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연형묵 (문단 편집) == 말년 및 사망 과정 == 결국 [[강계정신]]을 통한 지방산업공장과 가정 그리고 군수공장을 공급하고도 남을 전력량을 생산하게 되었으며 지금도 중소형발전소는 계속 건설중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때를 기준으로 연형묵은 국방위원회 위원으로 복권이 되었다. 특히 2001년에 '''김정일'''이 중국의 발전상황을 관찰하면서 10월 3일 담화를 발표하면서 7.1 경제개혁조치를 시행하게 되는 결정적 이유였으며 이것의 영향은 연형묵이 중국에서 김정일 보좌와 함께 직언함으로써 2002년 장성택과 [[박봉주]], [[박남기]] 등 상당한 거물들이 방남하게 되었다. 그리고 [[박봉주]]와 [[장성택]], [[박남기]], [[로두철]] 등 상당한 인물들이 관람하면서 김정일에게 보고할 내용들을 작성할 때 상당한 보고용을 작성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가운데 박봉주와 박남기, 로두철은 상당부분을 개혁에 관련된 내용을 김정일에게 보고를 제출하였다. 그전에 [[김정일]]은 특히 '''박봉주'''를 포옹하며 환영하는 분위기를 만들게 되었으며 가장 총애한 인물중에 한명으로써 로동신문과 조선중앙TV에서 밝히고 있다.[* 이때 가장 환영을 잘받았던 인물이 바로 박봉주였으며 김정일도 박봉주를 환영하며 가장 박봉주를 신임하게 되었다.][* 그 반대로 폭탄주를 즐겼다고 소문이 났던 장성택은 세번째 숙청을 당하게 되는 이유였으며 가장 핵심적은 박봉주 총리한테 항명한 신기남과 더불어 혁명화를 다녀오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다.] 특히 박봉주의 보고를 듣고 '''7.1 경제개혁조치'''를 시행하였으며 내각 총리에 취임한 박봉주는 '''2003년'''을 기준으로 종합시장의 발달을 본 대한민국의 반영을 정확히 하면서 연형묵이 김정일의 지시를 박봉주에게 대신 전하게 되어 경제개혁조치를 발판으로 농민시장을 종합시장으로 변경하게 되었다. 북한은 이때를 기준으로 상당한 식량난에서 벗어나게 되면서 이것을 발판으로 사회주의 상업법과 무역법 그리고 양어법, 가격법 등 상당한 법안들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에서 제정되거나 개정이 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돈주들이 대부분 무역회사를 설립하면서 승인을 받고 건설이나 혹은 제조업을 키우게 되거나 혹은 상점 혹은 식당을 만들거나 가내작업반을 설립하면서 공장제 수공업을 키우게 된다.] 그리고 이때의 북한의 사유화 조사에 따르면 제조업은 10% 규모로 외화벌이 사업소는 30%대이며 상점과 식당 혹은 편의봉사업은 대부분 50% 이상이 초과하였으며 이는 박봉주와 연형묵이 있었기에 가능하면서 이때 김정일은 박봉주를 신임하게 되었으며 연형묵은 박봉주의 뒤를 밀어주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연형묵도 온전할 수가 없었으며 특히 2004년에 췌장암에 발병되면서 결국 1998년에 자강도 인민위원장을 사임하고 2005년에는 췌장암으로 인하여 [[박도춘]]에게 위임하면서 김정일이 수술을 받으라 권유하고 유럽으로 보내서 수술을 받게 하였다.[* 하지만 연형묵의 췌장암은 이미 늦었다고 밝히고 있다.] 결국 [[2005년]]에는 결국 자강도당 책임비서도 결국 그만두며 결국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결국 10월 22일 결국 사망하게 되면서 연형묵의 장례를 국장으로 결정하게 되어 김정일과 박봉주, 김영남, 조명록 등 상당한 거물들이 조문을 왔으며 김정일이 연형묵이 쓴 글을 보고 연형묵의 시신을 만지며 슬퍼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 이유는 연형묵이 김정일에게 항상 건강하라는 변하지 않는 충성심과 항상 북한을 걱정하는 그러한 생각이라는 의미라고 밝히고 있으며 결국 이것이 현실화가 되어 결국 박봉주 총리가 박남기에게 밀리는 결과와 함께 내각이 당과 군에게 결국 권력투쟁에서 밀리는 결과가 나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