 앤 로얄스 제 1 근위 용기병 연대는 엄밀히는 왕립근위기병연대와 1왕립용기병연대가 합쳐진 것인데, 왕립근위기병연대의 근간이 올리버 크롬웰이 창설한 흉갑기병연대다. 이들이 신편 잉글랜드 군에 합류했다. || [[파일:external/3.bp.blogspot.com/English+Civil+war.jpg|width=300]] || || 영국 내전 당시의 New model army || 이후 권리장전으로 영국의 왕은 성문법상으로 상비군을 가질 수 없게 되었으며,[* 이때의 상비군은 지배수단으로서의 군대를 말한다. 공격수단으로서의 군대는 여전히 보유가능하며, 그런 의미에서 로열네이비(왕립해군), 로열에어포스(왕립공군)을 보유한다.] 그런 탓에, 현재의 영국 육군은 해공군과 달리 '왕립'[* 엄밀히 말해 Royal은 '왕립'이라는 뜻이 아니다. 편의에 따른 번역일 뿐이다.]의 칭호를 받지 못하고 단순히 브리티쉬 아미(British Army)라고만 불린다. 그러나 육군 사관학교는 왕립의 칭호를 받았다. 그 외에도 예하부대 단위로 왕립 타이틀을 달고 있는 곳이 많으며,[* 전쟁에서 큰 공적을 새운 부대에서 왕립의 칭호를 수여한다.] 이는 해군이나 공군의 예하부대에 없는 것(애초에 '왕립~군'이 이미 붙었으니 무의미)과 대조된다. 다만 이는 대체로 의장으로서의 의의가 큰 군단, 연대 등에 해당하고, 실제 기능 편제인 사단, 여단 등에서 나타나는 일은 적다. 봉건제 하에서, 영국군의 시초는 각 지방 영주들이 여기저기서 긁어모은 사병들에서 기초한다. 때문에 현재의 영국군 부대는 'XX 공작의 의용병'이라든지 'ㅁㅁ지역 방위대' 같은 식의 요상한 부대명칭이 많은데, 실제로 이들 중에는 300년이 넘어간 부대 역사를 지닌 곳도 많다. 반면 해군은 예나 지금이나 전통적으로 영국의 국가 원수인 국왕 일가에게 충성을 바치는 군대다. 때문에 영국 해군은 일반적으로 왕립해군, 즉 로얄 네이비(Royal Navy)라고 불리며 함선 명칭의 접두어도 국왕 폐하의 함선이라는 뜻의 HMS(His/Her Majesty's Ship/Submarine)가 붙는다. 1차대전 말에 창설된 공군 역시도 왕립공군, 로얄 에어포스(Royal Air Force)다. 2차대전 관련 자료에서 많이 보이는 RAF가 바로 왕립공군.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 [[해적]]과 무장 상선을 모아 편성한 해군이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퇴한 이후 해군 강국이 되었다는 인식이 있지만, 실제로 해군력이 신장된 것은 [[올리버 크롬웰]]이 "항해 조례"를 발표하여 [[네덜란드]]의 무역 선단의 힘을 꺾고 네덜란드 해군과와 대립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네덜란드 해군과의 건함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면서 -게다가 네덜란드가 프랑스에게 연달아 털려 국력이 쇠퇴하여 해군력도 약화되면서- 사실상 유럽 최강 해군국으로 떠오르며 세계의 바다를 주름 잡기 시작한다. 그러나 초기에는 해군력만으로는 경쟁국을 누르기 어려워 아메리카 대륙 연안의 스페인 세력을 누르기 위해 [[사략선]] 허가를 남발했다가 [[카리브해]]의 [[해적]] 전성시대를 열기도 했다. 이후 [[프랑스]]와의 식민지 쟁탈전에서 우세한 해군력으로 상대의 본국으로부터의 지원과 보급을 끊고 약체화된 적 지상군을 격퇴하는 전법으로 번번히 프랑스를 엿먹인다. 게다가 프랑스의 최전성기중 하나인 [[루이 14세]] 시대에는 걸출한 육군 지휘관 [[말보로]] 공작 [[존 처칠]]이 등장하여 군 제도를 일신했고, 그 결과로 당시 육상에서 최강이라던 [[프랑스군]]을 연달아 격파하기도 한다. || [[파일:external/www.britishbattles.com/25th-foot.jpg|width=300]] || || [[7년 전쟁]] 중 민덴 전투의 영국군 || [[7년전쟁]]에서 프랑스와의 전쟁을 승리하며 북아메리카에서 프랑스 세력을 내쫓는가 싶었으나, 새로운 영토의 현지 원주민을 영국왕의 신민으로 받아들이려는 정책이 식민지 개척민들의 반발을 사고,[* 식민지 개척민들은 영국군을 도와 프랑스 세력을 몰아내면 새로운 영토를 자기들 소유로 내 줄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후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소모한 재원 마련을 위해 영국 정부가 새로운 세금을 거두려 하자 이에 반발하여 [[미국 독립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초전에는 제대로 전열을 갖추지 못한 [[13개 식민지]] 저항군인 대륙군을 ''' 찰스 콘월리스 등의 무능한 지휘관 투성이의 영국 육군'''[* 대체 영국 육군에 왜 이렇게 병사들을 못살게 굴며 소모품 취급을 해대는 똥별이 많았는지 궁금한 사람들은 [[매관매직]] 문서의 해당 항목을 참조하기 바란다.]이 화력과 선진적인 [[전열보병]] 전술로 압도해 버렸지만, 영국에 한방 먹여줄 기회만 엿보던 프랑스가 프랭클린 등의 식민지 특사들에 의해 대규모 군사 및 경제적 지원을 해준 덕에 13개 식민지 대륙군의 총체적 승리로 미국이 독립해 버린다. 그리고 프랑스는 이 여파로 왕실재정이 파탄나서 내부 갈등이 심각해진다. 그 결과 [[프랑스 혁명]]이 나고 최종적으로 [[나폴레옹 전쟁]]으로 확대되자, 영국군은 강력한 해군을 활용하여 프랑스군의 해외 진출을 막고 프랑스와 동맹을 맺으려는 일부 국가들을 응징한다. 특히 프랑스 [[이집트]] 원정군의 발을 묶은 [[아부키르 만 해전]]과 스페인-프랑스 연합함대를 괴멸시킨 [[트라팔가르 해전]]이 유명하며 이런 영국 해군의 강력함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대륙 봉쇄령을 내렸다가 오히려 프랑스와 유럽 경제가 흔들리는 경험을 하고, 영국은 [[포르투갈]]과 동맹을 맺어 [[이베리아 반도 전쟁]]에 참전, 스페인 [[게릴라]]를 지원하며 나폴레옹의 후방을 교란시킨다. 나폴레옹은 실제로 "이베리아 전선이 내 위장을 더 쓰리게 한다."라고 말한 바 있으며, 나폴레옹이 위장병을 갖고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또한 이 무렵 요크 공작 프레드릭의 주도하에 육군을 개혁하여 연공 서열 제도를 도입하여 [[매관매직]] 제도를 보완하고 군의 훈련 체계를 표준화, 상대적으로 약체였던 육군력을 강화하기 시작한다. 19세기까지 영국 육군은 귀족이 자신이 창설한 각 부대를 지휘하는 것을 당연히 여겨 매관매직제가 제도화되어 있었다. 이는 장교지위를 가진 사람은 누구나 돈을 내고 [[진급]]이 가능하고 보다 상급부대도 지휘할 수 있는 제도였다. 그러나 이런 제도는 무능하고 돈만 많은 자들이 군을 장악하는 문제점이 있었으며, 이런 잘못된 제도의 결과는 [[크림 전쟁]]에서 보여준 영국군의 삽질이었다. 또한 각 계급에도 시세가 매겨져 있어 계급을 사고 파는게 가능했다. 하지만 역시 장성급은 어느정도 근속과 실적을 요구했다. 또한 아무때나 계급을 살수는 없고 최소 근속년수를 채워야 진급할 수 있었다. 또한 샌드 허스트 육군 사관학교를 설립하여 보다 전문적인 장교 양성을 시작한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 실패하자, 영국이 자랑하는 불세출의 명장 [[아서 웰즐리]]를 앞세워 이베리아 반도를 석권하고 남프랑스를 장악하여 나폴레옹을 몰락시키는데 일조하고, 이후 재기한 나폴레옹을 [[프로이센]]군과 함께 [[워털루 전투]]에서 아슬아슬하게 박살낸다. [[나폴레옹 전쟁]]당시의 [[전열보병]]은 각국을 상징하는 다양한 색상의 군복을 착용했다. 프랑스는 [[파란색]]을 쓰고, [[대영제국]]은 [[빨간색]]을, [[오스트리아]]는 [[흰색]], [[러시아 제국]]은 [[초록색]], [[프로이센]]은 [[남색]], [[오스만 제국]]은 전열보병개념은 없으나 [[황토색]]~[[주황색]]이며, [[미국]]은 프랑스군 군복 복제의 영향을 받은 [[흑단색]] 군복이다.[* 미군으로 개편되기 이전 대륙군 시절 때는 주 연대마다 군복 복제와 색상들이 달랐다.] || [[파일:external/britishbattles.homestead.com/British_square_at_Waterloo_op_544x744.jpg|width=300]] || || [[카트르브라 전투]]당시의 28보병연대 || [[매관매직]], [[태형]] 같은 후진적인 면모[* 근데 이건 영국뿐만 아니라 당시 유럽 군대에 만연한 악습이었다. 오히려 태형은 범죄자 같은 저질 인력의 비율이 높았던 프로이센군이 영국군보다 훨씬 심했다.]에도 불구하고 영국군은 실탄을 사용하여 훈련에 임하였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값비싼 실탄을 훈련에 사용하는 몇 안되는 나라였다. 이는 원래 부유한 영국이기에 가능했다. 프랑스군만 해도 실탄은 물론이고 [[수석총]]의 [[부싯돌]]조차 아까워서 나무조각을 대신 끼워 훈련했을 정도였다. 당대 유럽국가중 가장 빠르고 정확한 [[머스킷]] 사격을 퍼붓는 등 실전에 있어서는 맹위를 떨쳤다. 이 빠른 장전속도를 활용하여, 2열 정도의 가늘고 긴 대열을 형성해서 가급적 모든 화력을 일시에 적에게 쏟아붓는 [[레드 코트]]만의 전술은 [[씬 레드 라인]](Thin Red Line, 가는 붉은 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타군에 경외와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워털루에서도 바로 이 전술로 그전까지 돌격이 막힌 적이 없던 나폴레옹의 근위대를 패퇴시킨다. 다만 주의할점이 당시 프랑스군은 극한의 한계에 달한 시점였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러시아 원정]]의 후유증) [[크림 전쟁]]까지 전통적으로 영국 육군은 최고 사령부 역할을 근위대가 담당했으나, [[독일군]]이 장군참모부(Generalstab)를 설치하여 효율적으로 군을 통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프랑스군을 [[관광]] 시켜주는 것을 보고 참모부를 설치하게 된다. 식민지 쟁탈전쟁에서 영국군은 라이벌 프랑스를 상대로 비록 실제 전투는 벌이지 않았으나 '''식민지 땅따먹기란 이렇게 하는 거란다'''를 시전하며 우세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보어전쟁]]에서 현지주민과 연계된 [[게릴라]] 전법에 제대로 당하며 쓴맛을 본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현지 주민들을 모조리 [[수용소]]에 가두고 게릴라를 소탕하여 보어전쟁에서 어떻게든 승리하지만 국내외에 엄청난 비난을 받았고, [[영일동맹]]이 체결되는 간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남아프리카]]에서 워낙 악명을 샀고, 동시에 러시아를 왜 막아야 하는지를 설득하는 데에 실패하는 바람에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 진출한 유럽 국가들이 러시아를 견제하는 데 영국과 협조하려 들지 않으려 했다. 때문에 동아시아 내에서 러시아의 세력이 커지는 것에 불안감을 느끼던 [[일본제국]]과 [[영일동맹]]을 맺었고, 또한 필리핀에서의 우위권과 중국 시장에 대한 접근권을 인정받아야 했던 미국과도 여러 협정을 맺게 됐다. 이런 이유로 1차 영일동맹 조약은 대한제국의 명목상 독립을 "보장"하는 조항을 넣는 등 일본과의 다소 간의 불협화음이 있었다.[* 다만 이 당시 시점에서도 일본제국 내각의 목표는 대한제국의 보호국화였고, 영국이 일본을 필요로 하는 것만큼 일본도 영국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대한제국에 대한 명목상의 독립을 보장하는 해당 조항이 큰 문제 없이 내각과 의회를 통과할 수 있었다.] 이후 일본제국은 영국과 미국의 지원 의사를 확인하고 러시아 제국에 전쟁을 선포하였는데, 해당 시점에서도 영국은 일본제국이 전쟁에서 이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였고 영국 내 여론은 무모하게 전쟁을 건 일본을 비웃었으나, 예상 외로 일본제국이 전쟁에서 승리하며 영국의 예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동아시아 문제가 전개되게 됐고, 미국의 주선 아래에 일본과 러시아가 평화협정을 맺자 영국은 일본의 가치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됐다. 어쨌든, 나중에 이러한 수용소 제도는 [[소련]]의 [[스탈린]]과 [[나치]]의 [[히틀러]]라는 두 악당이 청출어람 수준으로 따라하게 된다. 또 보어전쟁을 거치며 영국군은 전체적으로 [[카키색]] 전투복을 채용하면서 [[레드 코트]]에서 [[토미]]로 탈바꿈하게 된다. 붉은색 제복 자체는 예복이나 군악대, 의장대의 행사복 등으로 아직도 남아있으며, 각국에서는 이들의 전훈을 본받아 위장색을 도입하게 되지만 [[프랑스군|여전히 정신 못차린 국가가 하나 있긴 했다]]. 결국 그 정신 못차린 프랑스도 제1차 세계대전 초기에 수많은 병사들이 과녁판이 되어 쓰러지면서 저시인성 군복으로 바꾸게 되었으니 영국군 입장에서는 더 큰 피해를 입기 전에 예방주사를 맞은 셈이다. [[제국주의]] 시대 최대의 제국을 이룬 국가인 만큼 각지에서 벌어진 군사적 격돌의 주역이 되었고, 그 결과 패배의 경험을 간혹 겪은 바 있다. [[크림전쟁]] 중 겪은 [[발라클라바 전투]], 사망자 비율 55:386에 사상자 비율로는 333:2459를 기록한 [[뉴올리언스 전투]], 마이소르 왕국과의 전쟁에서 참패한 [[폴릴루어 전투]],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1차 아프간 전쟁(1839-1842)]]에서 16,500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전멸당한[* 이 중 군인은 4,500여 명. 12,000명은 [[군무원]]/군인 가족 등의 [[민간인]]이었다.][* [[포로]]로 잡힌 것은 단 9명 뿐이었고, 살아서 도망치는 데 성공한 사람은 알려지기로는 단 1명 뿐이었다.] 카불 퇴각 작전, [[줄루]] 전사들에게 당한 참패인 [[이산들와나 전투]][* 이 당시 영국군은 디바이드 앤 룰에는 그야말로 전문가 수준인 대영제국의 통치술을 생각해보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행보를 보인다. 줄루 제국 침략과 폭압에 대해 깊은 증오심을 가진 다른 흑인 민족들이 적극적인 지리 정보와 온갖 정보를 제공하고 같이 싸우기까지 했지만, 영국군은 오히려 같은 흑인이라 자신들을 배신때릴까봐 이들을 따로 배치하였고 총기류를 전혀 주지 않았다. 심지어 줄루 군대에게 반수가 죽어나가는 와중에도 보다 못한 다른 흑인 민족들이 와서 총기를 달라고 돕겠다고 하는 순간에도 믿지 않으니 다른 민족들은 안되겠다고 달아나버렸고 영국군 부대가 전멸당하는 참패를 겪었다. 이 패배에 영국군은 엄청난 욕을 먹고 물량 공세 및 이후 다른 전투에서 믿어보고 다른 흑인민족들에게 총기를 제공하니 잘 싸워주면서 결국 줄루 제국은 무너져 영국이 승리하게 된다.] 등의 굵직한 참패들이 있었다. 다만, 이산들와나 전투 이후에 벌어진 로크스 드리프트 전투에서 탄약만 제대로 불출받았을 뿐인데 1:40의 병력비를 딛고 승리를 거두었다는 점을 보면 [[옥의 티]]라고 봐도 될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